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99)
999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6)
항요의 얼굴은 이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려 버린 상황이었다.
연호정이 작정하고 공격하려면 굳이 도끼를 휘두를 필요도 없다. 주먹질 한 방에 몸뚱이가 증발해 버릴 수도 있다.
‘……!!’
순간 항요는 떠올렸다.
과거 연호정이 소부주가 되어 귀맹했을 때, 모든 무사가 소리 높여 환호하던 그 순간을.
그 자리에는 항요도 있었다. 항요는 물론 삼도문의 무사들도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흑도를 경원시하는 걸 넘어 끊임없이 증오를 불태우는 무사들의 절반 이상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 대부분도 연호정의 귀환에 환호성을 질렀다. 맹 내에서 벌어졌던 몇몇 비무에서 그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도 보았지만, 사실 그런 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난세는 영웅을 부르고, 영웅의 출현에 사람들은 운명을 느낀다.
그때, 자신은 어떠했나.
자신과 삼도문의 무사들은 멀리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연호정을 보며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
항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렇다. 그 역시 연호정의 등장에 환호했다.
흑도로 전향했는데도 그의 등장에 연신 소리를 지르며 환영했다. 휘하 무사들에게도 연호정만 한 걸물은 세상에 흔치 않다며 찬사를 늘어놓곤 했다.
그런 연호정이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다.
시커먼 손도끼로 자신을 겨눈 채, 그때보다 훨씬 더 매섭고 어두운 기도를 뿜어내며.
‘뭐지?’
항요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이상했다.
그는 연호정의 실력에도 감탄했지만, 사실 그의 무공보다는 결단력과 과감함에 매료되었었다.
연호정은 무림 출도 후 온갖 악업을 쌓았던 구주명가의 실태를 폭로하며 선봉장으로 나가 싸웠다.
결국 구주명가는 무너졌고, 벽산호장이라는 별호로 불리며 만인의 찬사를 받았다.
항요가, 나아가 그와 비슷한 중소 문파의 많은 무인이 연호정에게 환호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는 강하고 과감했으며, 백도답지 않은 호쾌함으로 무장한 호걸이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구주명가가 제아무리 지독한 악업을 쌓았다 한들, 소위 명가 출신이라면 그런 식으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여파를 감당키 힘들기도 하거니와 당대 천하제일세가라는 위명에 짓눌려 분만 삭일 것이다.
연호정은 달랐다.
그는 언제나 달랐다.
혹자는 말했다. 연호정의 소문은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천재라는 수식어를 넘어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나 최연소 성천에 도달했지만, 그것은 재능의 영역일 뿐 실제로 그가 삼교를 상대로 한 일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으리란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
그조차도 축소된 소문이라고.
하남, 호북을 넘어 호남에서 광동을 돌아 사천과 섬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는 모두 참여한 사람이 연호정이었다. 단순 사건의 흐름만 돌아보아도, 연호정은 거의 모든 사건에 파고들어 문제를 찾아냈고 싸움은 그 뒤에 일어났다.
말하자면 연호정의 신들린 전술안과 과감성, 파격적인 움직임과 매서운 무공에 개방의 후개와 무림맹 군사의 지원이 더해져 기적과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항요는 그중 어느 것도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강호 무림이라는 곳에 그처럼 호쾌한 무인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이었다.
그랬던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연호정 앞에 서서 왜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는가?
‘모욕…….’
어? 근데 모욕이 뭐지?
항요의 정신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연호정의 무자비한 언사에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평소와 달리, 예민하게 반응했던 사고가 사방으로 마구 날뛰는 기분이었다.
“선공 양보는 필요 없나?”
문득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항요는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자세도 안 잡은 상대에게 선공을 날리는 거, 딱히 예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
“발도술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 어디 한번 막아 보아라.”
쿵!
연호정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항요는 저도 모르게 칼을 뽑았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때였다.
“헉!”
화아아아아악!
항요의 눈에, 시커먼 손도끼가 어느새 산봉우리처럼 거대해졌다.
연호정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는 오직 거대하고 화려한 흑색의 도끼와 그 도끼를 쥔 거인의 손만이 보일 뿐이었다.
‘죽는다.’
대자연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살기니 투기니 하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거대하고 압도적인 위세만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주, 죽는다!!’
칼을 휘두를 정신도 없다. 피할 수도 없다.
항요는 멍하니 그 도끼를 바라보았다.
쿠구구궁!!
천둥 번개를 동반한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크기 때문에 느려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풍처럼 빠르게 내려오는 일격이었다.
도끼날을 피할지언정 그 여파로 인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이다. 자신은 물론 이 땅과 주변 건물들이 몽땅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항요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칼을 올렸다.
“으아아아아!!”
스릉. 툭.
천지가 뒤흔들리는 위세도, 광경도 일순 모조리 사라졌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던 항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
칼이 반토막이 났다.
강하게 내리친 것도 아닌데, 도끼날이 너무나도 쉽게 도신을 가르고 그의 머리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풀썩!
항요가 그 자리에 철퍼덕 쓰러졌다.
연호정이 시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부르르르!
온몸이 떨려 왔다. 이가 딱딱 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소름 끼치는 금안(金眼)의 소유자가, 흑색과 백색으로 물든 한 쌍의 날개를 펼치며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누구냐.”
“예, 예?!”
“그런 헛소문을 유포한 자가 누구인가 물었다.”
“모, 모릅니다.”
항요는 자신의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연호정의 안광이 더 진하고 강렬한 기세를 뿜었다.
“허억!”
항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모,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그저 주변에 도는 소문이 그러했습니다!”
“생각해 내.”
“……예?”
“생각해 내라. 그 소문을 최초로 접했던 곳이 어디인지.”
“……!”
“가진 것은 자존심밖에 없지만 주제는 알아서 감히 나대지도 못했던 네놈의 머릿속에 이러한 행동이 옳은 것이라고,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속삭여 준 마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참고로…….”
“…….”
“이건 부탁이 아니야.”
번쩍!
연호정의 두 눈에 도사린 금빛 광채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존재감. 주변에서 이 광경을 보던 모두가 압도당하여 입을 쩍 벌렸다.
항요는 마치 초자연적인 존재에 홀린 것처럼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천검문(千劍門)과 암파권문(巖波拳門)의 문주들과 자주 이런 얘기를…….”
“…….”
“우, 우리는 흑도인들이 싫었습니다! 그런 놈들과 손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그럼 꺼져.”
“예?!”
연호정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그렇게 싫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라. 적창문처럼.”
“……!!”
“그리고 후회해라. 훗날 삼교와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이후에야 본인이 얼마나 병신 같은 선택을 했는지, 후회 속에서 현실을 마주해라.”
오싹!
연호정의 말을 들은 모두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삼교라는 미지의 적이, 마치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그들은 전쟁 중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칼부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너 같은 반동 세력을 일일이 설득하고 싶은 생각 따위, 내게는 요만큼도 없어.”
“…….”
“다시 보이면, 그땐 죽이겠다.”
항요의 몸이 확 굳어졌다.
무림맹 안에서 당당하게 죽이겠다고 말하는 묵룡부의 작은 주인.
그러나 그 말이 끔찍하게 폭력적임에도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누구도, 설령 무림맹주조차도 그를 멈추지 못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허리춤에 흑룡부를 건 연호정이 진양에게 말했다.
“가자.”
“그럽시다.”
연호정의 뒤를 따라 걷던 진양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항요 옆에 섰다.
항요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연호정이 자아낸 압도적인 공포가 정신과 마음에 엄청난 타격을 준 것이다.
진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흑도가 싫다고?”
“…….”
“병신 같은 샌님들. 나도 너희 백도 놈들이 지랄맞게 싫어. 같이 밥이라도 먹을라치면 지독한 악취 때문에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단 말이다.”
“…….”
“그래도 난 악취 가득한 곳에서 꾸역꾸역 밥을 처먹지.”
진양이 고개를 돌렸다.
“싫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곳에 있다.”
항요의 눈이 흔들렸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복잡한 얼굴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언행이 일대 파격이요, 엄한 장군의 무자비한 매질이었다면.
진양의 담담한 말은 그들에게 당연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사막 속 녹수(綠水)와 같았다.
그렇다.
흑도인이라고 무림맹이 싫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기기 위해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불같은 분노와 증오의 사슬을 접고 하루하루 버티며 이곳에서 머무는 것이다.
연호정과 진양이 사라진 자리.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 * *
“의외요.”
“뭐가?”
“대장 성격이면 삼도문주인가 뭔가 하는 놈을 아주 개박살 내 버릴 것 같았거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그러고 싶긴 했지.”
진양도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에 휩쓸리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놈은 아니었소. 평생 그렇게 쥐새끼처럼 살았으니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네 말이 옳다. 오히려 저런 놈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무림맹에 해가 돼. 성격이나 고쳐먹으면 모르겠지만, 안 그러면 언제고 분란을 일으킬 놈이다.”
“그럼 더 두들겨 패야 했던 거 아뇨?”
“우리는 지금 백도인과 싸우는 게 아니야.”
묘한 말이었다. 적어도 진양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아무리 묵룡부의 소부주라지만 출신이 백도 명가인데, 백도인과 싸우는 게 아니라 하니 정말 흑도인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긴, 언행만 보면 훌륭하다 못해 위대한 흑도인이라 할 만하지.’
그때,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슈?”
“……조금 의아해서.”
“뭐가 말요? 조금 전에 그놈?”
“그놈도 그놈이지만.”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지?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봐. 제아무리 놀랍고 대단한 광경을 봐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까먹어 버려. 나에 대한 그들의 마음도 그와 비슷하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는 놈들이지. 성천이잖아? 다른 성천들은 ‘어이쿠, 무신님들!’ 하면서 떠받드는 놈들이 대장한테는 왜 그러는 거요? 당최 이해할 수가 없네. 도검제하고 찐하게 붙는 것도 봤으면서.”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 때문에 그런가? 질투, 뭐 그런 거 아뇨?”
“그런 것도 있겠지. 하지만…… 뭔가 이상해.”
“이상한 게 한둘이겠소, 이 바닥에.”
“악의가 느껴진다.”
“응?”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흑백 연합에 금이 가게 하는 것…… 단순히 그런 목적이 아닌 것 같아.”
“……?”
“남궁세가에 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