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0
010 샌프란시스코(3)
“오, 대단하잖나. 좀 과감한 주장도 있었지만 그냥 아무렇게 내던진 건 또 아닌 듯하던데.”
랠스턴이야 당연히 이런 반응이라고 예상했다.
“···명석하군.”
‘어라, 혼잣말이긴 했지만 이 양반도 순순히 인정하잖아.’
뜻밖에 개리슨 역시 더 시샘하기는커녕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감탄했다.
뭐 처음 만났을 때 개리슨의 시샘은 뭇 남자라면 할 법도 한 것이었다.
다만 지금 반응을 보건대 적어도 그 시샘은 뒤틀린 인성의 발로가 아닌 듯싶었다.
태선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 시기의 돈 많은 사업가 양반들이 날 좋게 볼수록 좋고 반대로 밉게 보면 좋을 게 없으니까. 하물며 그게 랠스턴의 친구 겸 동업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
그래도 머쓱하기는 했는지 개리슨은 괜히 “크흠!” 소리 내며 헛기침을 하더니 급한 일이 있다면서 가버렸다.
남은 사람들이야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태선에게 온 관심을 쏟아냈다.
그리고 태선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랠스턴은 사교 모임에서도 경험이 풍부했는지 그 사이에서 대화를 잘 중재했다.
“정말 며칠 전부터 내 집에 머무르던 그 청년 맞는가. 대체 그런 식견은 어떻게 쌓았나?”
“책이며 신문이며 열심히 봤습니다. 뒤늦게 이런 세상이 있음을 알았으니 매일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요.”
“이거 며칠 전 자네가 한 말 그대로구먼.”
“어머나, 킴이 랠스턴 씨의 저택에서 또 무슨 이야기를 했었나보네요. 궁금해라. 무슨 이야기였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랠스턴은 태선을 보며 씨익 웃더니 직접 말하라는 듯 눈을 살짝 찡긋했다.
“괄목상대, 하루 지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될 정도로 성장한다는 말인데 제 고향의 속담 같은 것이지요.”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니 재밌고 신선한 표현이네요.”
대화를 이어갈 고리를 만들어두고는 태선에게 말할 기회까지 챙겨주는 것이리라.
제이크의 추천서도 있었지만 가능성을 보여준 만큼 역시 확실하게 챙겨주는, 아니 투자하는 사람이었다.
‘좋아. 이대로만 가자.’
태선은 그 기회를 받아 다른 사람들과 원활하게 대화를 풀어나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선의 첫 사교 모임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
무슨 일이든 처음은 다음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사교 모임 이후 태선의 행보 역시 그러했다.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쌓아나갔다.
“놀라워. 정국을 보는 눈이 예리하군.”
“그러게나 말이야. 가끔은 아시아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이 안 믿길 정도의 통찰을 보여주니.”
지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식견을 선보이는 한편 공부하는 모습도 성실하게 보여줬다.
“또 신문 읽고 있었나? 좀 쉬어가면서 하게나.”
“정말 열심히 하는군. 자네 정도의 머리에 그런 노력이 더해지다니 나날이 식견이 느는 것도 당연하겠구먼.”
특히 날마다 집에서 보는 랠스턴이나 사업상 논의를 위해 랠스턴가를 들르는 동업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나 잘났소 하는 모습만 보여도 안 된다.
비록 첫 사교 모임에서 개리슨은 못내 감탄하며 물러났지만 모두가 검은머리 동양인 청년의 뛰어난 식견에 감탄하고 물러나지는 않을 터였다.
아니, 사실 그렇게 물러난 개리슨이 특이한 케이스일 것이다.
‘내가 당신들보다 부족하고 배울 것이 있으니 좀 가르쳐주십시오···라는 마인드도 간간히 보여줘야 해.’
태선이 정한 처세의 첫 번째 원칙은 이것.
랠스턴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제이크 벌링게임의 추천서를 받았거늘 첫 사교 모임에서 그런 시샘을 받았다.
거기에 이 시대 매운맛 인종 차별까지 더해지면 환상의 콜라보래이션이 따로 없으리라.
‘후우, 어째 처세하는 게 더 어렵다냐. 방송국 다닐 때 중립파로서 여기저기 눈치 보면서 생존해온 짬바가 이렇게 도움 될 줄이야.’
장래가 창창한, 무시해서 안 되는 자질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시샘 받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이건 랠스턴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랠스턴이야말로 더 신경을 써줘야 했다.
“랠스턴, 매번 바쁘신 중 죄송하지만 신문에 난 여기 1844년 영국 은행법에 대해서 의견을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오, 물론이지. 태선 자네와 대화는 언제라도 환영이라네.”
하물며 랠스턴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며 그 주제를 알게 모르게 그의 사업 분야인 은행업으로 몰아갔다.
은행업에서도 처음에는 일반적인 영역이었다가 점점 더 전문적이고 현안에 접촉되는 주제로 옮겨갔다.
“흠···저번 영국 필 수상이 주도한 은행법이 실상 중앙은행의 역할을 명시한 건데 그게 미국에서는 은행업과 지금 혹은 향후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허허,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구먼. 사실 그건 나로서도 어려운 논제라네.”
‘그야 그렇겠죠. 본래 역사의 흐름대로라면 이제 몇 년 뒤에 캘리포니아 은행을 합병 창립하는데. 아마 이 시점에서는 이걸 논의하고 있을 테니까.’
즉 이런 질문들은 그로서도 한창 동업자들과 함께 고민하는 부분일 터.
“흐음, 그래, 이렇게 하는 게 좋겠군. 어차피 자네도 사교 모임에서 내 동업자들과 면면은 익혔으니 말이야.”
그리고 랠스턴은 몇 달 뒤 태선에게 이런 답을 내줬다.
“다음에 내 동업자들이 오면 티타임에 참가하게.”
“정말인가요? 그런 자리에서 제가 실수라도 하지 않을는지 걱정스럽네요.”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됐다. 여태까지 이 대답만 기다려왔다고요.’
기실 태선이 은행업 쪽으로 질문이나 논제를 몰아가면서 노려온 바였다.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실속이 있는 뭔가를 얻어가려면 반드시 랠스턴의 사업 영역에 갈고리를 걸어야 했고 이것이 바로 그 첫 고리인 셈이었다.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는 어련히 우리가 알아서 자네를 배제할 거야. 허나 자네를 들여도 될 자리는 낄 수 있도록 해주지. 도움이 많이 될 게야.”
이런 답을 들은 이후 태선은 종종 저택에서 랠스턴과 그 동업자들의 티타임에 마치 객원 멤버처럼 참석했다.
물론 태선은 티타임에 끼게 됐다고 나름대로 조언이랍시고 주제 넘게 나서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미래의 흐름을 알고 있고 진보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나대면 이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그저 듣고 또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짐짓 탄복했다는 리액션만 해주기만 했다.
다만 언제까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한 방이야. 결정적인 때 한 방만 제대로 들어가면 돼.’
기실 티타임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얼굴을 비추며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그들의 말에 리액션을 하며 알게 모르게 친밀감을 쌓는 건 그래서였다.
그 한 번의 기회가 왔을 때 이들이 자신에게 기회를 줘도 되겠다고 공감하게 하기 위해서.
‘물론 심오한 안건은 맡기지 않기는커녕···애초에 내가 같이 있으면 말도 안 꺼내겠지만 그걸로도 충분해.’
딱히 큰 비밀도 아니라서 태선이 있는 자리에서도 공공연히 나올만한 논제이면서도.
각 사업체를 합병하여 큰 은행을 설립하려니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
이미 몇 년 전부터 논의했을 터이거늘 지금으로부터도 몇 년이나 지나야 캘리포니아 은행을 설립하게 되는 핵심 원인.
“문제는 자금이군. 주식을 발행해보면 어떤가?”
그건 바로 돈이었다.
“지금 전쟁 중이잖나. 하물며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이 남부에 돈을 댄다던데.”
“젠장, 하여간 유태인 놈들은 도움이 되는 게 하나 없군.”
“우리가 설립할 은행의 고객으로 그럴듯한 이들을 계속 찾아봐야겠지.”
“하아, 역시 그 수밖에 없나.”
그리고 잘 차려입고 모여서 의논 끝에 낸 결론이 참으로 정직하기 이를 데 없어서 태선은 설핏 웃을뻔 했다.
하물며 이 대화 패턴을 들은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 마무리를 못해도 대여섯 번은 들었어.’
돈에 대한 이 결론은 결코 해답이 되지 않을 것이다.
헛돌고 헛돌아 다음 모임에 다시 헛도는 논제의 물레방아를 굴리게 되리란 건 굳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실상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오늘은 이만 파하자는 맺음말이자 마지막 인사와 다름없었다.
‘이 시대에 나름 네임드이자 지식인들이 모였는데 자기들도 그걸 다 알겠지.’
기실 이때 은행은 전생 이전 태선이 살던 21세기 은행과 차이가 있었다.
고객이 돈을 맡기고 은행이 그걸 나중에 지급해주거나 대출해준다거나 하는 건 같다.
다만 그 근저 상식에는 큰 차이가 깔려있었으니.
‘좋게 말하면 이 시기의 은행업이란 철저하게 관계 위주의 사업이었지.’
예금을 유치하는 은행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나 고객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그만한 사회적인 위신이 있다거나 신용이 있다거나 하는 걸 따졌다.
‘근데 또 웃긴 게 반대로 돈 맡기는 사람 입장에서도 아무 은행에나 함부로 자기네 돈을 맡기지는 않았다는 것이지.’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의 은행과는 다르게 은행권이란 걸 발급하고 예금을 인출해줬다.
그런데 미국은 1836년 잭슨 대통령에 의해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지금은 자유은행 시대라는 것이다.
이게 말이 좋아 자유은행 시대라 불리지 뭔 대해적시대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나도 해적입네 너도 해적입네 하면서 생겨나는 세태와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무조건 사기꾼 족속들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 와일드캣 뱅킹이라 하여 사기꾼이 횡행하고 심지어 은행권을 안 바꿔주려고 일부러 산간 오지에다 교환소를 짓는 일도 속출했다.
즉 ‘체면’과 ‘신뢰’ 두 개의 허들이 돈 맡기는 사람과 돈 맡아주는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반대로 이걸 깰 수 있으면 남들이 뒤처진 사이에 앞서나갈 수 있어.’
특히 다른 데보다 이곳 샌프란시스코는 더욱 그렇다.
“제가 감히 나서기에 주제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기에 이 순간 태선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네가?”
태선은 여태 이 티타임에서 그저 듣기만 했다.
랠스턴이나 동업자들이 의견을 들어보고 싶으니 한번 말해보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교 모임이나 다른 자리에서는 자기 식견을 곧잘 드러낸 태선이었지만 이 티타임에서는 그걸 피했다.
그저 겸손하게 감히 자신이 감히 말할 자리가 아니라며 둘러대 왔었거늘.
“오, 이제야 킴의 의견을 들어보는구먼.”
“사실 부끄럽지만 매번 같은 결론만 내는 것을 킴도 들었을 텐데 저런 말을 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다른 답이 있어서 나서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처럼 태선이 이례적으로 나서자 관심들을 보이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 기대를 충족시켜 줘야지.
지난 몇 달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르며 티타임만 꼬박꼬박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무기가 될 그것의 준비에 만전을 기울여왔고 이제 그걸 꺼내보일 타이밍이었다.
“제게 아까 논의하시던 그 자본금을 확보할 괜찮은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