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09
109 친구여(5)
아주 긴 항해였다. 아니, 그 이전에 아주 긴 여행길이었다.
‘내 고국···미국을 떠난 지도 어언 몇 년이나 훌쩍 지났으니 말이야.’
더구나 나라를 떠나 머물던 곳은 태평양 건너 동아시아의 청나라였다.
본래는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거늘.
사촌이자 자신이 존경하는 앤슨 벌링게임이 주청미국대사로 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나저나 베이징에서는 나 없이 몇 개월 지났을 텐데 앤슨 형님이 잘 지내려나.’
앤슨 벌링게임이 자신에게 도와달라 청했다.
1861년 여름날 앤슨 벌링게임이 베이징에 왔을 때 자신은 이미 청나라에서 제법 오래 머무르며 이런저런 걸 많이 아는 소식통이었다.
수많은 청나라인과 인맥을 다졌으며 쿠데타에 반란에 온갖 사건이 일어나는 청나라 정세에도 빠삭했다.
해서 그는 앤슨 벌링게임을 돕느라 3년이나 지금에야 뉴욕 앞바다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의미는 있었어. 지금 청나라 고위 관료들조차 앤슨 형님은 신뢰하고 있으니 말이야.”
솔직히 자신이나 앤슨 벌링게임이나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온 법률가이거늘.
이 둘이 머나먼 동양 땅에서 외교적인 성과를 거둘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과연 살아봐야 알 일이야.”
거기에 생각이 닿자 마침 자신과는 반대되는 케이스인 한 조선인이 떠올랐다.
그와 주고받은 몇 통의 편지들은 지금도 가방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사업가로서 뉴욕에서 아주 크게 성공했다더니···하하, 청나라에서 한 일 못지않게 뿌듯하구먼.”
새삼 처음 그를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항구에서 서양인 감독이 화공들을 마구 다그칠 때 자신이 나서서 말렸었다.
그때 먼 발치에서 태선은 조선인 귀족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더니 며칠 뒤 찾아와서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통역 없이도 괜찮으니 통역관을 물리고 편하게 대화했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입을 열자마자 나온 말이 영어라서 매우 놀랐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며 뭔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고는 그의 부탁을 들어줬다.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배편을 알아보고 자신이 아는 인맥 중 가장 영향력이 클뿐더러 안목이 있으며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에게 추천서도 써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 태선 킴이 미국에 발을 들였을 때는 모든 것이 막막했을 테지.
‘내가 처음 청나라에 갔을 때처럼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사업가로 성공했다는데 직접 보지 않고서는 솔직히 실감이 안 날 듯싶었다.
“하하, 어째 그리운 고국에 돌아온 반가움보다 어서 만나보고 싶구만.”
슬슬 기선이 항구에 가까이 붙으면서 이제 선원들이 입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선 킴··· 내 친구를.”
잠시 후 가방을 챙겨 마침내 뉴욕 땅을 다시 밟은 제이크 벌링게임의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
“오, 돌아왔구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제이크 벌링게임을 반갑게 맞아주는 이는 하버드 로스쿨의 크리스 교수였다.
미시간에 부모님이 계신다면 뉴욕에서 공부하고 법률가로서 일할 때는 이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즉 제이크 벌링게임에게 있어서 이 사람은 은사였다.
“법률가로 뉴욕에서 제일 잘 나가던 네가 갑자기 아시아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처음에야 러셀 상회의 법률자문으로 갔지만 저도 이렇게 오랫동안 있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일단 앉거라.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자.”
지금도 크리스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앉는 것조차 잊고 서서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쪼로록───!
“이거 혹시 제가 보내드린 찻잎으로 우리신 겁니까?”
“하하하, 맞다. 제이크 네가 돌아오면 같이 마시려고 늘 준비하고 있었거든. 그게 또 멋이 아니겠느냐.”
“하긴 그렇기야 합니다.”
몇 년만의 재회 그리고 차의 맛을 음미하고는 크리스 교수가 물었다.
“그래, 그 먼 청나라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좀 해주려무나.”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는지······.”
이렇게 운을 뗐으면서 막상 입을 열자 제이크 벌링게임은 이야기 보따리를 신나게 풀었다.
“그들이 지금은 문물에 있어 우리에게 뒤지고 있지만 역사에 있어서는 깊은 뿌리와 유산을 지녔습니다.”
“러셀 상회를 비롯해서 유럽 상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과연 국제법이라는 영역에서 법리도 중요하겠지만 실은······.”
“참, 또 청나라 옆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일본과 사이에 있는 나라인데 그곳의 역사도 파고들어 보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그 외에도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나 보고 들은 큰 사건에 대해서나.
“그리고 마지막에 베이징을 떠나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오, 제이크 네가 마지막으로 얻은 깨달음 같은 것이냐?”
자신이 아끼던 수재가 먼 나라에서 자신조차 하지 못한 경험들을 하고 돌아오며 얻은 깨달음이라니.
진심으로 궁금한지 노교수는 자못 눈을 반짝였다.
“거창한 건 아니고 동양 철학에는 인연이나 운명을 중히 여겼는데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연에 대해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 그래, 중요한 것이지. 기실 나나 네가 업으로 삼는 법률도 사람 사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냐.”
크리스 교수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덧붙였다.
“정치나 외교도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내 또 다른 애제자이자 네 사촌인 앤슨이 주청미국대사로 가서 크게 신망을 얻고 있다지?”
“예, 개인적으로 그 외교적 성취에 저도 도움을 준 듯싶어 뿌듯하더군요.”
크리스 교수는 그런 제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렇다면 잠시 뉴욕에서 법률가로서 커리어를 내려놓고 간 의미는 있었구나.”
“예, 저 스스로도 성장한 걸 느낍니다. 참, 그리고 그 외에도 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 있습니다.”
“앤슨을 도운 외교적 성취와 나란히 견줄 정도라니···허허, 이번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기에 그러냐?”
제이크는 생각만 해도 뿌듯했는지 은은한 미소를 머금더니 불현듯 물었다.
“혹시 교수님께서는 태선 킴이라는 사업가를 아시는지요?”
그리고 그 이름이 나오자 크리스 교수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흠칫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네게서 그 이름을 듣다니 뜻밖이라서.”
다만 제이크의 입장에서는 크리스의 이런 반응이 도리어 뜻밖이었는지 그를 쳐다봤다.
“실은 제가 도와줘서 미국에 건너온 조선 청년입니다. 아, 지금은 미국인이 됐다죠. 그리고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성공이라. 그래, 아주 크게 성공했지. 밴더빌트 씨에 견줄 정도로 말이야.”
“그···그 정도인 겁니까?”
편지를 주고 받을 때 태선이 석유나 전구로 성공했다고만 그랬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밴더빌트에 견줄 정도라니 이건 그냥 거물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실은 요새 법조계에 가장 이슈가 되는 이름이기도 하다네. 자네가 태선 킴의 이름을 언급해서 방금 전에 내가 놀란 것도 그래서였어.”
“예? 법조계에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건······?”
아무래도 화제가 옮겨가서 그런지 분위기가 좀 무거워졌다.
“아직 감이 안 죽었군. 그래, 사업가가 좋은 일로 법조계에서 이슈가 될 가능성은 극히 낮지. 지금 태선 킴은 소송전을 하는 중이거든.”
“소송이라. 사업이 마냥 성공한 줄만 알았더니 어려운 시기인 모양이네요.”
제이크 벌링게임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진심으로 자신의 친구를 걱정하는 표정···이었으나 막상 크리스의 반응은 또 달랐다.
“어려운 시기인 건 솔직히 판단이 서지 않는군. 물론 쉬운 싸움은 아니겠지. 상대가 모건과 록펠러이니.”
“허어, 거기다 상대가 모건이라고요? 록펠러라는 자는 처음 듣는데 누구입니까?”
“태선 킴과 비슷하게 크게 두각을 드러낸 사업가가 있네. 모건과 한 패라고 알면 되네.”
록펠러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준 뒤 크리스는 자신이 아는 바에 대해 제이크에게 상세히 설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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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 스탠다드 오일 사무실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공간이 크다는 것이었다.
“보일러 소송 자료는 여긴가?”
“총기 자료는······.”
그래서 모건과 전방위적 소송전을 벌이기 위한 전담 부서를 따로 두었다.
사실 20세기 이후만 되어도 대기업에 법무팀을 따로 꾸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법무팀으로 둘 걸 감안하면 괜찮아.’
해서 태선은 이 부서에 큰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물론 모건과 벌이는 이 소송전이 상징적인 의미에서 중요하기도 했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각각의 건이나 자료가 어마어마한지라 사실상 막대한 자원 투입 없이 속행이 불가능해서였다.
턱───!
[ 공격적 기업 인수에 있어 피해자들의······. ]턱턱───!
[ 남북전쟁 시기 사고 총기 관련된 공급 업체 JP 모건······. ]안 그래도 많이 쌓여있는데 이런 제목을 달고 실시간으로 높이를 더해가는 자료들만 봐도 그러했다.
턱턱턱───!
이게 겉으로만 보면 제목은 비슷하지만 내용을 따지면 다른 사건이고.
미묘하게 다르지만 또 비슷하게도 쟁점이 되는 사건이 무려 수십 건을 훌쩍 넘었다.
“저기······킴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사실 태선이 가장 염려하던 일이기도 했지만.
“죄송합니다. 저를 추천해준 푸어 씨를 생각해서라도 계속 하려고 했지만···안 되겠습니다.”
고용한 변호사가 태선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
그 순간 서류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이쪽을 봤다.
비록 변호사는 아니라도 이 일을 위해 소양이 있는 이들로 고용한 터였다.
개중 모건에게 치여서 이번 일을 돕겠다면서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 일의 실무 책임자로서는 가장 중책을 맡은 변호사가 손을 놓겠다고 해버리면 사기에 문제가 생긴다.
“오웬 씨, 일단 제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하죠.”
태선은 오웬을 데리고 사무실로 가면서 생각했다.
여태까지 잘 해왔는데 그만둔다는 건 혹시 모건에게 매수당하기라도 했나?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만약 매수당한 거라면 더 결정적인 타이밍을 노려 뒤통수를 쳤을 거다.
즉 헨리 푸어가 추천해준 이 변호사가 자신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일까.
“오웬 씨, 여태까지 잘 해주셨는데 오 그러시는 겁니까? 보수라면 섭섭하지 않게 드리고 승소했을 때 보상도 아주 크게 책정해드렸는데요?”
사무실에 들어와서 맞은편에 앉혀두고 묻자 변호사 오웬은 미안했는지 태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예, 보수는···솔직히 제게 과분할 정도입니다. 보수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지 말씀해주세요. 같이 해결해보도록 합시다.”
“킴 사장님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불안하게 떨리는 오웬의 눈동자를 한 군데 머무르지 못했다.
“혹시 모건에게 협박이라도 받으신 겁니까?”
“아뇨, 태선 사장님이 아멕스 경비대를 붙여주셔서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받은 것만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는지 오웬은 침울해졌다.
“실은···사건과 관련 자료를 접할수록 그 도둑 남작들의 협잡질과 악랄함에 치가 떨립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어렵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사건을 까보면 까볼수록 그렇게 악랄한 자들이 저와 제 가족에게 보복을 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으음, 그런 이유였나.’
이건 예상한 바였다. 그래서 방금 오웬도 말했듯 모건의 협잡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람까지 따로 붙여주었거늘.
“절대로 모건이나 록펠러가 오웬 씨와 오웬 씨의 가족들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킴 사장님이 진심이란 것은 압니다. 하지만 뭐든 방어보다 공격이 쉽죠.”
그만두기로 단단히 결정했는지 오웬이 자못 미안해하고 눈도 못 마주치면서도 말을 이었다.
“모건 같은 자는···나중에 본보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보복을 할 거 같습니다. 솔직히 이 일을 맡지 않아도 이 바닥에서 제가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데···이기든 지든 제가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혹여나 태선이 더 붙잡을세라 사무실에서 나갔다.
“······.”
태선도 착잡한 표정이면서도 그를 잡지는 않았다.
“하아, 이걸로 세 명째 대표 변호사를 갈아치우는 건가.”
잡아봐야 소용없고 설령 어떻게든 잡아두더라도 그를 고통스럽게 할 따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같은 말을 하거나 심지어 몰래 도망치듯 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였다.
“대표 변호사만 세 명이고 밑으로 고용했던 변호사도 죄다 합치면 아홉 명이군.”
이쯤 되면 헨리 푸어를 통해 소개를 받는 것조차 미안해질 정도였다.
애초에 변호사이면서도 깡이 아주 강력한 사람이어야 했다.
“혹은 집안이든 뭐든 뒷배가 강해서 모건의 잠재적으로 벌일 수도 있는 협잡질 같은 건 무시할 수 있다거나.”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겠는가.
오히려 그렇게 집안 빵빵한 변호사쯤 되면 기득권 세력이고 자신에게 고용되기보다 모건이 진작 로비 등을 통해 다져둔 인맥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애초부터 모건 가에서 이런 법정 싸움을 대비하려고 키워두었거나.”
인정하기 싫지만 상황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모건과 록펠러···큰소리친 이유가 다 있었군.”
거기에 지금은 자기 사업을 하느라 듀폰은 빠져있지만 그 삼총사가 합류하면 더 버거울 건 자명했다.
아무리 서로 뒤통수 각을 잰다지만 지금 그들에게 자신은 공통의 적이니까.
“태선, 손님이 오셨어요.”
어떻게 타개책을 찾을지 고민하는데 그때 노크소리에 이어 샬롯이 손님을 고했다.
‘손님···?’
하지만 달리 찾아오기로 한 사람은 없는데 누구인지.
“제이크 벌링게임 씨라면서···그게 청나라에서 알게 된 사이라는데 들여보낼까요?”
그리고 다음 순간 샬롯의 입에서 나온 말에 태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워낙 뜻밖의 이름이었기에.
“태선, 나일세.”
그러나 샬롯이 들어오면서 열어둔 문틈 사이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리자 태선은 곧바로 의심을 거두었다.
일어나서 직접 나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 얼굴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제이크! 하하하, 정말 당신이었군요.”
“그래, 나일세. 이렇게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갑구먼,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