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21
121 결혼식(2)
운명은 운명인데··· 이번 삶에서도 결혼식이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괜찮아요?”
“···네. 저보다 태선이 더 힘들었을 거 같은데.”
결혼식을 마치고 그 뒤로 이어지는 피로연과 이런저런 만남들을 마치고 밤이 되어서 겨우 시간이 났다.
힐츠 호텔 스위트룸에 방을 잡고 드디어 편한 차림으로 마주했는데 샬롯이 던진 이 물음에.
‘여기서 정말로 힘들었다고 하면 큰일 나겠지.’
결혼식 날에 힘들었다고 했지 않느냐··· 라고 평생동안 바가지 긁힐 떡밥을 남길 수 없는 노릇 아니겠나.
“힘들긴요. 드디어 샬롯과 공식적으로 맺어지게 됐는데 그걸 고생이라 하면 말도 안 되죠.”
발코니 쪽 테이블에 앉으며 태선은 싱긋 웃었다.
“하여간 태선은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말이 뭔지 너무 잘 알고 있다니까요.”
힘들었는지 안색이 좀 초췌했지만 기분은 좋아졌는지 샬롯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럼 우리 결혼 첫날을 기념하면서 어때요?”
이내 샬롯은 포도주와 잔 두 개를 가져와서 태선의 맞은편에 앉았다.
쪼르르륵────!
반려자가 따른 크뤼그 와인 향을 코끝에 대고 음미하다, 태선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영국에서 존 브라운 씨가 오셨었죠?”
“네, 대기실에 오셔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어요. 참 사랑꾼이시더라고요.”
“사랑꾼이라. 라이온스 경의 말로는 여왕님이 가장 총애하는 수행원이라 하시던데요?”
저번에 윈저성 때를 추억하는지 샬롯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윈저성에 칩거하시면서도 브라운 씨가 여왕님을 수행했었죠.”
“그런 분을 영국 여왕님께서 직접 보내주시다니. 정말 신경 많이 써주시네요.”
샬롯은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랑 결혼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새삼 팍팍 들죠?”
“그야 당연하죠. 그리고 브라운 씨가 샬롯과 같이 버밍엄 궁에 오라시던데.”
“네, 저한테 그 말씀 그러셨어요. 여왕님이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셨다던데 사실은······.”
살짝 망설이더니 이미 결혼했는데 말 못 할 게 뭐 있냐는 듯.
“윈저성에서도 여왕님이 말씀하셨거든요. 태선이랑 결혼하면 오라고.”
“오호라, 그때 벌써 그런 이야기가 오갔었군요. 그럼 샬롯의 연애 코치는 무려 영국 여왕님이셨던 거네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샬롯은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홀짝이고는 뜻밖에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웬 한숨을···걱정되는 문제라도 있어요?”
“걱정이라기보다 여왕님 말하니까 떠올라서요. 많이 외로워 보이셨거든요. 생각해보면 가여우세요.”
“···하긴 왕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죠. 성격이 책무를 내팽개치고 방탕하게 살 분도 아니실 테니까.”
“어머, 여왕님을 직접 뵙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태선이 그저 웃자 샬롯은 안 그래도 이 주제로 언제고 대화하고 싶었는지 말을 쏟아냈다.
“비공식적인 일이지만 저와 여왕님이 친구가 됐거든요. 꼭 다시 여왕님을 직접 뵙고 위로드리고 싶어요.”
“어려울 거 있나요. 그럼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잡고 영국도 들렀다 가죠.”
쉽게 나온 태선의 말에 샬롯은 의외였는지 쳐다봤다.
“일정 괜찮아요? 자동차 사업이야 궤도에 올랐다지만 한창 바쁘신 시기일 텐데.”
“어차피 제 스케줄은 샬롯이 짜주는 건데요. 샬롯이야말로 괜찮아요?”
“그럼 어차피 사업 관련으로 유럽 내륙에 가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으니······.”
부스럭────!
놀랍게도 잠옷 드레스 차림이었거늘 어디서 저걸 꺼냈는지 수첩을 꺼내든 샬롯이었다.
“가는 김에 영국을 경유해서 가는 걸로 짜볼까요?”
‘신혼여행인데··· 사업적으로 가는 걸 겸해서 짠다고?’
자신이야 편해서 좋지만 참 샬롯도 과연 어지간히 일 중독자구나 싶었다.
다만 이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어지는 말은 의외였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태선의 조국··· 조선이라고 했죠. 꼭 가보도록 해요.”
조선에 가보자고 할 줄이야.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태평양을 건너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웨스팅하우스가 증기 터빈을 발명하고 그와 연동하여 선박 퀄리티를 타이타닉급으로 올려놓더라도 그렇다.
애초에 바닷길로 태평양을 건너는 일은 21세기에도 그 피로감이 만만찮은 일이었다.
“아니요, 꼭 가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태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샬롯의 눈동자에 비친 의지는 강고했다.
“뭐 그렇다고 당장 가자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최소한 1년 뒤에···몇 년 뒤쯤이 되면 더 좋겠고요.”
“방금 전만 해도 당장 갈 것처럼 말하더니 몇 년 뒤라.”
태선이 짐짓 농담 삼아서 서운하다는 듯 중얼거리자···여느 때와 같았으면 샬롯이 그걸 맞받아쳤을 터이거늘.
“네, 몇 년 뒤에요. 역시 그 정도 시간을 둔 편이 좋겠어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왠지 포근한 눈빛을 하고서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야 아버지의 나라에 들렀다는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수 있잖아요.”
“하하, 벌써 아버지라니.”
태선은 말하는 순간 샬롯의 시선이 그녀 자신의 아랫배를 향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고 보면 이 시대에 콘돔이나 다른 피임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샬롯 혹시?”
그녀의 두 손이 살포시 아직 잘록한 아랫배 위로 올려졌다.
“네, 제 생각에는 그런 거 같아요. 주기가 이미 훨씬 지났는데도 얼마 전부터 생리를 안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조심스레 이쪽의 눈치를 보는데 태선은 여유를 가장하기 위해 늘 얼굴에 달고 살던 옅은 미소가 아닌···환한 미소를 지어 답했다.
아니, 그건 답례 같은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 저절로 나온 미소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결혼식 당일에 이런 소중한 선물을 받다니! 미국에 와서···아니, 태어난 이후로 들은 가장 기쁜 소식이네요.”
“정말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하죠! 저와 샬롯이 사랑하는 결실···새 생명이 뱃속에서 움트고 있다니.”
태손은 테이블 옆을 돌아가 샬롯의 아랫배에 시선을 맞추고 한쪽 무릎 꿇었다.
“만져봐도 괜찮아요?”
“에이, 아직 그런 정도는 아니라고요. 저도 그냥 생리 주기로 추측한 거지.”
“그래도요. 궁금하잖아요.”
샬롯이 직접 태선의 손을 끌어다 아랫배에 대었다.
당연히 방금 전 샬롯의 말마따나 반응이 느껴지거나 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이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다면 전해지고 있으려나.
‘이 뱃속에 있는 작은 것이 점점 더 자라 눈코입이 생기고 팔다리가 생기고 결국 세상에 나오게 될 날이···정말 오는 건가.’
전생에도 결혼은 했지만 아내와의 관계는 파탄이 났었기에 자식은 없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네.’
그렇기에 태선은 다짐했다.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고.’
태선은 그대로 일어서며 샬롯을 공주님 안듯 번쩍 안아들면서 말했다.
“약속할게요. 꼭 가봐요, 조선으로. 아니, 아들이든 딸이든 태어나면 제가 샬롯이랑 같이 조선으로 꼭 데리고 갈게요.”
***
결혼식을 한 뒤 당초 태선이 언급했듯 비서실은 전략실로 승격되었다.
이제 전략실의 수장이 된 샬롯은 더 바빠졌다.
그럼에도 어지간한 일은 맡길 정도로 안나 암스트롱이 일에 능숙해졌고 아크볼드도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이 맨션은 어떠신지요? 맨해튼에 위치해서 위치는 요구하신 조건에 딱 맞습니다.”
“위치가 좋긴 한데···다른 곳도 좀 더 둘러보고 싶네요.”
틈틈이 시간을 내서 샬롯이 집을 보러 다닐 수 있는 건 그래서였다.
이제 태선과 가정을 꾸릴 곳이며 아이가 태어난다면 함께 생활할 안식처.
거기에 사무실과 가까우면서 시설 좋은 맨션을 찾고 있었다.
‘몇 군데 정도는 좋은 것 같은데 역시 최종 결정은 태선과 같이 해봐야겠어.’
“일단 준비한 곳은 다 보여드렸는데 마음에 드시는 곳은 없으신지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몇 군데 더 둘러보고 나서 샬롯이 말하자 중개업자는 이 큰 건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는지 안경을 슥 올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조건에 맞는 더 좋은 매물을 알아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꼭 다시 찾아주십쇼, 헤헤.”
“물론이죠. 수수료는 후하게 드릴 테니 잘 알아봐주세요.”
부릉───!
중개업자와 헤어진 뒤 직접 자동차를 몰아서 샬롯은 힐츠 호텔로 갔다.
“오, 샬롯···아니, 이제 킴 부인이시죠.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안녕하세요, 벤 씨.”
결혼하고 나서 이제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다.
‘후훗, 킴 부인이라니. 들을 때마다 기분이 뭐랄지 새롭네.’
약간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드디어 그 사람과 정말로 한 가족이 되었다는 걸 인정받는 기분이라 기분 좋기도 했다.
“집 보러 다닌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뵈는 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려나요.”
잠시 킴 부인이라는 호칭을 음미하는 사이, 호텔 직원이 서운해하며 말을 건네자 샬롯은 웃으며 답했다.
“아뇨, 힐츠 호텔의 저희 방은 계속 유지할 거예요.”
“저, 정말이십니까?! 그러면 고맙지요.”
“태선의 고향에서 여기로 편지를 받은 것도 꽤 되고 연락 업무로는 유지하는 편이 좋다고 하셔서요.”
“그렇군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1년 요금을 미리 낼게요. 그럼 저녁에 봬요.”
힐츠 호텔에서 볼 일마저 마치고서야 샬롯은 킴 스탠다드 오일 사무실로 돌아갔다.
“어머, 그렇지. 벌써 주요 고객들 명단과 거래 품목에 특이사항까지 외우다니 아치볼드 너 정말로 똑똑하구나!”
“샬롯 실장님과 안나 누나가 저를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죠···어라, 샬롯 실장님 오셨어요!”
마침 사무실에서는 안나가 아치볼드에게 일을 가르쳐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샬롯, 언니 이것 좀 봐요. 아치볼드 이 녀석 글쎄······.”
“실장님이라고 하라고 했지. 안나, 너는 다 좋은데 호칭은 제발 좀 주의하도록 해.”
“아, 예전부터 언니라고 부르다보니 너무 입에 붙었네요. 주의할게요.”
“그래, 제발 좀 주의해줘.”
샬롯이 안쪽 자기 자리에 앉자 안나는 핀잔을 받았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슬그머니 도 다가가서 물었다.
“집 보러 가신다더니 괜찮은 데는 있었어요? 신혼집이라니 부러워요.”
“그럼 너도 얼른 좋은 남자 잡아서 결혼하렴. 세상이 아예 달리 보일걸. 그건 그렇고 슬슬 시간 다 됐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곤 중얼거리는 말에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치볼드가 슬며시 옆에 끼어서 말했다.
“오늘 오시기로 한 손님 말씀하시는 거 아녜요? 영국에서 오셨다던.”
“아, 맞다. 배비지 씨!”
그 반응에 샬롯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나, 너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아치볼드가 들어오면서 좀 허술해졌어.”
“아니에요, 저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거 말고 혹시 또 다른 스케줄이 있었나 싶어서 잠깐 생각해본 거였어요.”
샬롯이 팔짱을 끼고는 빤히 쳐다보자 안나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정말이에요. 1시간쯤 전에 사장님께 배비지 씨가 오기 전에 자료도 드렸다고요. 제가 잊어먹었으면 자료는 어떻게 드렸겠어요. 그렇지, 아치볼드? 응?”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샬롯이 아치볼드를 봤다.
“저 말이 다 사실이니?”
“네, 정확히는 1시간 3분 전 그러셨어요.”
“그···그렇게까지 내 행동을 자세히 보고 있었어?”
분 단위로 보고하는 반응에 안나가 자못 무섭다는 듯 당황하는 반면 샬롯은 그제야 알겠다며 고개 끄덕였다.
“역시 아치볼드는 작은 부분에서도 철저하구나. 사장님은 어떻게 멀리서도 네 그런 자질을 알아보고 직접 데리러 가셨는지 신기해.”
“저도 정말 신기해요. 남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었는데.”
삐거억─────!
그렇게 잠시 대화하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버렸는데 킴 사장님과 만나기로 해서.”
“헨리 프레보스트 배비지 씨?”
샬롯이 일어나며 묻자 방금 들어온 수염은 덥수룩한데 눈빛만은 똘망똘망한 젊은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예, 맞습니다.”
“반가워요, 저는 태선 사장님의 비서이자 전략실 실장인 샬롯이에요.”
“뵌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 결혼식에서···맞으시지요?”
결혼식 말만 나와도 샬롯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날 킴 사장님께서도 멋지셨지만 부인도 무척 아름다우셨습니다. 새삼스럽지만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정말 고마워요. 안나, 지금 괜찮은지 사장님께 물어줄래?”
안나가 사장질로 간 사이 샬롯은 프레보스트 배비지를 상대하며 그에 대해 아는 정보를 되새겨봤다.
태선이 전한 바에 따르면 배비지를 연구소로 영입하여 자동차와 또 다른 전례 없는 사업 분야를 개척할 거라 했다.
‘영국에서 나를 윈저성으로 보낸 것도 이 사람의 아버지인 찰스 배비지 씨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했으니.’
즉 무려 영국 여왕을 직접 알현하는 것을 미루고 먼저 만나기를 택했던 사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사업 아이템을 계승한 남자야말로 눈앞에 있는 젊은이인 것이었다.
‘분석 엔진과 해석 기관···수학적으로 계산하는 장치라던데 어떻게 그게 자동차나 석유산업 못지않은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태선이 확언했으니 샬롯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언니···아니, 실장님. 지금 사장님께서 배비지 씨를 바로 모셔오래요.”
“알겠어. 배비지 씨, 차는 무엇으로 드세요?”
“저는 커피면 됩니다.”
커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치볼드는 재빨리 커피를 타기 시작했고 샬롯은 배비지를 직접 사장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