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22
122 철의 계산수(1)
“한 가지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헨리 프레보스트 배비지는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인 줄 알면서도,
어쩌면 태선의 기분이 상해 투자를 철회할지 모른다고 염려하면서도,
“왜···투자해주시는 거죠?”
태선의 앞에 앉자마자 이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아버지가 하는 과업이고 자신이 그 일을 계승했다지만.
‘왕립 협회에서도 투자를 철회했거늘 하물며 미국 사업가가 어째서···혹여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것인가.’
잊지 않고 연락해줘서 고마우면서도, 못내 마음 한편으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에 배비지 씨, 그러니까 찰스 배비지 씨가 한 질문과 같은 것을 물으시는군요. 그때 이미 대답드렸고 찰스 배비지 씨도 납득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뒤늦게 그 자리에 합류했고···죄송한 말씀이나 당시에는 킴 사장님께서 진심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배비지는 답하며 태선의 눈치를 살폈다.
“······.”
태선이 말없이 커피를 음미하고만 있자 그는 더욱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당시에 제가 킴 사장님의 진심을 의심한 일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 불찰로 투자를 철회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고작 그런 일로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의심이었겠죠.”
태선은 잔을 든 채 일어섰다.
“찰스 배비지 씨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해석 기관의 가능성을 대부분 몰라봤습니다. 심지어 왕립 협회조차.”
“···그런 일이 있었지요.”
드르륵───!
태선은 한쪽에 놓인 금고로 가더니 다이얼을 돌렸다.
“그렇지만 찰스 배비지 씨는 물론이고 아버지의 뜻을 계승한 당신이라면 해석 기관의 가치를 아시지 않습니까?”
“그야 당연히···라 말하고 싶지만 이제는···잘 모르겠습니다.”
프레보스트가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는 듯 자신감이 없고 찻잔에 파고 들어갈 듯이 고개 숙인 태도도 그러했다.
“아니, 아시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렸을 따름이나 그건 누구나 그런 때가 있는 법이죠.”
그런 그와 대화를 이어가며 태선은 금고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부디 이것이 아까 전 하신 질문···그리고 프레보스트 씨의 신념을 다시 일으켜줄 답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흥미롭군요. 혹시 조셉 마리 자카드의 직기 카드 아닌지요?”
그러자 서류 뭉치의 첫 페이지에 메모된 도안을 보자마자 프레보스트가 반응했다.
“천공한 카드에 따라 기계식 직기가 작물의 문양 패턴을 다르게 짜는 기계···어째서인지 늘 그 카드를 서재에 가득한 책들 사이에 두고는 하셨죠.”
“예, 저와 대화할 때도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해석기관의 발전에 뭔가 힌트를 줄 것도 같은데 영 아리송하다면서요.”
그 말에 프레보스트는 그저 씁쓸히 웃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몇 번이나 물어봤다.
마치 벌레 파먹은 것 같은 카드를 서재에 두시는데 물어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랬더니 직물 짤 때 쓰는 물건이라는데 그러니 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제부터 직물 장사를 하시려 그러나 싶었는데···웬걸 해석기관에 힌트가 될 거란다.
‘다만 그 해답은 몇 년이 지나도록 구하지 못 하셨지.’
그렇기에 투자도 막히고 기술로도 한계에 봉착해서 힘들어서 그러신다고 봤다.
그렇게 서서히 가라앉아가고 있을 때 마침 영국을 방문한 태선을 만난 것이었는데.
“찰스 배비지 씨가 생각하던 그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찾았습니다.”
“······예?”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두 번째로 그를 만난 이 자리에서 뜻밖의 답을 들었다.
“정식 명칭으로는 천공 카드라고 부릅니다.”
“천공 카드···예, 그랬죠. 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이 카드가 해석기관에 도움이 될 방법을 찾으셨다고요?”
“엄밀히 말하면 당장 도움이 된다기보다 해석기관이 완성된 다음···한층 더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킬 방법이 될 겁니다.”
아버지 찰스 배비지는 해석 기관을 이론적으로는 완성시킨 터였다.
다만 재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러 한계 탓에 완성하진 못했다.
물론 그 대부분 문제는 돈이 있으면 해결되기야 하겠지만···어쨌든 아직은 만들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 다음 것을 벌써 논하고 있다고?’
“찰스 씨를 만나고 미국에 돌아온 후로 사업을 하면서도 저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했고 얻은 해답입니다. 궁금하시면 계속 보시겠습니까.”
그러하거늘 태선은 한 술 더 떠서 다음 장을 보란다.
말인즉···자신이나 아버지가 해석기관에 미래를 걸고 신념을 가졌듯.
‘이건 태선의 신념이란 걸까.’
사라락───!
모두가 돈을 그저 버리는 일이라 생각한 일이다.
심지어 자신의 신념도 슬슬 흔들리고 있었다.
그저 아버지를 위해, 여태 해왔던 관성 탓에 겨우 유지하고 있었을 따름.
그러하거늘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1년이 지닌 후에도 다시 연락을 줬는지.
“해석기관은 계산기이지요. 계산이란 기본적으로 정보를 입력하고 그걸 계산하고 출력하고···배비지 씨의 장치가 특별한 건 산출하는 기관이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라라락───!
태선의 말을 들으며 프레보스트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자신이 어느 페이지를 보면 거기 무슨 내용이 있는지 훤히 꿰고 있는지.
“천공 카드는 일종의 입력 장치이며 저장 장치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다만 계산 자체는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만···거기에 전기적 신호를 이용해본다면 어떨까요?”
그 페이지에 맞춰 설명을 덧붙였다.
“네, 거기. 그 전구처럼 생긴 것은 진공관이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만.”
“진공관···이요?”
페이지를 넘기던 손과 그걸 보던 눈이 잠시 멈추었다.
‘진공관이라.’
전구는 프레보스트 배비지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런던에 사는 이상 모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태선이 영국을 다녀간 이후 스완 제네럴 일렉트릭의 영국 회사가 전구와 전기를 전격적으로 보급하여 이제 관공서나 거리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다만 방금 태선이 말한 진공관이란 건 전구와 미묘하게 달라보이지만.
‘유리관 속에 필라멘트 같은 것이 몇 겹으로 들어가있는 걸 보면 비슷한데···이게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힌트는 2진법입니다.”
그런 의구심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을 때 태선은 한 마디를 불쑥 내뱉더니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라는 듯 잠시 동안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2진법이라 함은 0과 1로만 표현되는 건데···그나마 10진법 다음으로···아?! 잠시만요, 전구 불빛이 들어오고 꺼진 상태가 보기에 따라서는 2진법으로···?”
순간 무언가가 뇌리를 팟 스쳐지나가는 느낌에 프레보스트 배비지는 소름이 일었다.
다만 아직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감을 잡지는 못했으나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느낌.
마치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 벽만 넘으면 전혀 새로운 세상에 닿을 것만 같은···그런 벽에 맞닿은 느낌.
‘혹시 아버지도 이 벽을 마주하셨던 것인가.’
다만 찰스 배비지와 달리 프레보스트 배비지는 벽에 막혀 정체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아주 작은 크기로 진공관을 만들어서 병렬로 배열하면 전기적인 신호로 큰 단위의 숫자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그 미증유의 세계를 미리 체험하기라도 한 듯 알려주는 이가 있었기에.
“그렇게 되면 물리적인 단계에서 나아가 계산기의 영역이 전기적인 걸 도구로 하는 단계로 진화하는 겁니다. 계산 결과를 출력하는 방법의 폭도 넓어지게 되겠죠.”
“출력의 폭이 넓어진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는 아예 프레보스트 배비지의 태도는 투자자와 연구자라기보다는···마치 해답을 구하는 수행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명확하게 답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예를 들자면···그래, 전신은 어떻겠습니까?”
전화···라니 또 생뚱맞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태선이 하는 말은 마치 여기저기에 상관없을 듯한 것들을 끌어오면서 결국 하나로 연결되면서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결과를 빚어내고 있었다.
“소리, 색깔, 명암···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걸 데이터로 보면 전신의 진동 신호도 전기적인 신호를 변환하여 멀리 송신하는 정보가 아니겠습니까.”
“전기적인 신호로 출력값을 달리 한다···킴 사장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습니다.”
대화하면서 프레보스트 배비지는 페이지 넘기며 내용 하나하나를 눈에 새겨넣는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저도 아직 딱 뭐라고 집어내서 말은 못 하겠지만···기계적인 신호가 전기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뭔가···뭔가 다릅니다.”
“예, 그리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시대의 역사가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인 겁니다.”
“새로운 시대의 역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지 프레보스트 배비지의 서류를 쥔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우려스러운 건 결국 전기적인 신호로 변환하는 물리적인 매개체가 진공관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게 기술적으로 되느냐는 질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지요. 스완 제네럴 일렉트로닉이 뭘 만드는 회사인지 잊지 않으셨겠죠.”
“아···그랬군요. 하하하하!”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느라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린 자신이 우스웠는지 프레보스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이거 전기 회사이자 세계 최고 전구를 만드는 회사 대표님을 앞에 두고 제가 그런 우려를 하다니.”
다만 웃음 끝에는 태선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가져가서 보고 천천히 돌려주셔도 됩니다.”
그때 태선이 말했다.
“···어, 어떻게?”
그리고 프레보스트 배비지는 흠칫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확히 자기 마음을 꿰뚫었기에.
지금 태선에게 들은 설명은 끽해야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자신도 개념적인 것만 겨우 이해했을 따름.
‘하물며 애초에 진공관이니 전기적인 신호이니 하는 걸 적용하기에도···그 물리적인 모체가 될 해석기관조차 이론적으로는 완성됐지만 물리적으로는 아직 완성해보지를 못했으니.’
그럼에도 이 보고서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었다.
애초에 이걸 먼저 보고 진공관이니 전기적 신호이니 하는 내용을 먼저 이해하면 그에 맞춰 해석 기관을 개량해 완성할 수 있을 듯했다.
만약 더 발전할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
“솔직히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걸 그냥 제게 보여주고 설명해주신 것만 해도···사업가가 할 행동은 아닌 듯합니다.”
이번에도 예의에 어긋남을 알지만, 이제는 태선이 단순한 사업가가 아님을 알았기에 프레보스트 배비지는 물었다.
“어째서 제게 이걸 그냥 보여주신 겁니까? 더구나 가져가서 보라니?”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보통은 절대로 유출시키지 않고 단독으로 개발하려고 하겠죠.”
태선은 직접 봉투에 서류를 챙겨넣었다.
“아까 전신을 예로 들었지만 세상의 많은 자극···그것을 입력하고 계산하고 출력하는 장치로 거듭날 수 있다면 누가 되었든 최대한 빨리 그 기술을 개발시킨다면 인류 전체가 더욱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즉 인류를 위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하, 저는 그렇게까지 박애주의자는 아닙니다. 그게 제 사업에도 이득이 되기 때문이죠.”
프레보스트 배비지는 태선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태선이 쑥스러워서 둘러댄다 여겼다.
“그렇다면 사업적이지 못한 사업가를 위해서 저라도 힘써드려야겠군요.”
태선이 건네는 서류 봉투를 받으면서 자못 존경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면.
“어떤 조건을 거셔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 저희 쪽 멘로파크 연구소에 들어와주셨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영국을 떠나서야 하는데.”
“이미 영국을 떠나올 때 아버지와 그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아버지가 권유하고 제가 확신이 없었는데···결심이 섰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프레보스트 배비지의 눈빛은 들어올 때와 확연히 달랐다.
해석기관의 가능성과 그걸 지원해주는 태선이라는 든든한 투자자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겠지만.
“그럼 바로 연구소 계약을 준비시켜두도록 하겠습니다만···그 전에 한 가지 오해를 하신 것 같아 정정하겠습니다.”
“예? 무슨 오해를···?”
혹시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었는지 프레보스트 배비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는 사업가라고 했지요. 무작정 손해를 감수하기보다 달리 방법이 있으면 투자도 하면서 이득도 챙기는 편이거든요.”
해석 기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다?
투자하면서 이득도 챙긴다?
‘무슨 소리를···?’
뒤늦게 뇌가 말의 뜻을 받아들이자 자칫 프레보스트는 실소를 할 뻔했다.
아직 미완성인 이 기술로 돈을 볼 방법이 있다니.
“방금 그런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셨죠?”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하하.”
어색하게 웃는 프레보스트 배비지를 보며 태선은 이미 그 속내를 다 짐작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있습니다. 다만 먼저 프레보스트 씨가 해석기관으로 그것의 계산이 가능한지 견적을 내봐주셔야 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