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31
131 유다(2)
“대출금···급한 불은 일단 끄더라도 모건에게 생돈을 넘겨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여태 그래왔고요. 걱정마시죠.”
조금 과장을 보태면 이제 모건이 뭔 짓을 한들 아프지도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될 일.
어쨌든 태선은 화제를 돌려 윌리엄 크램프에게 말했다.
“WCSS에서 보면 예전과 차이점이라면 단지 최대 주주로 대표에 제가 끼어들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그게 불만이라서 크램프 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는 너무 서운한데요.”
“아뇨, 킴 사장님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킴 사장님 같은 분이 뒤에 있어주시면 든든하겠지만···그래도 방금 하신 말씀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꼭 그렇게 만들 겁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보안 탓에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윌리엄 크램프에게 막연하게나마 안도감만 주어도 된다.
대신 그가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더 큰 떡밥을 던져야 한다.
‘그럼 이제 윌리엄 크램프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가져온 가장 큰 떡밥을 풀어볼까.’
태선이 손을 옆으로 슥 들어올리자 여태 시립하여 서 있던 아치볼드가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급히 서류를 꺼내서 내밀었다.
촤르르륵───!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아시아 출신입니다. 태평양 건너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왔죠.”
짐짓 자신의 출신을 밝히며 태선은 서류를 펼쳤다.
사실 서류라기보다 증기터빈 도면이었다.
비록 자세한 건 아니지만 이 분야에 소양이 있다면 엘리어드 공장장이 그러했듯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을 터.
“기선으로도 태평양을 건너 오갈 수는 있지만 아주 힘이 듭니다. 저는 보다 편하고 쉽고 빠르게 바다를 오갈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다만 이 증기 터빈으로는······.”
“엘리어드 공장장님도 같은 의견을 내셨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크램프 씨가 틀렸다고 감히 말씀드리죠.”
틀렸다···는 말에 윌리엄 크램프의 미간이 움질했다.
‘다 내려놓은 것처럼 굴더니 자존심 아직 안 내려놓으셨네.’
전문 분야를 건드리자마자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뭐 잘 됐지.’
생각보다 더 마음속 불씨가 뜨겁다는 증거일 테니까.
“이미 연구소에서 개발을 마쳤습니다. 남은 건 실전에서 적용하는 것인데 기존 선박으로는 속도가······.”
“최고 속도는 14노트까지 가능하겠지만 대개는 12, 3노트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윌리엄 크램프가 바로 답을 내놓았다.
“예, 그렇죠. 하지만 이 증기 터빈을 장착하면 20노트 이상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아울러 출력에 따라 배수량도 달라질 것이고 그에 따라 설계도 달라지며 크기나 수행 가능한 임무도 달라지겠죠.”
“20노트 이상이라고요?!”
‘물론 최고 속도 냈을 때의 이야기지만 거짓말은 아니니까.’
지금은 윌리엄 크램프가 혹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거기에 배수량과 적재량이 늘면 전함과 상선뿐 아니라 크루즈선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일이 되리라 봅니다. 마치 바다 위를 다니는 호텔처럼요.”
“바다 위의 호텔 같은 크루즈선이라.”
윌리엄 크램프는 잠시 그 말을 되뇌이더니 옅게 웃었다.
“제가 어렸을 때에 하곤 했던 상상이군요.”
“그럼 그 꿈을 이룰 기회가 바로 앞에 있는 셈이로군요.”
태선은 아까 펼쳐놓은 증기 터빈의 도면을 손바닥으로 탁 짚었다가 앞으로 밀었다.
“다시 가져가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중요한 정보는 이렇게 막 들고 다니지 않죠. 하물며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몇 년 동안 연구했는데 그 결과가 종이 몇 장에 들어가지도 않고요.”
태선은 일어나더니 외투를 걸치고는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적어도 크램프 씨 정도 되시는 분이 보면 이 기술의 가능성은 알아보시기에 충분할 겁니다. 보시고 마음이 동하면 가능한 빨리 돌아오십쇼.”
“······.”
윌리엄 크램프는 자기 앞에 놓인 도면을 보며 답이 없었다.
‘이 정도 떡밥을 던졌으면 돌아오리라 보지만.’
만의 하나가 있는 법이니 그때를 위해 태선은 보험을 들어두기로 했다.
보험이란 다름 아닌 윌리엄 크램프의 뒤에 서있는 그의 아들 찰스 헨리 크램프.
“찰스 크램프 씨.”
“···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자신을 부를 줄 몰랐는지 흠칫 놀라며 쳐다봤다.
떡밥은 윌리엄 크램프에게 던져뒀지만 뒤에서 찰스 헨리 크램프도 들었을 터.
더구나 그의 마음에도 큰 파문을 일게 했는지 태선을 보는 찰스 헨리 크램프의 눈빛은 생동감으로 가득했다.
“아버지를 꼭 모시고 오세요. 언젠가 돌아올 아버지를 위해서 먼저 와서 길을 닦아두는 것도 괜찮고요.”
“하하, 넵! 꼭 아버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20노트 배···거기에 대형 크루즈선이라니 저도 꼭 만들어보고 싶거든요.”
‘그래, 이게 보험이지.’
태선이 나가자 심지어 찰스 헨리 크램프는 차에 탈 때까지 마중을 나왔다.
“······.”
물론 차를 타고 출발할 때 보니 윌리엄 크램프도 문간에 서서 지켜보며 서있었지만.
***
회사로 돌아왔을 때 모두가 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 암스트롱, 잭 바이든, 개리슨 등등.
여느 때 같았으면 윌리엄 크램프를 만나러 간 일은 잘됐느냐며 물었겠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장님, 큰일 났어요!”
그중 샬롯 대신 전략실 겸 비서실의 총책임자인 안나가 대표로 말했다.
“지금 SGE랑 SGM 주가가 심하게 폭락했대요.”
그러면서 주식거래소에서 가져온 숫자 빼곡한 주가 관련 자료를 내밀었다.
‘나갔다 온 사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네.’
기실 주가가 빠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WCSS를 인수하려고 스완 제너럴 일렉트로닉스와 모터스를 증자하여 자금을 확보하려고 동향을 비출 때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다.
그리고 WCSS 인수 건에 모건의 협잡질이 개입된 정황으로 보건대 이 같은 상황의 이유는 자명했다.
‘여태 모건이 나한테 당한 게 얼만데 혼자 움직일 리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주식거래소의 인사를 끌어들였나.’
주가 폭락을 두고 바로 배후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일 수도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여느 회사의 경우.
태선의 SGE나 SGM에는 규모로나 최근 회사의 성장 추세로 보나 해당 사항이 없고 그건 정부로부터 재건 사업의 백업을 받기에 더욱 그러했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건데···. 일단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준비해야겠어.’
최소한 그 정도만 되어도 주가 폭락으로 인해 회사에 미칠 타격을 예방할 수 있다.
“잭, 내가 말해놨던 자료는 전부다 찾았어요?”
“WCSS를 인수할 무렵부터 SGE와 SGM의 증자한 주식 숫자와 주가··· 그리고 그 총량에 대한 자료 말이지?”
“예, 그걸 몇 달 동안 시간 추이에 따라 상계하면 지금 주식 상황이 맞는 건지 아닌지 확실해지겠죠.”
“그래서 그랬구만. 근데··· 문제가 하나 있는데.”
“혹시 자료를 못 구했어요?”
잭은 자신이 그 정도로 태만하게 굴지 않았다며 어필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건 물론 이미 다 구해놨지. 내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문제는 너무 잘 구해놔서 그렇지.”
“계산할 양이 많아요?”
태선이 던진 두 번째 추측은 맞았는지 잭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아. 계산에 오류가 있으면 안되니 거듭 확인도 해야할 텐데, 계산을 다 했을 쯤에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것도 문제야.”
“아마 주식거래소에 입김을 미칠 수 있는 배후 세력이 개입했다면 100퍼센트 바뀌겠죠. 일부러 상황을 어질러서 진상을 가리도록.”
개리슨도 곧이어 한 목소리 거들었다.
“마치 짜고 친 것처럼··· 아니, 거의 확실하겠지. 기다렸다는 것처럼 주식 시장에서는 우리 회사들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어.”
“그건 저도 들었어요. SGE나 SGM뿐 아니라 KSO까지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아니, KSO는 상장도 안 했잖아요. 그건 또 왜···?”
아치볼드가 어이 없다는 듯 묻자 태선이 답해주었다.
“SGE와 SGM의 배후에는 사실상 킴 스탠다드 오일이 든든하게 자금줄로 버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 세 개가 한꺼번에 흔들리지 않으면 다른 하나가 나머지를 지탱해주면 버티거든.”
“그럼··· 정말로 우리 회사를 저격했다는?”
“아치볼드, 넌 평소에 머리도 좋던 녀석이 눈치가 느려. 그건 기정 사실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주가로 사기를 친다고요?”
머리가 좋아도 역시 아직 몇 개월밖에 안 돼서 그런지 아치볼드는 가끔씩 말랑한 구석을 보이곤 했다.
“와, 넌··· 모건이나 다른 도둑 남작 같은 놈들이 여태 부렸던 협잡질을 알면 기절하겠다.”
“어우··· 대출금 폭리야 원래 모건 씨가 금융계에서 악명이 높으니 그렇다 치지만 이렇게까지 우릴 잡으려고 혈안이 됐다니 무섭네요.”
“그래서 도망치게?”
태선이 짐짓 떠보듯 말하자 아치볼드는 언제 나약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리가요! 오면서 태선 사장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시비 터는 놈들에게는 제대로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그래야 얕보지 않는다고요.”
“그랬었지. 다만 또 하나 기억해둬야 할 건 본때를 보이되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식이어서는 곤란하거든. 철저하게 반격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
태선은 짐짓 시선을 잭에게 옮겼다.
“이번 건의 경우 그 준비의 디딤돌이 바로 잭이야. 잭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현재 주식 상황을 명확히 계산한 자료를 구비하는 것이지.”
“알겠네. 그럼 최대한 빨리 계산해서······.”
“하하, 잭. 빨리 계산하라고 압박하려고 꺼내는 말이 아니니 오해 말아요.”
“···그게 아녔어?”
태선은 당연하다는 듯 잭의 옆으로 가 어깨동무하듯 팔을 걸치며 친근하게 말했다.
“예, 어떤 수를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계산하는지만 구상해두세요. 계산 작업 자체는 그게 있으니까요.”
“그거라면···아, 설마 그거?!”
태선이 ‘그거’라고 언급하는 말에 잭은 잠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는지 탄성을 토했다.
“컴퓨터 말하는 거지. 그게 완성됐던 거야?”
“완성 자체는 좀 됐죠. 이제 마지막 테스트 작업이 얼마 전 끝났다고 들었고요.”
“그러면 진작 알려주지. 자료 모으면서 언제 다 계산할지 걱정했다고.”
“프레보스트 씨에게 직접 물어봤어도 좋았잖아요.”
친한 사이라서 농담조로 말했지만 사실 태선은 잭이 기존에 맡은 재무 업무 탓에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재무 분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계산이니만큼 해석기관··· 즉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도.’
그리고 아마 어쩌면 앞으로 실전적으로 가장 맡이 쓰게 될 사람은 잭인지도 몰랐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가보죠. 컴퓨터···그러니까 해석 기관을 옮길 수는 없으니.”
태선이 말끝을 흐리자 눈치 빠르게도 아치볼드가 물었다.
“잭 아저씨 사무실에 있는 자료들은 멘로파크 연구소에 옮겨두게 할까요?”
“그래, 다만 중요한 자료들이니까 막 옮기지 말고 잭에게 순서라거나 그런 부분에서 잘 정리해서 옮기도록 해.”
이어서 태선은 아치볼드의 상급자인 안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덧붙였다.
“그리고 보안을 위해서라도 아멕스 경비대의 에릭에게 미리 이야기해서 꼭 호위 인원을 대동해서 옮기도록 하고.”
“넵! 급한 건이니 바로 에릭 대장에게 연락해서 호위대를 수배해두고 잭 전무님에게는······.”
말 나온 김에 안나는 바로 잭에게 서류 이동 건에 대해 물어보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해석 기관··· 그러니까 컴퓨터라는 거 사용법이 따로 있었지. 조작법을 배워야 할 텐데 먼저 연구소에 가서 배비지 씨에게 배워둘까?”
하지만 잭은 직접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차올라서 정신이 없었다.
“하하, 물론 그래야겠지만 그 전에 안나와 아치볼드에게 사무실에 있는 자료 옮길 때 주의할 점을 알려줘야죠.”
“에이, 그건 따로 설명할 건 없어. 너무 엄두가 안 나서··· 박스에 넣어둔 채 아직 꺼내지 않은 참이거든. 일부러 박스 안에서 꺼내서 섞지만 않으면 돼.”
그러고는 얼른 연구소로 가보자는 쳐다봤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잭 못지않게···아니, 태선도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선은 이미 전생에서 컴퓨터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발전하는지 알고 있었다.
‘21세기의 컴퓨터에는 절대 비비지 못하겠지만···적어도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레벨의 컴퓨터야.’
바로 그것을 실전에 써보는 사건 아니겠는가.
“그럼 마침 밖에 차를 대두었으니 그거 타고 바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