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56
156 여왕과 머저리(2)
“알아봤더니 킴 스탠다드 오일이란 데도 기껏해야 기름이나 파서 파는 회사던데. 심지어 사장은 아시아인이라지.”
그와 함께 옆에 있던 놈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사장님. 이래서 미국 놈들은 안 된다니까요.”
“저놈들 탓에 여왕 폐하께서도 관심을 가지신 케이블 사업이 네 번이나 실패해서 통탄스러울 정도입니다.”
“동감일세. 처음에는 여왕 폐하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업인 거 같아 좋은 마음으로 동참했거늘, 쯧!”
거기에 이제는 아예 미국을 도매급으로 잡아서 비하한다.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을 교묘하게 끌어들여서 자칫 잘못 반박하면 여왕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발언이라 몰아갈 수 있는 선을 타고 있다.
때문에 영국인인 윌리엄 톰슨 뿐만 아니라, 미국인인 새뮤얼 모스가 가만히 있는 이유였다.
“······.”
착잡해하면서 초탈한 심경도 엿보이는 걸 보면 지금 같은 수모를 전에도 몇 번이나 겪은 듯싶었다.
새뮤얼 모스도 당해내지 못했는데 에디슨이 어쩌겠는가.
“알겠습니다. 여러분의 뜻은 알겠지만 그래도 저희 소재와 기술을 봐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부탁드리······.”
그나마 전략을 바꿔 사정도 해보지만 통하지 않았다.
“엔지니어라는 자가 그렇게 줏대가 없어서야.”
“사장님, 미국 놈이잖습니까. 명예란 게 뭔지 저놈들이 알겠습니다.”
“한심하군. 그렇게 사정할 일이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해야지.”
에디슨을 비웃고 더 낮잡아 보는 빌미를 제공했을 따름. 그들에게 안 보이도록 한 손을 숨기고 있지만 뒤에 서 있는 샬롯에게는 보였다.
에디슨의 꽉 쥔 주먹에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고 있음을.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얼굴과 목소리로는 그런 기색을 내지 않고 연이어 부탁하는 것을.
“에디슨, 그만 됐어.”
샬롯이 나선 건 그때였다.
“그치만······.”
“됐어, 그만 물러나도 돼. 그 이상 할 것 없어.”
에디슨이 머뭇거리자 샬롯은 성큼성큼 걸어서 제롬 브래들리의 앞으로 나섰다.
“허허, 이 숙녀분은 또 뉘신가? 코흘리개 어린애에 이어서 설마 이 숙녀분도 그 석유회사에서 보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KSO의 전략실 실장이자 스완 제너럴 일렉트로닉스 영국 법인의 이사를 맡게 된 샬롯 푸어 킴이라고 해요.”
“말세로군. 아무리 미국 회사라고는 해도······. 미개한 동양인이 사장이라 그런 모양인가.”
그 미개한 동양인이 샬롯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껄인 말은 아닌 듯 싶지만, 무례한 태도를 봐서는 알았더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미 그런 상대라는 걸 알았기에 샬롯 역시 개의치 않는 반응이었다.
하기야 애초에 마차에서부터 미국에서 자신의 지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에디슨에게도 못 박지 않았던가.
“브래들리 씨, 아까 당신이 미국인은 명예를 모른다고 했죠?”
그럼에도 샬롯의 기세는 꿀리지 않았다.
여자가 강하게 나가면, 때에 따라서는 남자 대 남자가 맞닥트릴 때와는 다른 종류의 압박감을 자아내기 마련.
특히 그 갈등 구도에 폭력이 용인되지 않으며, 여자 쪽이 엘레강스하고 기품이 있으면 그런 압박감은 더 강해진다.
“그, 그게 뭐?!”
회사가 부여한 지위가 아닌, 샬롯의 그러한 아우라는 제롬 브래들리에게 제대로 먹혔다.
“어린애와 여자를 보낸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나? 사장이랍시고 자리에 앉은 그 아시아놈은 무서워서 오지 않은 거겠지.”
뒤늦게 제롬 브래들리는 순간적으로 샬롯에게 기싸움에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사장님. 청나라 놈들이 아편에 절어있다는데 그 석유회사 아시아놈도 아편에 절어있는 거 아닙니까.”
“이런 놈들이 대영제국과 여왕님을 위한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이고 같이 명예를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제롬 브래들리 옆에 있는 녀석들은 아마 회사의 간부쯤 될 텐데 나불거리는 솜씨로 자리를 따냈는지 맞장구를 잘도 쳤다.
“흐음?”
다만 샬롯이 팔짱을 끼고 고압적인 눈빛을 한번 쏘아보내자 바로 시선을 못 맞추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숙맥 같은 인간들.’
반면 샬롯은 지금 속으로 이 자들에 대해 품게 된 감정을 상당히 절제한 상황이었다.
다만 아시아인이 어쩌고, 명예를 모른다느니 어쩌고, 제롬 브래들리의 부하가 조선과 청나라를 구분 못한 것도 그렇고 아편이 절었다느니 지껄인 것도 그렇고.
저 말에 응수하면 놈들의 페이스에 휘말린다.
‘그렇게 되면 지금 분위기를 내세워서 저들을 몰아붙이는 이 분위기도 깨지고 말겠지.’
하물며 태선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인지는 자신이 잘 아는데 저따위 도발로는 씨알도 안 먹힌다.
다만 그것과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건 별개의 문제.
‘음, 결국 저들이 우리 폴리에틸렌과 우리 기술로 케이블을 제작하는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사실 에디슨에게는 자신의 지위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약한 소리를 했었지만.
작정하고 하려면 할 수야 있었다. 문제는 저들을 구워삶기 위해서 소요되는 노력과 자원 그리고 들일 시간이 아깝다.
안 그래도 해저 케이블 건은 태선이 중요히 여기고 서두르고 있거늘.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나. 마침 며칠 뒤에 버킹엄궁으로 초대를 받았으니.’
대영제국의 영향력이 닿는 범위에서는 가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휘두르는 사안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라면 안 통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번 건에는 무조건 통한다.
“좋아요. 제롬 브래들리 씨, 당신은 영국인이니 명예를 잘 알겠군요. 미국인인 저나 우리쪽 주임기사인 에디슨이나 미국에 있는 태선 킴 사장님과는 달리 말이죠?”
“물론 당신이나 뒤에 코흘리개를 비롯해서 미국의 그 아시아놈보다 여왕님의 국민인 내가 명예를 잘 알 수밖에.”
“확실히 빅토리아 여왕님의 나라에서 성은을 받고 살아가는 이는 명예를 알아야 도리겠죠. 당신은 그렇다는 건가요?”
굳이 빅토리아 여왕 이름을 언급하며 같은 말을 확인이라도 받듯 되풀이하는 샬롯의 반응에 제롬 브래들리는 코웃음 쳤다.
“감히 미국 놈들이 여왕님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불쾌하군. 쓸데없는 소리나 할 것 같으면 그만 나가시오.”
“이 사업에는 여왕님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데 지금 브래들리 씨 당신이 하는 행동이 여왕님께 누가 되는 것도 잘 알고 계시겠죠?”
“감히 여왕님의 이름을 등에 업고 허튼 소리를!”
샬롯이 빅토리아 여왕을 언급하자 제롬 브래들리의 화를 더 돋우었는지 분위기가 격해졌다.
“여왕님이 아셨다면 당신네 미국인이이나 아시아 출신놈이 아니라 영국인인 우리 편을 들어주셨을 거요!”
“그럼 그런지 아닌지 한 번 직접 알아보도록 하죠.”
짧게 말을 맺더니 샬롯은 돌아섰다.
누가 봐도 이건 말싸움이 격해지다 그대로 돌아선 것, 협상하러 온 마당에 최악도 이런 최악의 결과는 없었다.
“저······.”
에디슨은 물론이고 새뮤얼 모스나 윌리엄 톰슨도 어쩔 줄 몰라서 머뭇거렸다.
분위기상 여기서 샬롯을 잡아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았기에.
“모두 가시죠. 여기서 더 할 이야기는 없을 것 같으니.”
샬롯이 돌아보며 한 마디 더 하고 나서야 그들은 모두 제롬 브래들리의 케이블 공장을 빠져나왔다.
***
“좋네요. 런던 시내에서도 가깝고 나중에 애들이 뛰놀기도 괜찮고 이 집으로 하죠.”
다음날 존 브라더튼이 봐둔 저택을 둘러본 샬롯은 어디로 매입할지 낙점했다.
“예, 그럼 매입 관련해서 일처리는 제가 해두겠습니다.”
“어머,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드리죠.”
“샬롯 실장님은 달리 더 중요한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저야 사장이래도 늘 하는 일이 그 일이 그 일이라서.”
“그런 말 마세요. 브러더튼 사장님 덕분에 런던에 전구와 보일러와 수세식 화장실이 많이 보급됐잖아요.”
샬롯의 칭찬에 브라더튼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슬쩍 그녀의 눈치를 봤다가 약간 뒤처져 걷는 에디슨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
미국 본사에서 온 젊은 주임기사는 내내 침울했다.
왜 그런지는 이번 해저 케이블 건 관련으로 새뮤얼 모스나 윌리엄 톰슨도 만났기에 대략적인 사정은 들었다.
아울러 케이블 공장에서 있었던 대화의 흐름까지도.
“그런데 괜찮은 건지요?”
샬롯과 에디슨이 표정을 살피던 브라더튼은 뭔가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샬롯 실장님이 런던에 온 근본적인 이유는 자동차 사업과 아울러 전화 사업을 위해서 아니십니까. 그리고 그걸 위해 케이블 공사가 중요할 텐데 미팅이 잘 안 풀리셨다고······.”
“최상의 방식으로 풀리지는 않았죠. 그냥 거기서 그들이 우리의 기술을 존중해줬다면 가장 좋았을 텐데.”
“······죄송해요. 제가 더 잘했다면 그러진 않았을 텐데.”
뒤따르던 에디슨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제가 한 번 나서볼까요? 그래도 스완 제네럴 일렉트로닉스 영국 회사를 이끌면서 쌓은 인맥이 제법 되고 나름 명성도 얻었습니다.”
“확실히 브라더튼 씨가 나서는 것도 한 가지 길이겠지만 이번에는 괜찮아요. 그 조력은 다른 기회를 위해 지금은 아껴두는 걸로 하죠.”
“그럼 제가 다시 약속을 잡는 걸로···예?”
예상치 못한 답이었는지 브라더튼이 흠칫하는 사이.
“에디슨, 너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어제는 충분히 지금 네 역량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을 보여줬어.”
에디슨을 격려해줬다.
“예? 그치만 어제 제가 한 일이라고는······.”
어제 공장에서 일을 상기해보는지 에디슨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처지도 모르고 강경한 어조로 말하다 나중에는 줏대도 없이 사정하듯 말하면서 샬롯 실장님 체면까지 까먹은 것밖에는 없는데요.”
“아냐, 넌 충분히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하렴.”
하지만 샬롯은 오히려 더욱 에디슨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강하게 나서서 이론적으로 따박따박 설명해줘야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다소 온건하게 나가야 할 것 같으면 또 그렇게. 내 체면을 깎아먹어도 상관없어. 실무자가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 상급자의 체면이란 건 있는 법이니까 말이야.”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샬롯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 상급자의 체면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건 그런 자리가 아니거든.”
부부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런 걸까.
순간 에디슨뿐 아니라 브라더튼까지도 왠지 샬롯에게서 태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 그리고 지금부터 드레스 쇼핑을 가려는데 두 사람에게 짐꾼 노릇을 맡겨도 괜찮죠?”
뜬금없이 꺼낸 말은 드레스 쇼핑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바로 에디슨과 브라더튼은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님 초대로 버킹엄궁 가는 날이 이틀 뒤인데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원래는 마리나 앤과 같이 가려 했는데 둘은 사정이 있어서 나온 김에 사려고요.”
바로 여왕과 만났을 때 입을 드레스를 사기 위해서였기에.
***
윈저성에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버킹엄궁으로 돌아온 이상 예법은 지엄했다.
동시에 빅토리아 여왕은 샬롯에게 어떤 요구를 했다.
결혼할 때부터 한 번 버킹엄궁으로 오라고 했는데 사정상 쌍둥이를 나을 때까지도 그러지를 못했다.
그 전에 편지로 먼저 쌍둥이 소식을 전하게 됐는데, 요구는 버킹엄궁에 쌍둥이도 데리고 오라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대들 유모나 다름 없는 마리와 앤도 궁에 들어가게 됐고······. 그래서 예법 수업을 받게 됐지.’
마리와 앤이 드레스를 사러 같이 못 가고, 대신 샬롯이 에디슨과 브라더틈을 쇼핑 짐꾼으로 삼게 된 이유였다.
더불어 자칫 쌍둥이가 낯선 환경 탓에 여왕의 앞에서 울어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궁에 익숙하게 해주려 지난 며칠 동안 시녀들이 데리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이런 엄마가 있을까.’
사업을 위해 밖으로 다니는 동안, 유모는 버킹엄궁에 보내 예법 가르치고.
아이들은 궁에 익숙하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왕실 시녀들에 육아를 맡기고.
“이쪽으로 가시죠.”
정작 본인은 이제야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직접 버킹엄궁에 들어왔다.
저번에 런던에 왔을 때는 앨버트 왕세자는 그의 사택에서 만났고, 여왕은 윈저성에서 가서 뵀기에 버킹엄궁은 그녀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윈저성에 갔을 때보다 오히려 긴장감은 덜해.’
윈저성에 처음 갔을 때는 분위기에 위압됐었다.
지금 버킹엄궁은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따지면 윈저성보다 더 뛰어났다.
마차 타고 도작하여 웅장한 서관의 외형을 보고 입구인 앰버서더 코트를 지나 그랜트 엔트런스에 다다른다.
다시 그랜드홀을 지나 대계단으로······.
다만 샬롯은 이곳의 주인이 얼마나 다정하며 친근한지, 뭣보다도 여왕이기 이전에 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여왕에게 친근하게 굴며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녀가 바라는 건 안다.
‘여자로 교감을 할 수 있는 그런 상대를 바라라고 계셨지.’
이제 아이 엄마가 된 자신은 여왕과도 친구로서 한층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자가 되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먼저 대기실에 다다랐다.
“아, 사모님, 오셨군요.”
대기실에는 마리와 앤이 쌍둥이를 안고 있었다.
“엄마···엄마아아!”
“엄마아아!”
쌍둥이도 엄마를 보자 방긋 웃으며 엄마를 불러댔다.
다행히 낯을 가리거나 하지 않는단다.
아울러 지금 만나는 자리는 공식적인 행사 같은 것이 아닌, 빅토리아 여왕이 특별히 시간을 내서 샬롯과 만날 수 있도록 마련한 일종의 사적인 티타임.
“그리고 미리 말씀드렸듯 알렉산드라 왕세자님도 화이트드로잉룸에 와계시답니다.”
화이트드로잉룸은 공식적인 알현식이나 행사에 쓰는 장소와 달리, 그리 넓지 않아서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가 있다.
즉 친밀한 방식으로 손님을 맞이할 때나 쓰는 곳인데 거기 빅토리아 여왕과 알렉산드라 왕세비가 와있다니.
“그럼 가시죠. 두 분은 왕실 예법에 대해 저희가 가르쳐준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마리와 앤에게는 한 번 더 주의를 주고는 왕실 시녀가 화이트드로잉룸으로 안내했다.
‘드디어 다시 만나는구나.’
두근거리는 심정을 안은 채 샬롯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