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67
167 크룩스관(2)
진공관 속에 일정한 거리를 둔 두 개의 도체에 전압을 걸면 전자가 방출된다.
마치 총과 같이 음극에서 양극으로 전자가 쏘아지는 것, 즉 전자총이다.
“그러니까 킴 경의 회사가 보유한 진공관 기술과 제가 연구 중인 음극선을 합치면······.”
이때 마침 모자이크처럼 촘촘하게 구멍이 뚫린 판을 앞에 대어주고 흔히 RGB라 부르는 근본적인 색.
빨강, 녹색, 파랑의 형광 물질을 발라주면 무슨 일이 생기냐?
“음극선이 쏘아보낸 입자가 색깔 판에 주사되면서 완성된 화면이 나오죠.”
“완성된 화면이란 명화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명화? 물론 가능하지만 이 기술은 가능성은 그 이상이다.
“색깔로 조합이 되는 건 무엇이든 화면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입자는 움직이는 거죠?”
“그렇죠. 킴 경이 말씀하신 입자라고 했나요? 아무튼 그 개념으로만 봐도 그런데다가 아까 형광 물질을 입힌 색깔판···아!”
말하다 돌연 무언가 깨달았는지 윌리엄 크룩스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아차린 모양이구먼.’
하기야 본래 역사에서는 몇 년 뒤의 일이기는 하나 어쨌건 크룩스관을 발명한 창시자이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잠시만요, 제 생각에 그 입자와 색깔판의 배합과 움직임에 따라서는 단순한 그림뿐 아니라 움직임이나 색감의 변화도 표현할 수 있을 듯한데······. 설마 의도하신 건가요?”
“사실 평소에 구상만 하던 아이디어인데 아직 미완이라지만 크룩스 씨 발명품을 보고 저도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오, 그렇군요! 역시 우리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요!”
저리 기뻐하는 걸 보면 크룩스는 역시 발명가로서는 똑똑하지만 권력 관계에 있어서는 어수룩한 면이 있었다.
진공관 기술은 태선이 독점하고 있었다.
애초에 많은 이들이 그런 기술이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 윌리엄 크룩스의 음극선관은 카피가 간단하지.’
애초에 태선이 원리를 다 아는 데다가 이 시점에서 윌리엄 크룩스의 음극선관은 미완성, 거기에다 엔지니어인 에디슨이 직접 와서 봤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연구실에서 재현하는 것도 가능한데 거기에 진공관 기술을 가져와서 자체적으로 결합한다?
텔레비전 뚝딱 만들어지는 거지.
‘이제부터 할 일은 그걸 크룩스가 불쾌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깨닫게 해주는 건데.’
“후우, 이거 당장 해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는데요. 킴 경, 부탁드립니다. 진공관 기술을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아니, 그래서는 너무 염치가 없고 잠깐만 빌려주시는 건······.”
“그건 좀 곤란하군요. 진공관 기술은 저희 회사에서도 아주 중요시하는 거라.”
반쯤은 거짓말이다. 이미 기술의 테크는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넘어갔으니.
즉 자신은 이미 두 세대쯤을 앞서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술을 아무런 대가 없이 퍼줄 이유는 없지. 그리고 윌리엄 크룩스가 자신에게 내줄 수 있는 것.
‘있잖아. 연구소에 들어와서 공밀레 하면서 굴러주는 거지.’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회사의 기술이란 저 혼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연구자나 엔지니어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서요. 그들의 기여를 무시하고 제가 독단적으로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킴 경의 그런 신념은 존경스럽지만······.”
어서 말해, 연구소로 들어오겠다고.
“으음, 그렇다고 제가 그 진공관을 발명한 분들의 허락을 구하려고 미국으로 가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고.”
태선은 잠자코 기다렸다. 연구소로 들어와서 한솥밥을 먹게 되면 자연히 다 해결된다는 걸 알아서 깨닫기를 바라며.
아까 텔레비전 원리는 힌트 조금만 던져주니 혼자서 잘도 깨달았으면서.
“으, 어떻게 한다.”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영 안 돌아가는지 여태 고민한다.
그렇다고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서른 넘은 사람이 손톱까지 깨물며 불안 증세까지 보이는데.
이대로는 기다려봐야 시간 낭비만 될 뿐이다.
“아까 하던 이야기의 연장입니다만 다시 권하지요. 제가 설립하려는 연구소로 들어오면 어떠십니까?”
“예? 그 이야기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연구소에 들어오면 기존 기술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례적으로 태선이 크룩스의 말을 끊고 나섰다.
협상할 때 상대의 페이스를 뺏어올 때 쓰던 다소 공격적인 화법에 크룩스가 흠칫 놀란다.
“즉 진공관과 음극선관을 연결한 그것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비로소 윌리엄 크룩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연구에 밝은 눈치, 하지만 사리에는 어두운 눈치.
그 두 가지 사이에 연결점이 생기며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이제야 깨달았냐.’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과연 킴 경이십니다. 과학적인 식견도 깊으면서 이런 묘안까지 바로 생각해낼 수 있으니 그렇게 성공하신 거였군요.”
하지만 감탄을 하면서도 크룩스는 아직도 뭔가 고민이 남아있는 눈치.
걱정마라. 네가 하는 그 걱정에 대한 해결책은 처음부터 이미 생각해뒀단다.
“물론 처음에 크룩스 씨가 제안을 거절하셨던 이유를 들었던 만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배려해드릴 생각입니다. 크룩스 씨의 개인 연구실을 최대한 집과 비슷하게 꾸며드리죠.”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지.
“그리고 개인 비서를 붙여서 연구실과 집까지 편히 오가게 해드리겠습니다.”
“음, 그래도 집 밖을 나서야 한다는 점은 좀 불편할 것 같지만······.”
“그건 이해해주십쇼. 진공관 기술을 공유는 하더라도 연구소 밖으로 가지고 나와 크룩스 씨 댁에 설치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워서요.”
“에이, 저도 그렇게까지는 안 바랍니다. 킴 경이 저를 위해서 이미 이렇게나 배려해주고 계시는데 그걸 무시한다면 정말 막돼먹은 놈이겠죠.”
알긴 아네.
아무튼 이제 거의 넘어왔다.
“아까 크룩스 씨의 발명품을 보고 바로 떠올려낸 건 평소에 품은 아이디어가 있어서라고 말씀드렸었죠?”
“발명품이 나왔을 때 특허를 어느 쪽이 가져가느냐에 대해서 말씀이라면 물론 킴 경이 우선이시죠. 발상도 그렇고 진공관 기술도······.”
“하하, 그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구상한 아이디어의 전체에 대해서 공유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습니다.”
아, 물론 특허는 이쪽에서 지분을 많이 가져가겠지만 그건 나중에 논하도록 하고.
아니, 논할 것도 없나. 방금 전에 윌리엄 크룩스가 스스로 저렇게 말했으니.
“음극선관과 진공관으로 움직이는 화면을 구현하고, 거기에 더해 소리도 낼 수 있는 장치를 만든다면요?”
“예? 소리를 재현하는 장치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불가능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화도 전파를 타고 먼 곳에 목소리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살짝 비틀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어? 듣고 보니 그렇군요. 따지고 보면 전화 상대가 듣는 목소리도 재현된 소리의 진동이니 충분히 되겠어요!”
크룩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오오! 사장님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으면 저한테도 미리 말씀해주시죠! 엄청 멋지잖아요!”
옆에 있던 에디슨도 덩달아 흥분해서 날뛰는 꼴이다.
하기야 방금 말한 건 녹음기나 전축의 원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전생에서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해서 쏠쏠한 재미를 봤던 바.
‘그럴 만도 하려나.’
애초에 그런 부분에 흥미가 있었고 관심이 있었으니 그의 마음에 어느 시점에서 씨앗이 심어졌을 것이고 훗날에 축음기를 발명했을 테니까.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보기는 했는데 날카로운 걸로 금속을 긁으면 굵기나 그런 것에 따라서 소리가 다르게 들리잖아요? 어떻게 그걸 이용하면······.”
그리고 엔지니어 아니랄까봐 이어지는 에디슨의 TMI.
아니,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만큼은 Too much information이 아니었다.
역사에 따르면 전신 기사를 하다가 1877년에 축음기의 원리를 개발했다더니.
‘에디슨 녀석, 이미 전부터 비슷한 아이디어를 마음에 품고 있었구먼.’
“오, 에디슨이라고 했나요? 멋진데요! 그 기술과 킴 경의 진공관에 저의 음극선관을 합치면 진짜로 역사를 뒤엎을 만한 작품 하나 나오겠어요!”
“크룩스 형, 우리 잘해봐요! 세상을 놀래켜주자고요!”
“혀, 형이라니······. 하핫, 그러면 나도 동생이라 부를게. 같이 잘해보자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크룩스는 에디슨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어있었고.
그건 물론 윌리엄 크룩스가 연구소에 들어오는 걸 전제로 깔고 있었다.
에디슨이 슬쩍 이쪽을 보며 윙크를 날리는 걸 보니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지만······. 녀석도 크룩스를 형이라 부른 건 전략적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약삭빠른 녀석이야.’
뭐 그게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싫지는 않다.
오히려 그건 칭찬해줘야지. 태선은 에디슨에게 옅게 미소 지어보이고는 시선을 윌리엄 크룩스에게 옮겨서 이 미팅에 쐐기 박듯 말했다.
“그럼, 며칠 뒤 계약서를 가지고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
연구소 설립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소장으로 찰스 배비지, 부소장으로 윌리엄 크룩스.
그 외에 에디슨이 합류했고 앞으로 쓸만한 인재를 보면 지속적으로 영입할 터.
행정적인 부분이야 샬롯뿐 아니라 존 브라더튼도 있고 도움 받을 곳은 널렸기에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가장 어려운 일이 연구소 이름을 고민하는 일이라니.’
이름을 짓지 못해서 일단은 간판도 달지 않은 채 연구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계속 고민을 하고 있는데······. 사실 무난한 것은 지명을 따는 것이었다. 멘로파크 연구소가 그랬듯.
‘음, 그렇지만 멘로파크 연구소를 지을 때와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기는 해.’
지금 자신은 이미 네임드라 지금 짓는 연구소도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덧붙여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알고 있다.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연구소에도 실화를 일궈낼 것을. 당장 장전하고 있는 브라운관이나 축전기만 해도 그러하다.
‘아니, 이제 페르디난트 브라운이 개선하기도 전에 크룩스관 자체만으로 텔레비전의 토대가 될 테니 크룩스관 텔레비전이라 불러야 하려나.’
어쨌든 이 발명품이 상용화된다면 센세이션을 일으킬 거다. 다시 말해 연구소 이름을 뭘로 붙이느냐에 따라 그 이름의 주인에게는 엄청난 영예.
그렇다면 기왕 이름을 붙일 거라면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는 이름을 붙이면 좋지 않겠는가.
“여왕님의 이름을 따죠.”
“네? 아, 혹시 연구소 말씀하시는 건가요?”
고심 끝에 꺼낸 말에 역시 척이면 척.
바로 알아들은 샬롯이 아주 좋다는 듯 손뼉을 쳤다.
“좋네요! 여왕님의 이름이 붙는다면 여러모로 지원을 받기에도 좋잖아요. 이름을 보고 실력 있는 연구원들이 먼저 들어오고 싶어할 수도 있고요.”
‘거기에다 지금 샬롯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앞으로 몇십 년은 더 해먹거든요.’
그야말로 든든한 동아줄.
아니, 이정도면 동아줄도 아니고 쇠심줄.
아니, 쇠심줄도 아니고 쇠기둥이다.
“물론 여왕님께 허락은 따로 구해야겠지만요.”
샬롯이 살짝 주의할 점을 덧붙였지만 그건 문제도 아니다. 필시 그녀는 허락한다.
어중이떠중이의 것이라면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 수 있으니 거절하겠지만.
여왕까지 갈 것도 없이 그 이전에 의전 담당 부서에서 컷 당하겠지만.
태선이 누구인가. 이미 이룬 업적만 늘어놔도 전구, 전기, 샤워시설, 수세식 화장실, 자동차, 전화, 해저 케이블······. 신화가 따로 없지 않던가.
“조만간 여왕님을 찾아뵙고 허락을 구하도록 하죠.”
“네, 그러면 저도 같이 가요. 시간은······.”
태선이 사무실에서 샬롯과 빅토리아 여왕님을 만날 시간을 의논하려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 영국에서 뽑은 비서인 크리스 먼로일 터, 태선이 들어오라고 일렀더니 양복을 정갈히 차려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사장님, 왕실에서 폰손비 경이 오셨습니다.”
뽑은지 얼마 안 돼서 약간 긴장한 모습인가 싶었더니 손님이 무려 폰손비 경이었을 줄이야.
“오시라고 해요.”
비서가 나가기도 전에 이미 밖에서 듣고 있었는지 폰손비 경이 바로 들어왔다.
“킴 경, 자네가 들어오라고 말했으니 지금 들어와도 예의는 차린 것일세.”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예의쯤이야 안 지키면 어떻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침 티타임 시간이네요. 다과를 내올게요.”
폰손비 경이 손을 흔들어 샬롯을 제지했다.
“아아, 잠시만. 바쁜 일이 없으면 같이 왕궁 가서 티타임을 가지면 어떤가?”
“여왕님께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그렇다네. 헌데 마침 자네도 왕궁에 요긴한 볼일이라도 있었다는 눈치로 보이네만.”
여왕이 자신을 부른 용건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다.
‘짐작가는 용건이라면······. 솔직히 이제는 여왕이나 왕궁이나 영국 정부와도 얽힌 일이 많아서 짐작도 안 되네.’
그런 눈치를 챘는지 폰손비 경이 슬쩍 귀띔을 해주었다.
“티타임 자리에 더비 백작과 라이온스 경도 있을 걸세.”
“예? 그 말은?”
“그래, 저번 자리에서 자네가 유럽 정세에 대해서 한 말이 인상 깊어서 말이야. 그와 관련이 있는 걸세.”
‘흠, 그 정도였나.’
하기야 당대 유럽 각 국의 역사와 정세를 속속들이 아는 자신에게는 지식이자 상식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감흥을 줬을지 모르겠다.
‘뭐 잘 됐지. 그런 면으로도 나를 높게 봐준다면 여러모로 얻을 것이 많아지니 말이야.’
중요한 것은 그걸 통해서 자신이 뭘 얻느냐는 것.
“여기요. 저는 이대로 가면 되는데 당신은요?”
샬롯이 외투를 가져와서 걸쳐주었다.
“나도 괜찮아. 폰손비 경, 출발할까요?”
“하하, 부부가 함께 참으로 결단력이 좋구먼. 그래, 가세.”
태선과 샬롯은 폰손비 경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