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77
177 동쪽으로(2)
이제 막 뉴욕항을 떠나 런던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 직전.
“잘 다녀오게나. 다녀오면 내 연봉은 꼭 올려주고.”
다른 무엇보다 태선이 신경 쓰는 개리슨도 아니고.
“후우, 자네 정말로 가는군.”
전쟁 영웅에 육군 사령관에 전쟁부 장관 대리인데도 무려 워싱턴에서 뉴욕항까지 마중 나온 그랜트 장군도 아니고.
“이봐 로저스, 자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태선의 신변에 문제가 없도록 해.”
존 로저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태선의 안전을 강변하는 기드온 웰스 장관도 아니었다.
“······.”
몰려든 인파의 한쪽에 마치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억지로 나온 듯 약간 뾰로통하게 서 있는 태경이었다.
“미안하다, 태경아.”
“어이 태경아, 사장님이 말씀하잖아.”
사라 던컨과 나란히 태경의 뒤에 서 있는 에릭 스미스가 팔꿈치로 슬쩍 건드렸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태경이 사라와 가까운 사이여서 평소 에릭과도 잘 지내는데 그의 말에도 저런 걸 보면 제대로 삐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애초에 태경의 말에 반응도 없고 곧 배를 탈 텐데도 이런 걸 보면 오죽하겠지만.
‘하기야 이해도 가긴 해. 조선으로 갈 기회가 있는데 자길 안 데려가니.’
그렇지만 단순한 관광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삼국의 대사와 조선의 화친을 중재하는 사명을 띠고 있으며.
조선 근대화를 위한 사업 기반을 쌓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려 한다.
어느 것 하나 얕볼 수 없는 일이며, 샬롯이야 가족이지만 동시에 전략이라 치더라도.
‘안 그래도 루이스와 클락을 데려가는데 태경이도 데려가는 건 부담이 너무 커져.’
객관적으로 봐서 태경이가 나이에 비해 성숙하게 강단도 있지만 당장 조선으로 데려가서 뭘 시켜먹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곳 미국에 남아 자신이 이룬 것을 배경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인맥을 쌓으면 미래 가치는 완전히 달라진다.
“태경아, 다음에 조선에 갈 때는 반드시 같이 가자.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은 많이 있지만 생략하고 다듬어서 고작 한 마디만을 했다.
“······.”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태경이에게 보다 못한 사라가 손을 들더니 등짝을 한 대 쳤다.
짝────!
‘어우야?!’
배구선수 스파이크 정도의 위력이 아니었을까 싶은 소리.
태경이도 덩치가 커졌는데 휘청거렸다.
하기야 사라가 보통 사람이 아니기야 하지만.
‘그래, 맞아. 원래 아멕스 배달부로 활약한 경력이 있었지.’
“태경이, 너 지나치게 버릇이 없어졌구나. 형이 저 정도로 이야기하면 알아들어야지. 그러고 떠나면 너나 태선 사장님이나 서로 마음이 편하겠어?”
다만 그녀의 피지컬이나 돌발적인 행동보다도 다음에 이어진 말이 더 인상적이었다.
“물론 태선 사장님에게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나는 말이지 배다른 오빠가 있다는 걸 알고 아버지가 떠나는 날 너처럼 버릇없게 굴었거든.”
배다른 오빠라는 건 아마도 옆에 있는 에릭을 말함이라.
그러고 보니 둘은 남매 사이라면서 성씨도 다르고 하물며 사라는 인디언 혈통이라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를 다시 만나서 사과할 수가 없게 됐어. 그러니 태경이 넌 널 아껴주는 형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소중하게 대해.”
“······죄송해요, 사라 누나.”
지금도 그것이 뭔지 물어볼 계제는 아니었지만 사라 던컨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미안해, 형.”
본래 태경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바로 사과가 나온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괜찮다. 이해한다. 그리고 너도 나를 이해해줘서 기쁘구나. 사라나 에릭 같이 좋은 분들이 널 생각해주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어 더 좋았고.”
태선은 태경이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방금 전 사과를 했다고는 해도 삐졌던 터라 쭈뼛거리며 다가오자 태선은 녀석을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 약속하도록 하마. 누나랑 매형은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올게.”
“응, 형! 나도 형 없는 동안 열심히 공부할게!”
“사라, 에릭. 태경이를 잘 부탁해요.”
사라와 에릭에게는 태경이를 당부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한 뒤 태선은 전구, 전기 설비와 이런저런 조선에 가져갈 화물을 실어둔 배에 올랐다.
【 MORNING GLORY 】
얼마 전 WCSS 필라델피아 항구에서 건조했고 증기터빈 엔진을 장착한 이 배 이름은 조선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연히 태선이 작명했는데 조선에 갔을 때 외교 플레이를 위해서 미리 깔아둔 안배 중의 하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엄연히 이양선이다.
‘그렇지만 이양선 중에서도 가장 좋은 성능을 자랑하는 이 배의 이름이 조선에서 따왔다고 하면 어떨까.’
조선 출신인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그나마 이양선에 대한 경계심을 줄일 수 있을 터.
‘거기에 전기, 전구 선물이 콤비로 들어가면 환상의 테크지.’
빛이 없는 세상에 전구의 등장은 어느 문명에서든 그야말로 센세이션이니.
유교주의가 됐든 종교가 됐든 빛이라고 하면 일단 선의 포지션이 아니겠는가.
거부감 있을 수 없지.
“그런 의미에서 에디슨, 네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
“예?”
먼저 배에 타서 화물을 정비하고 있던 에디슨이 갑작스레 태선이 던진 말에 약간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면서 되물었다.
‘운현궁에 전구 설치하고 보일러로 뜨뜻하게 엉덩이 지지게 해주면 흥선대원군도 쇄국이고 뭐고 걷어차지.’
“아, 죄송해요, 사장님. 제가 연구소에 있으면서는 크룩스관 때문에 하도 여기저기서 물어서 잠을 못 잤는데 또 화물 체크도 직접 해야 하고 그래서······.”
“일이 잘되면 나중에 태평양전신회사를 세워서 너한테 맡긴다는 거야.”
“아, 그 말씀이셨군요. 넵, 불철주야 고생하겠슴다!”
다시 기력을 차린 에디슨의 어깨를 다독여줬더니 옆에서 그 일을 도와주고 있던 하이럼 맥심도 눈에 들어왔다.
“기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장님! 저도 최선을 다해서 업무에 매진하겠습니다!”
“총기 보안도 중요하지만 맥심 씨도 엄연히 엔지니어로 태운 겁니다. 그러니 에디슨과 같이 힘내주세요.”
그 외에도 배가 크다 보니 승무원이 많았다.
물론 상선이자 화물선이라 군함만큼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배가 한 대 뿐이라고 해도 저기 저 USS콜로라도 호는 승무원이 600명이나 된다지.’
새삼 생각해봐도 어마어마한 숫자, 그만한 배가 먼저 출항해 나갔다.
앞으로 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양을 거쳐 베이징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모닝 글로리 호를 호위해주리라 생각하니 든든했다.
“여기 있었구먼.”
앞서 가는 USS콜로라도 호 선미를 보고 있었더니 제이크 벌링게임이 태선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조선에 돌아가는 심정은 어떤가?”
“글쎄요, 저는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네요. 아직 대서양이라 그런지.”
·
·
·
증기터빈 엔진을 장착한 모닝 글로리 호 대서양을 닷새 안으로 횡단할 수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열흘이 걸렸다.
USS콜라라도 호는 증기터빈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셨군요, 태선. 나는 이번 조선과 화친에서 프랑스 대사로 임명된 루이 마르코 라부르스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런던항에 도착하자 프랑스 대사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사실 그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배였다.
USS콜라라도 호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항국에 정박한 웬만한 배보다 큰 사이즈에 프랑스 국기가 걸려있으니.
1790년에 만들어진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 국기는 아니고 하얀색 바탕에 백합이 그려진 왕가의 깃발이었지만.
‘프랑스에서도 힘을 줬다는 느낌이 나네.’
다만 힘을 줬더라도 결국 기선이었다.
라 나폴레옹 호라고 적힌 라부르스트 대사의 프랑스 함선 옆에는 마스트에 유니온잭을 펄럭이는 또 한 척의 배가 있었다.
‘HMS 세라피스 호, 저것도 기선이고.’
참고로 미국 배 앞에 붙는 USS는 United States ship, 영국 배 앞에 붙는 HMS는 Her Majesty’s hip의 약어.
어쨌거나 태선의 배를 제외하고는 다 기선이니 속도는 거기 맞춰서 가야 할 듯 했다.
“오, 와있었군. 오늘 온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조선으로 가기 전에 겸사겸사 청나라 쪽에서도 일을 미리 정리해둘 것이 있어 조금 늦었네.”
“괜찮습니다. 것보다 직접 나오신 걸 보니 역시 카울리 백작님께서 대사가 되셨군요.”
“그야 물론이지. 내가 나서 주장하고 나섰네만 누구에가 맡기겠는가.”
60이 넘었지만 아직 현역이라는 듯 헨리 웰슬리카울리 백작은 생기 넘치게 말했다.
동시에 역시 외교관이라서 그런지 프랑스 대사 루이 마르코 라부르스트와 안면이 있는 듯 대화에 자연스레 끌어들였다.
“라부르스트와는 벌써 인사 나누었나보군.”
“예, 막 만나서 통성명을 한 참입니다.”
“외교적인 수완 외에 예술과 건축에도 조예가 아주 깊은 사람이라네. 라부르스트 이 친구가 무려 보자르 드 파리 졸업생 출신이거든.”
화제를 이쪽으로 불을 붙이자 라부르스트 본인도 빼는 대신 본격적으로 말을 받았다.
“제가 졸업하고 나서도 건축 쪽으로 활동을 좀 했습니다. 프랑스에 제가 직접 설계했던 건물들도 있는데 나중에 파리에 오시거든 연락주세요.”
“설계한 건물 구경이라도 시켜주시려고요?”
“예, 물론이지요! 아, 그러고 보면 아시아의 건축은······.”
건축에서 다시 이런저런 화제로 옮겨가며 대화를 나누는 와중 태선의 뇌리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수교 맺으면 대사관이 필요하겠네.’
전기, 전구, 보일러 등의 기본적인 설비는 에디슨과 맥심이 다룰 줄 안다.
연구소에서 하도 구르느라 이것저것 할 줄 안다지만 건축에 관해서만큼은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까.
‘음,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까지는 아니라도 확실히 그렇겠지. 그런 면에서 루이 마르코 라부르스트라 했나?’
이 양반이 건축에 조예 있어 다행이었다.
아시아의 건축도 좋기야 하겠지만 고층 건물을 올리고 그와 함께 전기, 전력, 수도 설비를 들이는데는 서구식 건축법이 더 유리했다.
하물며 조선은 나무와 흙을 주로 건축 자재로 쓸 것이다.
친환경도 좋지만 안정성을 감안하여 장기적으로 보면 건축에 아스팔트와 철재를 쓰는 방식도 들여놔야 한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면 라부르스크 외에도 따라가는 직원이나 군인들 중에도 저마다 기술이 있을 수도 있을 거야.’
그곳에 계속 있을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겠지만.
‘기술이 있는 이는 보수를 얹어줘서 더 붙잡아둘 수 있겠지.’
KSO로부터 따로 고용하는 식으로 해서.
그리고 그 기술을 조선에서 활용하는 방식으로 가면 자신이 직접 데려가는 에디슨과 맥심 외에도 많은 인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잘 됐네. 조선에 갈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텐데······.’
심심풀이 삼아 할 일을 방금 정했다.
USS콜로라도 호의 승무원은 물론이고 HMS세라피스 호나 라 나폴레옹 호 승무원에 대해서 호구 조사를 잘 해둬야겠다고 태선은 생각했다.
***
이는 영국, 미국, 프랑스의 배들이 같이 움직이는 전례 없는 외교 대사건이었다.
하물며 항해 거리도 아시아 극동의 조선에 이르러야 하니 짧지가 않다.
그 탓에 출항은 예정보다 하루이틀씩 지연되고 있었다.
“음, 어째 출발부터 삐거덕거리는 느낌이네요.”
“삐그덕거린다기보다 항로 문제로 협의를 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나봐요.”
하기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데 당대의 강대국이면서 동시에 바다에서는 나름 이름을 날리는 나라들.
영미프에서 내로라 하는 함장들이 배를 이끌 테니 여러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재정비도 하고 뭣보다 당신이랑 루이스랑 클락이랑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잖아요.”
“하긴 그건 좋네요. 참, 가는 동안 시간이 걸릴 텐데 조선말과 문자를 가르쳐줘요.”
“조선말···?! 아, 내가 그걸 생각 못하다니.”
한국어, 한글을 가르쳐두면 샬롯도 생활이 편해질 터이거늘.
루이스와 클락도 한국어를 배워두면 좋을 것이다.
“실은 마리랑 앤이랑 이야기하다가 나온 말이거든요. 알프레드랑 마리랑 앤도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알프레드랑 그녀들도 같이 배우겠다고 하던가요?”
“네. 나중에 미국에 돌아와서 은어처럼 쓸 수도 있겠다면서 의욕을 보이던데요.”
조선에 가는 동안 승무원들 능력을 파악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하나가 더 늘었다.
‘생각해보면 에디슨과 맥심에게도 가르쳐두는 게 좋겠네. 조선의 기술자들 가르치려면 아무래도 직접 소통하는 일이 많을 테니 말이야.’
물론 여태까지 조선으로는 박규수와 오경석과 지속적으로 서신을 보내면서 소통하고 있었고 특히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단어를 정리하고 교보재를 만들어 보내거나 해서.
‘완전하지 않지만 그쪽도 영어를 어느 정도 하고, 이쪽도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하면서 서로 대화하면 서로의 말을 배우는 속도도 더 빨라지겠지.’
내친 김에 태선은 바로 시간 내서 한국어 단어집과 교보재를 만들었다.
겸사겸사 한국에서 신경 쓸 문화적인 특성 등에 대해서도 정리하기 시작했고.
“킴 사장님, 계십니까? 오, 계셨군요. 날짜가 잡혔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흘이 지난 날 영미프 함장들 모임에서 마침내 항로를 정했는지 존 로저스가 직접 태선의 저택에 와서 출항 일정을 알려줬다.
“이틀 뒤로군요.”
“예, 좀 여유가 없지요. 아무래도 그동안 지체한 시간이 좀 길어서요.”
“아뇨, 딱 좋군요. 마침 쉬기도 적당히 쉬었고 준비도 마친 터라서요.”
‘이틀 뒤라.’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널 때 제이크 벌링게임에게 말했지만 조선으로 향한다는 실감이 별로 들지 않았거늘.
지금은 말만 들었을 뿐인데 태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돌아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