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183
183 흥선대원군(3)
“왜국 말인가?”
서구 열강국 이야기를 실컷 잘하더니 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
“이 사람아, 갑자기 왜국 이야기는 왜 꺼내는가?”
“청나라도 아니고 왜라니.”
흥선대원군은 물론 박슈구나 오경석도 그랬다.
아무래도 청나라가 털린 건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라 대외 관계의 포커스가 그쪽으로 쏠린 탓이겠지.
‘그에 비하면 일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테니까.’
실제로 지금의 일본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문제는 지금 일본이 내일 일본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임진년의 왜란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야 모를 수가 없지. 우리 역사에서 유감스럽게도 씻을 수 없는 치욕 아닌가.”
“그 임진왜란 때처럼 왜국은 이미 서구 국가와 연계하여 군국시찰단을 들이고 병사를 키우고 신무기를 사고 개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당 취급당할까봐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먼 미래의 일도 아니었다.
2년 뒤, 아니 1866년이 끝나가니 사실상 1년 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다.
서구식으로 소학교-중학교-대학교 교육 체계와 의무 교육 제도, 국민 개병, 군대 편제의 근대적 개편 등······.
‘그렇게 강해진 국력을 처음 과시하는 방법이 바로 조선을 두드려 패는 일이었지.’
채 10년도 지나기 전인 1875년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의 암흑기가 시작된다.
“영길리국에는 이미 왜국의 유학생이 다녀가고 있으며, 심지어 불란서국 시찰단이 내년에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왜국이 각 나라에서 철갑선이나 신식 총포 등을 사들이거나 기술을 배운다면 그걸 어디에 사용하겠습니까?”
잠시 독주하듯 말했으나, 오경석이나 박규수는 물론이고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그저 듣기만 했다.
왜국을 거론하며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거듭나고 있음을 강조하니 그제야 와닿는 것이다.
“그나마 임진왜란에는 명나라가 도와줬다지만 지금 우리 조선의 대외 정세는 도와줄 형편에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당장 청나라만 해도 오히려 서구 국가들에게 당해서 제 몸도 못 가누고 있으니까요.”
“······.”
“서구 열강 국가들은 어떠할는지요. 미리견국 즉, 미국과 영길리국, 불란서국과 수교가 잘 되면 다행이겠으나 왜국은 우리보다 먼저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서구 국가의 입장으로서는 굳이 일본과 척을 지며 우리를 도우려 할 이유가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이어지는 태선의 말에 점점 이하응의 표정이 굳어지고 심각해졌다.
앉은뱅이 의자의 팔걸이 장식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처음 태선을 만날 때는 여유로웠으나 지금은 템포가 짧아져 강박적인 행동 장애로 보일 정도였다.
‘이거 너무 몰아세웠나. 아무래도 이미 국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장난 아닐 텐데.’
자칫 멘탈 수습을 잘못해서 폭주하다 흥선대원군이 권력 보전을 못하게 되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곤란하다.
“하지만 늦지 않았습니다.”
슬슬 당근을 줘서 멘탈도 챙겨줘야겠다.
“지금 미국, 영길리국, 불란서국에서 먼저 화친을 맺고자 사신을 보내오지 않았는지요. 하물며 그들의 문물과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도 제가 중재하면 왜국보다 더 빠르고 월등히 좋은 조건으로 가능합니다.”
“정녕 자네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겐가?”
“힘이 있다기보다······. 운이 따라줘서 서구 국가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 그들의 힘을 빌릴 수기 있게 된 덕분이라 해야겠지요.”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 힘이 있는 건 맞는데, 그렇게 말하면 흥선대원군 성격에 자신을 지독하게도 경계하게 될 거다.
‘그러면 풀릴 일도 잘 안 풀리게 되겠지.’
조선에서 자신의 포지션은 결코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권력자들을 위협할 수 있는 형태로 비추어져서는 안 된다.
해외에 나가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그걸 바탕으로 도움을 주려고 하는 입장, 그렇지만 권력에 위협 되지 않는, 딱 그런 정도로 보여야 한다.
“아울러 국방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서구의 기술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잘 운용한다면 과거 요순 시대 못지않게 풍족하고 평안한 삶을 구리게 될 겁니다.”
스윽───!
태선은 말을 맺으며 가지고 들어온 비단 보자기로 감싼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궁금하기는 했었네만 무언가?”
이하응이 물었다.
뿐만 아니라 박규수나 오경석도 흥미를 보였다.
“대원위 대감께서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한 약소한 물건입니다.”
권력자를 찾아오는 상인이 뇌물을 가져오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었다.
아니, 상인뿐만 아니라 뭔가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그렇기 마련이다.
태선도 삼국과 화친 중재를 위해서 성의 표현이라도 하려고 금괴나 은괴를 바리바리 싸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음, 태선이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하긴 7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고 태선도 서구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일을 겪고 처세도 해야 했을 테니 성격이 조금은 바뀌었나보구먼.’
오경석과 박규수가 제각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정작 비단 보자기를 풀어본 이하응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
뇌물을 가져오면 청렴하게 내치고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느 정치인이 그러하듯 비자금을 위해 은밀하게 챙겨두면 챙겨뒀지.
자신들이 있으니 금괴였으면 대놓고 좋아하지 못 해도 괜히 헛기침을 하거나 하면서 반응이 있긴 했을 텐데.
“흠, 이건 화책이로군.”
이내 위로 올린 이하응의 손에는 하드커버지로 정교하게 편철한 사진첩이 들려져 있었다.
“그림과 달리 사진이라 하여 사물이나 인물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담아내는 기술이 있는데 미국의 도시, 사람들, 생활 심지어 총포류, 자동차, 군함 등을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태선의 말에 순간 이하응의 눈썹이 움찔했다.
사진에 대해서는 이미 오경석에게 들어봤다.
다만 그 사진으로 무기까지 찍었다니.
어떤 경우에는 적국에 그런 정보를 얻으려 일부러 세작을 보내기도 알아서 먼저 구해왔다.
물론 실제로는 그 정도로 엄청난 기밀 자료는 아니겠지만 서구에 대해서 아예 지식이 없을 뿐더러 나가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었다.
팔락──팔라락───!
어느새 흥선대원군은 사진을 넘기며 몇 장 보더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자네 성의를 봐서 서책은 물리지 않도록 하지.”
다만 아무리 정치 100단 이하응이라도 충격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무덤덤하려 애쓰지만 순간 태선은 포착했다.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네.’
하기야 조선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비록 사진이라 할지언정 뉴욕 사진을 처음으로 봤다. 그것도 번화한 곳만 골라서 찍은 사진들을.
충격 받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그런 감정이 비친 건 그야말로 찰나여서 태선으로서도 자신이 맞게 봤나 싶었지만 이어지는 이하응의 반응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성의를 봐서 사진첩을 챙겨두겠다고 한 것도 그랬지만.
“그럼 내일은 나나 자네나 주상과 함께 서양 국가의 대사를 만나야 하니 오늘은 그만 가보도록 하게나.”
가보라고 한다.
“환재, 원거. 자네들도 오늘 고생했네. 이만 물러가보게.”
거기에 오경석과 박규수까지 물린다.
자신을 불렀으니 으레 먼저 보낸 뒤에 어떠했는지 의견을 나누며 떠볼 법도 하건만.
‘생각보다 충격이 더 컸던 모양이네. 갑자기 영화 매트릭스 생각나네.’
빨간 약과 파란 약. 어찌 본다면 지금 자신은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한 것처럼, 흥선대원군에게 진실을 보는 빨간 약을 먹인 것이다.
물론 농도를 많이 희석한 약이지만 머리가 좋으면 이 정도만으로도 추론이 될 거다.
‘혼자 조선의 미래와 서구의 문명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그렇다면 그 시간을 줘야지.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태선은 오경석과 박규수와 운현궁을 나섰다.
***
흥선대원군의 고민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원래 그 다음날로 잡혔던 고종과 영미프 삼국 대사 접견 일정이 며칠 더 미뤄졌다.
그 날이 되자 또 다음날로 미뤄졌고.
“일이 잘못된 거 아닌가?”
카울리 백작이나 라부르스트 대사 그리고 존 로저스 대령이 날이 지날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대사님들을 가두고 삼엄하게 감시했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했겠습니까.”
“음, 하긴 그렇긴 하군. 나간다고 하면 사람이 붙긴 하지만 제지하지는 않으니.”
“그, 붙는 사람도 감시보다 안내를 해주려 그런 듯 했습니다.”
참고로 안내로 붙은 이들은 오경석의 밑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었다.
덕분에 간단한 소통이 가능했는데 대사들은 아주 멀리까지 나가보지는 못했지만, 한성부 정도는 여기저기 보기도 했었다.
“거기에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을 꾸몄다면 대사님들을 호위한 병사들이 한데 있도록 두지도 않았을 테고요.”
“자네 말을 들으니 맞군. 이거야 전권대사답지 않게 너무 초조하게 군 것 같아 민망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페쇄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심사숙고할 부분이 있을 텐데 말이지요.”
이들을 안심시키느라 태선도 나름 애를 썼는데 다행히 말이 잘 먹혀들어서 대사들도 이내 안심하며 궁궐에서 새로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흥선대원군, 고민을 해도 너무 오래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사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태선으로서도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고심 끝에 악수 둔다는 바둑 명언처럼, 안 좋은 쪽으로 사고회로를 돌리다가 서구의 발전된 문명을 위협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야말로 최악인데.
‘더 연장되면 다시 흥선대원군을 만나봐야 되겠어.’
다행히 태선은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는 접견 약속이 미루어지지 않았고 예정대로 태선은 영미프 대사들과 함께 궁에 가서 고종을 만났다.
경복궁은 중건중이기에 접견 장소는 창덕궁 정전이었고 대소신료들이 좌우로 도열하고 그 앞으로 삼국 대사가 와서 친서를 건네주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이미 전달 받아 내용을 봤겠지만.’
어린 고종이 아니라 장관급 신하들이.
물론 흥선대원군도 당연히 봤을 터였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대원군이기에 아무 직함이 없지만 어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적인 정치가 교과서처럼 그대로 행해지던가.
지금도 도승지를 통해서 고종에게 친서가 건네지는 걸 흥선대원군은 가장 앞쪽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
이제 열세 살이 된 소년 왕은 친서를 건네받고 읽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시선은 고개를 살짝 돌리면 보이는 제 아비, 알아서 무슨 일이든 해결해주는 흥선대원군에게 향했다.
“그, 어찌할까요?”
아마 미루고 무리던 접견이 성사된 걸 보면 이미 말이 다 정해져 있겠지만 겉치레라도 흥선대원군이 간하려 입을 열었다.
“바다 건너 손님이 와서 수교를 맺기 청하고, 이미 청나라도 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을진대 조선 역시 군자의 예로 저들과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전하께서 이를 헤아려주시옵소서.”
실세 흥선대원군이 이렇게 말했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이후 남은 일은 스무스하게 진행됐다.
그건 접견 이후 공식적으로 수교를 맺기 위한 실무자들의 회의도 다르지 않았다.
“수교 일자가 잡혔네. 대사들에게도 이미 통보가 갈 테고 자네에게 먼저 말해주는 것일세. 영의정 조두순 대감이 판중추부사로······.”
접견 이후 태평관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박규수와 오경석이 찾아와서 말해주었다.
영미프 대표는 당연히 각각 대사가 했는데, 베이징에 있는 앤슨 벌링게임도 수교 절차를 위해서 USS콜로라도호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
사실 여기까지는 오는 데만 하더라도 물밑에서 화친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고 각각 조선말,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보여주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고 반복을 거듭했다.
그런 끝에 나온 최종 화친 조약서를 조인할 장소는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으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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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서를 조인한 뒤 판중추부사는 한성으로 돌아갔다.
“그럼 나는 일단 베이징으로 돌아가보겠네.”
카울리 백작의 말이었다. 애초에 한성 태평관에 묵다가 여기까지 와서 수교를 맺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베이징에 돌아가봐야 하기에 배가 정박해있는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잡은 것이었다.
“나도 돌아가보지. 본국에 결과를 보내고 청나라 관련으로 남은 일을 처리하고 답변을 받아서 돌아오겠네. 이미 본국에서 이야기가 다 됐지만 주조선 대사는 내가 될 듯 하거든.”
라부르스트 역시 같은 말을 남기고 라 나폴레옹 호를 타고 떠나갔다.
애초에 주청대사인 앤슨 벌링게임도 베이징에 돌아가야 하는 건 당연했지만 뜻밖에 존 로저스 대령과 USS콜로라도 호의 승무원들은 조선에 남았다.
“벌링게임 대사님을 호위해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신가요?”
태선의 물음에 존 로저스는 시가를 물고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베이징에 돌아가는 배가 세 척이나 되니까요. 그중 하나는 영국 배고 더구나 또 하나는 킴 사장님의 모닝 글로리 호가 아닌지요. 제가 굳이 호위해드릴 필요는 없을 듯싶군요.”
하긴 HMS세라피스 호가 되었든 라 나폴레옹 호가 됐든 황해를 건너 베이징에 갈 때까지 위협은 없을 터다.
더구나 청나라에서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 태선의 배인 모닝 글로리호도 같이 청나라로 갈 예정이었다.
앤슨 벌링게임도 기왕 탈 거라면 같은 국적인 미국 배를 타겠다며 모닝 글로리호에 승선해있었다.
“솔직히 이미 수교가 맺어진 마당에 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미국인 보호입니다. 특히 그 미국인이 킴 사장님이라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이어서 덧붙이는 존 로저스 대령의 말.
이대로 자신도 가버리면 조선에는 그야말로 태선 일행만 남는데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계속 조선에 있겠다는 것이었다.
‘뭐 든든하긴 하네.’
전생과 현상 통틀어 자신의 조국이자 고국에 대고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지금 조선은 뉴욕이나 런던에 비해 문명화가 덜 된 것도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며 미국과 달리 자신을 지킬 사병인 아멕스 경비대도 없는 실정이었다.
아울러 시간이 점점 더 지날수록 조선의 대신들도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미국의 병사들이 지금 조선의 병사들과 클래스가 어떻게 다른지를 말이야.’
즉 이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에 주둔하고 있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고 때에 따라서는 압박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수교가 맺어진 마당에 자신의 정치적 수완이나 동원할 수 있는 압도적 기술력과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낼 터였다.
‘아니, 시너지를 내게끔 만들어야 해.’
수교라는 큰 고비는 이제 넘었으니 할 수 있다.
‘그걸 위해 왔으니까.’
조약 조인을 마치고 둘만 남은 연무대 끝자락에서 먼 바다를 보며 존 로저스와 나란히 선 태선은 다짐했다.
이제 진짜로 시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