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2
002 그를 기다리며(2)
“오, 태선이 돌아왔었슴메?”
태선이 뭔가 말하려는지 막 입을 열었는데 갑자기 웬 곰 한 마리가···아니, 덩치 큰 남자가 들어왔다.
태선에게는 매형, 즉 누나의 남편인 박말복이었다.
“너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하여간 보이지 않간.”
너털 웃는 얼굴이 자못 순박해보였지만 방으로 들어오자.
‘와, 진짜 크네. 내가 빙의한 몸도 덩치 작은 건 아닌데··· 뭐가 이렇게 커.’
안그래도 커다란 덩치가 방 안을 채우니, 곰 한 마리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도 키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었다.
몸통이며 팔뚝이며 허벅지는 근육으로 터질 것 같은 게 위압감에 절로 숨이 막힐 지경.
거기에 백정이라 상투를 못 틀었다지만, 얼굴을 뒤덮은 턱수염이 무슨 장비가 삼국지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다.
‘···이 몸 원래 주인 놈의 깡다구도 어지간했네. 저런 매형이 자주 타일렀는데도 계속 노름을 했다고?’
하기야 낮에 동생 태경이 빚쟁이들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깡다구만 봐도 보통이 아니기는 했었다.
으레 평안도나 함경도 출신 사람들은 성격이 억세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던가.
그리고 태선은 자신 역시 그 깡다구 센 성격을 실감했다.
‘만약에 전생에 이런 사람 봤으면 고개 숙이고 지나갔을 거 같은데 아무리 아는 사이라 해도 그런 기분은 안 드네.’
아무래도 집안 체질 자체가 호걸에 담이 센 모양이다.
아무튼 이건 좋다. 타고난 성격이 깡다구 좋다는 건 훌륭한 무기가 되기에.
그걸 조율할 적절한 지성만 있으면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태선은 그런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
“이 사람, 네래 찾으러 돌아다녔던 기야.”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때 누나 태희가 말을 이었다.
“빚쟁이들 쥐어준 돈도 이 사람이 고기 팔아 번 돈 아니간. 민해서 그러는 게 아이야. 너도 정신 차리야 해.”
“허허, 너무 그러지 말라. 처남도 녹살나지 않았간. 곁내지 말고 궁진하니 뭐라도 먹디.”
누나가 짐짓 다그치자 매형 박말복이 허허 웃으며 중재를 서주었다.
다만 태선은 과거의 기억과 더불어 일찌감치 눈치챘다.
‘날 커버쳐주려고 매형이 화 내기 전에 먼저 저러는구나. 매형도 사람 좋아서 대충 저렇게 넘어가주는 거고.’
“아이, 이참에 확실히 대답을 받아내야겠슴메.”
누나 태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슬슬 자신도 한 마디쯤 대답을 해야 했다.
물론 할 말은 있었다. 입 다물고 있던 건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막상 입 밖으로 내려니 평안도 사투리가 어색해서였다.
‘그렇지만 계속 입 닫고 살 수는 없잖아.’
더구나 오래지 않아 의주를 떠날 터라 평안도 말씨 쓰는 건 길지 않을 터.
“확실히 답하라. 니 노름판 빌빌대는······.”
“알았어. 그렇게 하···겠소웨.”
태선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널래 올에···응?”
그 대답은 예상했던 것보다 극적이었다.
이어서 말하다 누나 태희가 멈칫하며 다시 봤다.
“···방금 뭐라고 했슴메?”
놀란 건 누나뿐 아니라 매형 박말복이나 동생 태경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절대 나올 리가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가지 노름 그만두갔다 했어.”
“참말이가?”
다시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기색과 함께 누나가 감동해서 울먹거렸다.
매형 박말복과 동생 태경도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가운데 태선은 내친 김에 덧붙였다.
“그리고 저번에 누나가 날래 매형더러 백정일 배워보라 하지 않간. 송구 매형이 마음 있으면 백정일 배워보갔는데.”
“처남, 아이 태선이. 그렇게 무리할 것까지 없어야. 무슨 바람이 분 기래?”
갑작스러운 변화가 자못 걱정스러웠는지 박말복이 조심스레 묻자 태선은 오히려 웃어보였다.
“정신 차린기디요. 숱한 사고 마이 치지 않았간. 내도 사람 구실을 해야디요.”
태선의 한 마디에 분위기가 밝아졌다.
“됐으야. 인제야 됐으야. 울 태선이가 정신을 차렸슴메.”
“형님메, 아츰에 달리 말하기 없소웨.”
동생을 보며 당연히 그럴 거라는 듯 태선은 미소 띤 얼굴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다만 노름판에 발 끊는 거야 당연하고 백정일 배우려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였다.
‘조선에서야 백정이 천대 받지만 서양은 다르거든.’
도축이 힘든 일이라는 건 동양이든 서양이든 같다. 다만 서양에서는 하나의 기술로 대우를 받는다.
좀 더 확장하자면 고기를 잘라서 나누어주는 건 그 무리의 리더라는 뜻.
그렇기에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존중 받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미국 건너가서 무난하게 정착하려면 기술 하나쯤은 제대로 익혀둬야 편해.’
이후 석유왕이 되기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거나 하는 테크트리를 위해서도.
하지만 그 외에 준비할 것도 많았다.
‘당장 급한 건 조선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일이려나. 조선시대에는 뱃길을 막아놔서 육로로 청나라에 갈 수밖에 없어.’
의주는 국경이라 사냥이나 약초를 채집하러 얼마간 넘어갔다 돌아오는 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예 넘어가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밀입국한 사실을 청나라에 들켜도 큰일이고 조선에 들켰다간 훨씬 큰일이었다.
얼핏 예전에 조선 관련 다큐멘터리 자료를 조사하다 밀입국하려는 이들을 발견해서 사형시켰다는 기록을 본 태선이었다.
‘하기야 자기 나라 국민이 외국에 도망치는 걸 그냥 보고 있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개가 남는다.
철저하게 조사하고 준비해서 완벽하게 밀입국하거나.
혹은 합법 루트로 청나라에 입국하거나.
당연히 할 수 있으면 후자가 좋았고 그것은 매년 몇 차례씩 조선에서 청나라로 보내는 연행사신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860년과 1861년에 그 양반이 청나라에 연행사신으로 간다는 사실이 나한테 천운이 아닐 수 없네.’
조선시대 말기 북학파에서 대한제국 개혁파에 이르는 이들을 자기집 사랑방을 요람 삼아서 키워낸 인물.
혹여 다른 양반이라면 자칫 자신이 청나라로 나갈 뜻을 드러내보였다가 경을 칠 리스크가 높지만 그 양반이라면 잘만 판을 짜면 설득할 수 있었다.
‘개화파의 시조···박규수.’
그의 조부인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에서 받은 신선한 자극은 손자인 그에게도 진작 전해졌을 터였다.
그리고 이 시기 청나라는 두 번에 걸친 아편전쟁으로 털리고 상하이에는 열강의 조계지가 설정되는 등 중화 질서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거기에 심지어 수도 북경 옆에는 열강의 텐진령까지 있다.
‘조선 유학자 입장에서는 그 실상을 맞닥트리면 어지간히도 충격이 아닐 수 없겠지.’
반응은 그걸 부정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실제로 부정하는 쪽이 주류이기에 태선이 아는 역사에서는 조선이 도태되고 개혁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다만 박규수는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연구한 쪽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적당히 버무려 말하며 가치를 입증하면 어떻게든 그를 구슬릴 수 있을 듯싶었다.
‘아니, 있을 듯싶은 게 아니라 해야만 해. 거기서부터 막히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그 외에도 준비할 일이 이것저것 많다.
자신이 아는 이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정비하거나 체력을 키운다거나.
“형니메,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소웨?”
그때 동생 태경이 불렀다. 그제야 태선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입술을 뗐다.
“아이, 기냥. 것보다 날과 같이했으면 하는 일 있슴메. 한번 들어보간?”
***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녀석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진부할 정도로 망나니란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사극 보면 흔히 나오는 그런 치들 있지 않은가.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여기저기 빚을 지고 다니고······.
것도 모자라 보살펴주는 가족에게 오히려 짜증 내고 패악질이나 일삼는 인간 말종 쓰레기.
‘그런 주제에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 호감도 어렵잖게 얻었던 것을 보면 잘생긴 거 하나만은 장점인 것도 같다만.’
사실 그 잘생긴 거 하나가 엄청난 강점이었다.
문제는 그 장점을 모조리 다 까먹을 정도로 구제 불능의 망나니였다는 것.
“허허, 태서이 이제 곧잘 하는구만 기래.”
다만 노름을 그만둔 이후 변했다. 루틴이 생겼으며 그 첫 번째는 백정 일을 배우는 것이었다.
“이만치 자르면 되갓시요?”
조선시대 백정은 천한 직업이었던지라 과거 태선은 매형 박말복을 매우 무시했거늘.
“옳지. 그렇게만 하라.”
써거덕───!
지금은 무시하기는커녕 박말복에게 백정 일 배운지 벌써 몇 달째였다.
“태서이 배움이 이렇게 빠르다니 내가 다 흐뭇하드랬어.”
“매형 덕분이소웨. 내 처음에 고기 잘못 비져내 눅지게 판 게 많지 않았슴메.”
“허허, 덕분에 찔게로 고기 숱하게 먹지 않간. 하여간 태선이 도우니 일 끝나는 기 날래지는디, 남은 시간 민한 것 같아서 말째구만 기래.”
“시간이 남으면 좋지 않슴메. 이제 날과 운동하러 가읍세다. 같이 하기로 하지 않았슴메.”
다시는 노름판에 가지 않는 대신 태선이 가족들에게 같이 하자고 요구한 것이 두 번째 루틴이었다.
타지에 가서 무시 받지 않으려면 외모가 중요하다.
그 외모란 비단 지금 태선이 갖춘 잘생긴 얼굴만 뜻하는 건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피지컬!
‘뭘 하든 체력이 좋아야 해. 게다가 미국 가서 인종 차별 덜 받으려면 몸을 만들어야 하고.’
전생하기 전의 태선은 나름 운동을 열심히 했고 그때 헬스 지식을 토대로 매형과 더불어 근육을 가꾸었다.
그러다 동생 태경이 오면 끼워주었다.
그리고 사실 운동 루틴에는 헬스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형님메, 그 걸음걸이는 암만 봐도 미추과이 같소웨다.”
“태겨이 널과 함부로 말하지 말라. 내래 민하니 있다 주먹에 맞고 디실에 엎어져 간신히 깨엇드랬어.”
태선은 전생에 복싱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 경험과 가꾼 몸으로 하는 복싱 연습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하루 중 일과였다.
‘기왕 몸을 만들 거면 잘 쓸 줄도 알아야겠지.’
하물며 복싱은 서양권에서는 고대 올림픽부터 나올 정도로 역사가 오랜 종목이었다.
즉 복싱은 싸움의 기술인 동시에 서로 힘을 겨루는 일종의 스포츠.
하물며 최초의 현대식 복싱 경기가 1849년에 있었기에 이맘쯤이면 이미 서양에서는 현대식 복싱의 규격이 잡히고 경기가 열리고 있다.
그러한 복싱 기술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당장 청나라에 갔을 때 서양인들과 짧은 시일 내에 친분을 다질 훌륭한 무기가 되어줄 터였다.
“태서이 늘상 노름판만 다니는줄 알았디만 이런 솜씨는 어드러케 배웠던 기래?”
“뭐 노름판서 겸사겸사 배운 기디요.”
이따금 박말복이나 태경이 물으면 노름판에서 배웠다면서 적당히 둘러댔다.
저녁이 되면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루틴의 시작이었다.
중국···아니, 이 시대에는 청나라말이다.
이번에는 누나 태희도 합류시켜서 청나라말을 가르쳐주었다.
“네레 뗏놈들 말은 어드러케 배웠슴메? 늘상 노름판 싸돌아다니느라 바쁜 아이가.”
부부는 닮는다더니 박말복과 비슷한 질문을 하는 누나에게 태선은 비슷하게 답하며 디테일만 덧붙였다.
“압록강 넘어 노름판 낀 적 더러 있었는디 거기서 뗏국놈들한테 배웠드랬어.”
실은 전생에 방송국 PD를 하면서 배웠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마지막으로 루틴은 아니어도 태선이 신경 쓴 또 하나는 정보 수집이었다.
상인에게 바다 건너 소식을 모으고 보부상을 통해서는 한양 소식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 보부상을 통해 태선은 소식을 들었다.
“올해도 조정에서 청나라로 사신을 보낸다는구먼.”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