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20
020 채권전쟁(1)
새먼 포틀랜드 체이스에게 오늘은 힘든 하루였다.
아니,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힘든 나날의 연속이다.
“지금쯤 끝날 줄 알았거늘 전쟁이 이렇게 길어지다니.”
다만 오늘은 특히 회의가 길어졌고 저녁 느즈막해서야 겨우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집무실을 나와서도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더구나 당연히 우리 쪽이 우세할 줄 알았는데 군단급이 처음으로 제대로 붙은 불런 전투의 패배가 너무 뼈아픕니다.”
자신이 중얼거린 말에 대답해주는 중년 남자.
사이먼 캐머런 다음 전쟁부 장관으로 내정된 에드윈 스탠튼이 마차 옆자리에 탄 것만 봐도 그랬다.
급히 의논할 것이 있어서 집으로 같이 데려가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실수였던 것일까.
“특히 남부 쪽의 로버트 리 장군이 난적입니다. 그를 우리 쪽으로 어떻게 해서든 끌어들었어야 했는데.”
“······.”
“그러고 보니 지난 11월에 맥클라렌 소장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죠. 과연 그가 로버트 리의 대항마가 될지 모르겠네요.”
“······.”
“의용군으로 지원한 사람 중 대령으로 임관된 그랜트라는 사내가 있는데 그 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열띠게 말하는 건 물론 이 나라를 걱정해서 그럴 것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쉴 시간이라도 주고 좀 떠들던가···.
혼잣말 한마디 했다고 그게 몇 마디로 돌아오니 이거야 참.
“게다가 뉴욕 은행들이 채권 매입을 거부했다죠. 전황이 이러하거늘······.”
“······.”
“남부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채권을 매입해준답니다. 하기야 목화를 팔고 있으니 당연히 저들로서는 그렇겠죠.”
“······.”
“해상을 봉쇄해야 합니다!”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지 않아도 지금 전황 문제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제일 난감하게 되어버린 채권 문제까지 언급을 한다.
기실 에드윈과 더 논의해야 하는 논제가 이거였다.
에드윈 스탠튼의 열렬한 애국심 덕분에 저택에 도착해서 마차에서 내릴 때 재무장관 새먼 포틀랜드 체이스의 얼굴빛은 파랗다 못해 하얘질 지경이었다.
이제부터는 진짜로 논의를 이어가야 하니 머리가 더 지끈거리겠구나 싶었는데.
“장관님, 만나려는 분들이 와있습니다.”
“만나려는 사람들이라고?”
뜻밖에 집사가 와서 이렇게 고했다.
“예, 개리슨 씨인데 몇 년 전까지 캘리포니아 시장을 하셨고 지금은 사업을 하신답니다.”
“그런가? 들어본 이름이긴 하구먼. 헌데 그런 이가 왜 나를 찾아왔을까.”
체이스 재무장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에드윈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사업을 한다니 혹시 기부금 내서 전비 지원이라도 해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쯧, 뉴욕 은행들만 봐도 알지 않은가. 장사하는 이는 손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네.”
체이스는 작게 한숨 짓고는 집사에게 다시 물었다.
“사람들이라고 했지. 또 다른 손님이 있나?”
“두 사람이 더 있는데 샬롯 푸어 로렌스라는 아가씨입니다. 듣자하니 에녹 푸어 장군 후손이라는군요.”
“에녹 푸어 장군이라면 알지. 훌륭한 집안의 아가씨로군. 한 사람은 또 누군가?”
집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태선 김이라는 동양인 청년인데 아시아의 조선에서 왔다고 합니다.”
“조선? 아시아라고 그랬나. 조선이라니 들어본 것도 같은데.”
체이스는 면도를 못한 탓에 수염이 다소 꺼끌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래, 벌링게임이 청나라에 대해 말할 때 들어본 것 같군. 아무튼 개리슨 씨에, 독립전쟁 장군의 후손의 동행만 해도 생소하거늘 거기에 동양인 청년이라···묘한 조합이군. 중한 용무라도 있다던가?”
기실 손님이라 해서 아무나 집에 들이는 건 말이 안 됐다. 더구나 재무장관이었다.
집사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기에 집에 들여준 것일 터.
“킴이라는 조선 청년이 추천서를 가져왔습니다. 윌리엄 랠스턴 씨와 제이크 벌링게임 씨의 추천서였습니다.”
“오, 그래? 좀 흥미가 도는군.”
“지금 객실에서 부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기별을 넣어둘까요?”
“그렇게 해주게나. 내 정비를 하고 금방 가도록 하지.”
고민할 것 없이 체이스는 대답했다.
에드윈과 전쟁에 대해서 논의하기 전에 뭐가 됐든 손님들과 다른 주제로 이야기 나누면 리프레쉬가 되리라고 생각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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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체이스는 손님들을 맞을 채비를 하고서 에드윈과 함께 객실로 갔다.
이미 기별을 넣어둔 터라 접객실에서 아내와 담소 나누며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코닐리우스 킹스랜드 개리슨입니다. 체이스 재무장관님 명성은 익히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로 반갑습니다.”
넉살 좋은 나이 많은 쪽이 예상대로 개리슨이었다.
과연 연륜 있는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보이는데 그는 옆에 아가씨도 소개했다.
“이 숙녀 분은 샬롯 푸어 로렌스입니다.”
샬롯하고도 인사를 나누고.
“그리고 이 청년은 태선 김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체이스 재무장관님. 태선 김입니다.”
이어서 개리슨이 옆에 있는 동양인 청년을 소개해줬는데 체이스는 뜻밖에 유창한 영어에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 영어를 잘하는군. 동양인이 영어를 이렇게 잘하다니 어디서 배웠는가?”
“사연이 길지만 선교사분께 배웠습니다. 이후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싶어 미국에 왔고 여러 좋은 인연을 만난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습니다.”
청산유수처럼 나오는 말에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허허 웃고 말았다.
그저 자기소개나 할 정도로 배운 것이 아니라 제대로였다.
더불어 적당히 격조 있으면서도 점잖고, 그러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는 묘한 호감까지 주었다.
“이건 친구가 된 제이크 벌링게임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저를 많이 도와주신 랠스턴 씨가 쓴 추천서입니다.”
태선이 품속에서 추천서를 꺼내서 체이스에게 건넸다.
제이크가 써준 두 번째 추천서의 대상자는 바로 재무장관 체이스였다.
그렇기에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때 랠스턴에게도 부탁해 체이스에게 추천서를 써달랬다.
좋은 것보다 좋은 것은 좋은 것 두 개 아니겠나.
“놀랍구먼. 이게 정말인가? 랠스턴 씨가 세운 유니온 뱅크의 파트너라고?”
“예, 고맙게도 랠스턴 씨께서 좋은 제안을 해주셨지요.”
태선은 자못 겸손히 답했다. 사실 이 타이밍에서는 빡세게 자기 어필을 꽂아줘야 제맛이다.
그리고 그걸 위한 두 명의 지원군이었다.
“그뿐 아니라 얼마 전 지역 은행을 인수해서 유니온 은행 동부점을 설립했는데 그 과정에서 태선이 큰 역할을 했어요.”
“제가 동부점 지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만 실제로는 태선 이 친구가 지점장 대리로 활동할 예정입니다. 영어를 잘하는 건 기본이고 수완이나 정세를 보는 안목이나 뭔가를 배우는 속도가 정말로 놀라운 친구입니다.”
원 투 스트레이트처럼 둘의 어시스트가 좋다.
“듣고도 믿기질 않는군. 잠시 정리해보면 말일세. 제이크의 추천서를 먼저 받고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간 것 아닌가.”
“예.”
“그다음 샌프란시스코에서 랠스턴을 만났고 불과 거기에 체류하는 몇 달 동안 은행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파트너가 됐다는 겐가.”
솔직히 당사자의 면전이라 대놓고 말하지 못해서 그렇지 갓 미국에 왔을 때는 그야말로 개털이었을 터였다.
제이크의 추천서만 받았으면 자신도 그리 생각하고 적당히 생활이나 할 수 있을 정도의 후원이나 해줬을 테니까.
그건 샌프란시스코의 유지인 윌리엄 채프먼 랠스턴이란 자도 그랬겠지.
하지만 몇 개월 뒤 그는 자신에게 직접 추천서를 써주었다. 심지어 파트너 계약을 체결해 동부점 은행을 맡길 정도로.
‘하기야 바다 건너 여기까지 왔으니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해도 안 되겠지만 풍기는 분위기도 범상치 않고 말이야.’
자못 기대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전쟁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흥미가 일면서 조금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이 자리가 끝나면 그 이야기는 질리도록 에드윈과 논의해야 할 텐데 잠시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그래, 이 나라에 대해서 배우려고 왔다고 했지. 궁금한 게 있으면 어디 물어보게나.”
자기가 물어보라고 해놓고는 어째 자기가 더 기대하는 느낌.
“저기···체이스 장관님?”
다만 체이스에게 말을 건 사람은 태선이 아니라 옆에 있던 에드윈이었다.
“저와 의논하실 급한 안건이 있지 않은지요. 지금 당장 뉴욕 은행놈들이 채권 매입을 거절한 판국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우국충정이 지나치다 못해 너무 세심하고 조심스럽기까지 한 에드윈이 치고 들어왔다.
“먼 길 온 손님들일세. 특히 태선 킴이라고 했나. 이 친구는 무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바다 건너서 왔고 말이야.”
“예,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체이스 장관님 심정도 이해는 갑니다. 저도 저 청년에 대해서 궁금해졌으니까요. 하지만! 말슴드렸듯 우리에겐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기왕 멀리서 왔는데 조금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전장에서는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역시나 두어 마디 했더니 그 몇 배로 받아치며 심지어 열변을 토해내는 에드윈이었다.
심지어 얼굴은 새빨개져서 터질 것 같았다.
“체이스 재무장관님! 저들도 이해해줄 겁니다.”
만약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면 저 열렬한 표정과 말투로 빨갛게 차르를 찬양하지 않았을까.
“하아, 알겠네. 알았어.”
결국 에드윈의 말이 다 정론이기는 해서 체이스도 어쩔 수 없이 그러고마 답하려는데 그때 태선이 입을 열었다.
“혹시 급한 논의가 방금 말씀하신 국채에 관한 것인지요?”
순간 체이스나 에드윈은 흠칫하며 태선을 봤다.
분명 언뜻 지나가면서 언급하기로 에드윈이 채권이 어쩌고 하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그 말이 태선의 입에서 나오다니.
둘이 서로 쳐다보며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태선은 자못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전비라고 해야겠지요. 방금 전 말씀하셨듯 지금은 전쟁 중이고,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급히 국채 발행이나 매입에 대해 의회에서 통과시킨 것이니까요. 은행들은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유감입니다만.”
“···그, 그렇지.”
묘한 일이었다. 체이스나 에드윈이나 얼떨결에 대답하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대화는 이어지게 되었다.
아울러 그 대화가 에드윈이 요구대로 전쟁에 대한 논의를 겸하게 되었다.
“계속 서서 이야기할 것도 아니니 일단 앉으시지요. 그러고 보니 아직 그쪽에 계신 분은 소개를 못 받았군요.”
“아, 그렇군. 나는 에드윈 스탠튼이라고 한다네. 반갑네.”
그제야 에드윈이 자신을 소개하고는 태선, 개리슨, 샬롯과 차례로 인사했다.
“일단 앉으시죠. 방금 말씀하셨듯 쉽게 끝날 주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그렇지. 체이스 장관님부터 어서 앉으시지요.”
“어어, 그럼세. 자네도 앉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개리슨이나 샬롯은 애초에 태선과 한 배를 탄 같은 편이니 그렇다 치고.
체이스 재무장관이나 차기 전쟁장관인 에드윈은 어느새 이미 태선에게 말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