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30
030 밴더빌트가(1)
“샘, 이 파란색 튜브는 이쯤 놓으면 괜찮겠죠?”
“넵! 아, 하는 김에 세 번째 층의 구멍에 연결해서 밸브도 잠가주실래요?”
이곳은 위탁 판매 명목으로 매입한 앨런타운 창고.
달칵──!
그 한쪽에 놓인 거대한 통에 태선은 파란색 튜브를 가져가서 연결하고는 밸브를 잠갔다.
“샘, 이 책들은 저기다 두면 되려나요?”
그 뒤로는 샬롯이 커다란 상자를 옮기며 물었다.
새무얼 앤드루스는 스패너로 기계 장치를 조립하다가 샬롯의 목소리를 듣자 얼른 일어섰다.
“에이, 샬롯 양은 그냥 쉬고 있어도 괜찮은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두 분이 짐 옮기고 있는 걸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얼마나 지루한지 아세요.”
“에이, 그래도 숙녀분께 힘을 쓰게 하는 건 신사가··· 헙!”
샬롯에게 가서 박스를 받아들자마자 순간 새뮤얼은 휘청이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괜찮아요, 샘?”
“넵, 덕분에···고마워요, 샬롯. 것보다 이게 왜 이렇게 무거워졌지? 안 무겁게 책을 나눠서 넣어뒀는데···.”
“너무 가벼워서 제가 하나로 합쳤는데···.”
물리적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순간 태선의 귀에는 새무얼 앤드루스의 신사로서 남자로서 자신감이 무참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 밖에 다른 박스에 있는 것들도 다시 나눠둘게요.”
미안해하면서도 병든 사슴이라도 보는 듯한 샬롯의 저 눈빛을 보라.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설마 그게 무거웠겠어요, 하하. 농담해봤던 겁니다.”
합쳐둔 박스를 다시 나눠두겠다는 말은 앤드루스를 두 번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켜주고 싶은 매력의 새뮤얼이 불쌍하지만, 여긴 상남자의 나라 미국이다.
심지어 서부 개척의 낭만도 이제 막바지일지언정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저 가냘픈 몸으로 석유 공장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용하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지능캐였다. 그럼에도 노가다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버텨왔으니 근성 있다고 보면 되려나.
“진짜로 안 나누셔도 됩니다. 제가 이래뵈도 매일 50개씩 푸쉬업도 꾸준히 합니다.”
다만 근성이 있는 것도 좋고 매너 챙기는 것도 좋은데 저건 너무 짠하잖아.
‘아아, 샘···제발 그만. 보는 내가 다 창피해요.’
그나마 샬롯이 눈치가 빠른 편이라서 다행이었다.
“알았어요, 그냥 둘게요.”
말리러 나오는 새뮤얼을 들여보낸 샬롯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빠르게 원래대로 짐을 나눠 담았다.
태선도 적당히 못 봐준 척 연기하며 하나둘씩 짐을 옮겼고, 엔지니어로서 소양이 있는 앤드루스가 하나둘 장치를 조립해나가면서 이사는 얼추 마무리되었다.
“후우, 힘들었네요.”
다만 마지막에 앤드루스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하는 소리에 태선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으응? 그게 힘들었다고?’
무거운 짐은 자신이 옮기고 가벼운 것만 줬다고 지적한다면 너무 비참하겠지.
심지어 앤드루스는 샬롯보다 가벼운 짐만 옮겼던데.
새뮤얼 앤드루스의 짐을 앨런태운의 창고로 옮겨주러 왔다가 태선은 예정에 없던 계획 한 가지를 추가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말도 있듯 뭘 하든 체력과 건강이 받쳐줘야 한다.
‘앞으로 특별 관리를 좀 해야겠군. 샘이 아프면 안 되니까.’
21세기 PT의 맛을 좀 보여줘야겠다.
“그나저나 이렇게 다 옮겨놓으니 너무 좋군요.”
그는 알고 있을까.
“일하랴, 짬내서 연구하랴 힘들었는데 연구만 해도 돈을 주신다니 태선을 만난 건 제게 행운입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태선.”
“걱정 마세요, 샘.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샘이 계속 연구할 수 있게 도울게요.”
육체노동에서는 해방됐어도 헬스 지옥에 빠지게 될 자신의 앞날을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식사해요.”
그때 샬롯이 창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식사라. 그러고 보니 오늘 바비큐를 먹는다고 했죠.”
“네, 장비는 창고에 있던 걸 쓰고 고기는 태선이랑 제가 오면서 샀죠.”
“이거 기대되네요. 기왕이면 술도 곁들이면서 한잔하면 최고일 텐데.”
앤드루스가 위스키를 꺼내자 샬롯이 제지했다.
“술은 절대로 안 돼요. 저랑 태선은 오후에 미팅이 있어요.”
“하하, 원래 술을 마셔야 친해지는 건데 아쉽지만 그럼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죠. 그건 그렇고 고기를 많이도 가져오셨네요.”
“아, 미리 이야기해주지 않았던가요. 점심 때 오기로 한 사람들이 있어요.”
태선은 바비큐 구울 세팅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제가 창고관리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했었죠?”
“네, 그렇다고 하셨죠. 사실 저로서도 창고 관리하시는 분이 따로 있는 게 좋고요.”
“그분들이 사업상 알게 된 분의 동생 내외거든요. 여기서 샘과 부대끼며 살 테니 이참에 인사하면 되겠네요.”
“아, 마침 저기 오고 있어요.”
샬롯이 손가락으로 창고로 들어오는 길 저편을 가리켰다.
창고 주변은 널찍널찍하고 시야도 트여있어 누가 오는지 잘 보였는데 짐마차 한 대가 털털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마차는 창고 앞에 다다랐고 거기서 두 중년 남자와 여성이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태선.”
시원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인상적인 구레나룻의 중년 남자는 잭 로건. 휴 잭맨을 닮은 의류회사 사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 성이 로건이네.
그리고 그 옆의 두 사람은,
“형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킴 씨.”
두 사람 중 일단 잭 로건과 비슷한 인상의 남자 쪽.
창고 앞에 세워둔 짐마차를 몰아온 그는 잭 로건의 동생인 피터 로건.
“어머, 듣던 대로 정말로 미남이시네. 그리고 아가씨는 샬롯 양이죠? 어쩜 이렇게 아리따운 숙녀가 다 있을까요.”
푸근한 인상의 여자는 피터 로건의 아내인 메리 로건이었다.
‘로건 씨의 말로는 둘 다 성실하다고 했지.’
뭐 애초에 창고관리인으로 고용할 거라 성실한 사람을 추천해달래서 추천한 것이니 당연히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사장이 도망쳤는데 공장을 지키던 의리파 남자의 형제이니 한 번 믿어볼 만했다.
‘더구나 마차도 몰 줄 알고, 전쟁 터지기 전에는 텍사스에서 창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고 했지.’
혼자 일한 게 아니라 다른 관리자에 노예도 제법 많던 곳이었는데 그걸 관리했단다.
관리자로서 스펙도 갖추었다는 뜻.
앞으로 창고도 계속 늘릴 것이고 직원도 더 채용할 테니, 일을 잘한다면 관리직으로 올릴 생각도 있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새뮤얼 앤드루스라고, 아마 같이 지내시게 될 겁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몸이 말랐대요. 고생을 많이 했나보다. 가여워라.”
“앞으로 다 잘 될 겁니다. 젊은이, 힘내요.”
“아니, 격려는 고마운데 저 생각하시는 그런 불쌍한 사람 아닙니다만··· 아무튼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를 다 나누고 나자 태선은 짐짓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식사하시죠. 제가 살던 나라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거든요. 이것도 인연이니 제가 고기를 구워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어머나, 태선이 직접 구워주시는 건가요?”
“디저트도 해드릴 겁니다.”
캠핑은 전생에도 즐겨하던 취미였다.
미국 본토에서 창고에 딸린 널찍한 정원에서 내츄럴 바비큐 파티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이건 못 참지.
하물며 의주에서 매형 박말복에게 도축과 정육까지 제대로 배운 터라 고기라면 준전문가 정도는 된다.
치이익── 후우우욱─!
사 온 고기를 태선이 부위에 따라서 더 맛나도록 손질하고 구워주었다.
“크, 너무 맛있군요. 술을 못 마신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만 태선은 캠핑이나 고기 굽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그냥 밥이나 먹자고 이러고 있는 건 또 아니었다.
‘샬롯이나 앤드루스나 내가 하려는 회사에 있어 핵심 인재들이야. 관계를 잘 다져둬야 해.’
로건 형제는 능력만 보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업할 때는 능력보다 중요한 게 인덕 아니겠는가.
하물며 의리와 은혜를 아는 사람은 뭘 해도 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모두가 끈끈해질 수 있는 절호의 시기였다.
‘그리고 다들, 먹는 만큼 일하셔야지. 크크큭.’
***
식사를 마친 뒤 피터 로건이 마차를 태워줘서 태선은 샬롯과 함께 역으로 갔다.
“개리슨은 먼저 가 있는댔죠?”
거기서 기차 타고 뉴욕에 돌아와서는 다시 택시 마차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네, 개리슨이 사전 작업을 잘해줘야 할 텐데요.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
“어머나, 태선도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네요.”
“당연하죠. 상대가 상대 아니겠습니까.”
“음, 하기야 그렇기는 하죠.”
그곳은 바로 밴더빌트가의 저택이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춘 곳에는 과연 으리으리한 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태선은 그 앞에서 넥타이를 바로 고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기별을 넣었다.
이내 사람이 나오자 태선은 정중히 말했다.
“개리슨 씨 소개로 밴더빌트 씨를 뵙기로 한 태선 킴입니다. 이쪽은 로렌스 양이고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오시죠.”
태선은 하인을 따라 저택 응접실로 갔다.
거기에는 개리슨이 커피를 마시다가 태선과 샬롯을 보고는 반갑게 맞았다.
“오, 드디어 왔군.”
그의 맞은편에는 개리슨과 비슷한 연배.
그리고 조금 더 어린 듯한 남자가 한 사람씩 있었다.
“오, 자네가 킴이구먼. 여기 개리슨 씨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나는 제이콥 핸드 밴더빌트라고 하네.”
“뉴욕에 오자마자 은행을 인수하고 국채 매입 건을 성사시키다니 수완이 대단하군. 나는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일세.”
태선은 두 사람과 연달아 악수를 나누었다.
“태선 킴이라고 합니다.”
초면이지만 이들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이 많은 제이콥이 아마 철도왕의 동생일 거고···.’
이어서 그보다 어린 쪽, 그럼에도 태선보다 열 살 이상은 되겠지만 어쨌든.
‘윌리엄 밴더빌트, 이쪽은 철도왕 아들이겠군.’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뒤를 이어 2대 철도왕쯤 되는 사람.
나중에 시카고, 미시간, 디트로이트, 캐나다 남부, 뉴욕을 달리는 철도의 회사가 이 사람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전생에 철도를 특집으로 한 다큐멘터리도 심도 있게 다룬 경험이 있는 태선이었다.
그렇기에 새록새록 기억난다.
‘지금쯤 뉴욕 인근에 토튼빌과 스테이플턴이었나. 거길 잇는 회사의 임원이었지, 아마?.’
이 사람의 업적 중 특이했던 두 가지.
하나는 1860년에 만들어진 회사의 노선이 21세기 자신이 다큐먼터리를 만들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노선이 섬을 연결하는 거라 페리선과 연동 시스템으로 운행됐다는 것이었다.
“개리슨 씨에게 먼저 들었습니다. 석유나 정유 쪽에 관심 있는데 우리 철도를 이용하고 싶다고요. 그러면 그냥 이용하면 되지 굳이 이렇게 따로 만날 필요는 없을 듯도 싶은데?”
그가 유들유들 웃는 얼굴로 하는 말치고는 묘하게 거슬린다.
“이봐, 조카. 벌써부터 그리 뾰족하게 말할 건 뭔가. 어쨌든 손님이라고.”
“하하, 그냥 무료하게 기다리느니 뭔가 이야기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이콥 밴더빌트의 중재에 그나마 물러서는 말씨로 사뭇 돌아섰지만, 그가 이번 협상에 어떤 마음가짐과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노골적인 갑이네. 굳이 이쪽 편의 따위 봐줄 생각 없는 갑.’
이 사람이 반대하면 협상은 힘들어진다.
하지만 못지않게 또 중요한 사실이 있으니.
나중에 윌리엄 밴더빌트가 회사의 부사장도 하고, 사장도 한대도, 어차피 그 회사들은 코넬리우스 밴더빌트가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2대님아, 철도왕인 네 아버지는 아직 현역이거든?’
본래 역사에서 록펠러가 밴더빌트에게 협상을 걸었을 때만큼 자신이 지금 거나하게 뭘 쥐고 있는 건 없다.
하지만 이 시기라서 걸어볼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지금 들어가십니다.”
그때 하인이 기별을 넣고 응접실 문이 열렸다.
끼이익──!
한 시대를 풍미한 거물. 철도왕의 별명을 가진 진짜 협상 상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