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52
052 조우(4)
전생에 PD로 살면서 태선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들이박아 버리고 싶은 때가 많았다.
사실 어디서 일하든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19세기로 전생해서도 느끼게 될 줄을 몰랐을 뿐이다.
“매각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꺼져주시죠.”
···라고, 하마터면 입밖으로 뱉을 뻔 했다.
‘페이튼 저스틴은 뉴욕증권거래소의 특별회원이고, 이 모임에 수많은 유력자를 초청할 정도로 영향력 강한 인물이니 좋을 게 없긴 한데···.’
뭣보다 태선은 입지는 저스틴에 비하면 아직 모래성과 같다.
오히려 작정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들면 꽤 귀찮아진다.
그러는 와중에 사업은 지지부진해질 것인데 한순간 화를 못 참아서 감당할 대가로는 상당히 가혹했다.
“대금의 일부는 현금으로 일부는 주식으로 주지. 그러면 자네는 큰돈도 벌고 경영에도 참가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난 유능한 사업가를 여럿 알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 한다면······.”
‘역시 말만 번지르르 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면 넘어가고 말겠어.’
“죄송합니다. 직접 부딪치고 경영하며 성장할 기회는 지금만 얻을 수 있는 귀한 경험이라 생각해서요.”
“먼저 그 길을 걸어가 본 이들에게 배우는 것이 시행착오도 줄이고 더 좋지 않겠나.”
“맞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시행착오 했을 때 부디 가르침을 베풀어주시지요.”
지지 않고 줄기 차게 공략해대는 저스틴에게 태선 역시 무너지지 않게 버텼다.
그러자 저번에 봤던 미간의 세로 주름이 다시 나왔다.
“그런가···. 그래, 그게 자네 뜻이라면 존중해줘야지.”
다만 저스틴도 더 권하지 않고 물러났다.
여기서 밀어붙어봐야 태선의 반감만 살 거라도 직감했는지 생각보다 쉽게 그만뒀지만, 그냥 물러서지만은 않았다.
“이러다가 자네 비서 아가씨가 또 스케줄을 만들어버리면, 자네가 모임을 즐기지도 못하고 가버릴 테니 말이야, 하하.”
가볍게 농담으로 던졌지만 저번에 태선이 불편해서 둘러대고 갔다는 걸 자기는 다 안다고 에둘러 지적하는 것일 터.
순간 당사자인 샬롯의 귀가 빨개졌지만 태선이 괜히 저스틴에게 대적하는 모습처럼 보일까 염려했는지.
“······.”
아무 대답을 하지 못 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다고 사과하면 저 말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물러서는 척 하면서 이쪽에 빚이라도 진 듯한 감정을 남겨두려는 수작이려나.’
뭐 아니면 그저 뒤끝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빚이라고 안 여기면 아무 짝에 소용없는 수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선은 망설이지 않고 나서서 말했다.
“아뇨, 오해이십니다. 그날 정말로 급한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날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자신도 도와주지 않으면 그녀가 다시 그런 용기나 기지를 내겠는가.
“그런가. 이거 정말로 일정이 있었나보군.”
“예, 중요한 일정이었죠.”
그리고 아예 거짓말인 건 아니었다.
선약이 있긴 했다.
‘내가 직접 음식 해준다는 약속은 전부터 했었으니까.’
국밥은 못 했지만 시간이 난 김에 다른 직원도 불러서 같이 요리해줬는데 이건 직원 사기 함양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짧은 대화가 오가고 나서 저스틴은 잠시 태선을 쳐다봤다.
꿀꺽──!
괜히 옆에 마치 없는 듯 숨죽이고 있던 밴더빌트와 제이 굴드가 괜히 침을 삼켰다.
아니, 긴장한 건 제이 굴드뿐이었다.
밴더빌트는 그래도 관록이 있어서인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중요한 일정이라. 그랬었군. 알겠네.”
이윽고 저스틴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자네를 좋게 보고 있으니 마음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오게나.”
“예, 다시 한 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난 다른 손님들도 만나봐야 해서 가보겠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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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이 자리를 뜨고 난 뒤, 태선은 밴더빌트와 제이 굴드와 좀 더 대화를 나누었다.
“저스틴 씨 앞에서도 그렇게 나오다니 과연 물건이군. 역시 자네는 재밌는 친구군.”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럼 온 김에 다른 분들도 만나보려고 하는데요.”
“그러도록 하세나. 어차피 우리는 다음 미팅 건으로 조만간 만나야 하니 말이야.”
태선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샬롯과 함께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 저 정말 숨 막히는 줄 알았어요. 밴더빌트 씨도 그렇고 어쩐지 저 제이 굴드란 사람도 신경 쓰이고······.”
“오, 샬롯도 그랬어요? 저도 사실 신경 쓰였거든요.”
“태선은 긴장 안 한 듯 보이던데요?”
“에이, 그냥 그런 척한 거죠.”
하기야 왜 아니겠냐는 듯 샬롯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밴더빌트 씨도 밴더빌트 씨였지만 저스틴이란 분···게티즈버그에서는 그냥 푸근한 인상으로 보였는데 어째 보면 볼수록 좀···뭔가 달라요.”
“뭐 이 업계에서 오래 살아남았으니 저절로 그만한 관록이 붙는다는 거겠죠.”
태선은 말하며 사뭇 주변을 둘러봤다.
짝과 함께 모임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는 이름은 JP 모건, 듀폰, 록펠러 정도이고 어쩌면 카네기라거나 이 시기 그의 상사인 토마스 스콧도 있을지 모른다.
“저 사람들도 모두 하나하나 나름대로 사업을 일구어냈으니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렇겠죠. 저런 사람들과 대등하게 서 있다니 역시 태선은 대단하네요.”
“아직 대등하다고 하긴 이른 감이 있고요··· 그보다 아 저기 있었네요.”
“지인이라도 봤어요?”
샬롯이 발코니로 따라가며 물었으나 곧 거기 있는 이들은 자신도 한 번 만나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 저 신사분들은 아까 전에 뵀던···?”
“예, 윌리엄 파고 씨와 헨리 웰스 씨죠.”
그에 더해 페이튼 저스틴의 아들인 스티븐 저스틴이 아직도 저들에게 붙어있었다.
아까 저 둘을 데리고 가더니 아직도 같이 있나.
아니, 다시 보니 반대였다.
‘음, 스티븐 씨는 다른 데로 가고 싶은 모양인데 파고 씨와 웰스 씨가 안 놔주고 있는 듯 보이는군.’
“스티븐, 우리는 저스틴 씨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말이네.”
“죄송합니다, 파고 씨. 아버지께서도 다른 분들을 만나셔야 히잖습니까.”
그러다 저스틴가 고용인으로 보이는 이가 오더니 스티븐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층 단호해진 얼굴로 파고와 웰스에게 말했다.
“이제 진짜로 가봐야 합니다. 아버지가 부탁하신 일이 있는데 그걸 처리해야 해서요. 그럼 두 분께서는 오늘 모임 즐기시고 다음에 다시 뵙지요.”
“이러긴가. 자네 부자가 우리더러······.”
파고와 웰스가 스티븐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체격이 건장한 고용인이 성큼 막아섰다.
그 틈에 스티븐은 가버리면 되었겠으나.
“어엇, 킴···씨? 하하,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반대 방향에서 와서 파고와 웰스가 있는 발코니로 향하는 태선을 보자 걸음을 멈추었다.
“저스틴 씨는 다른 분들을 만나러 가서요.”
“하긴 아버지가 호스트이니 바쁘시죠.”
“예, 그런 듯하더군요. 해서 저도 다른 분들과 이야기나 좀 해려던 차에 마침 저 두 분이 보이셔서 와봤습니다.”
“그렇군요. 헌데 아버지와 더 이야기 나누지 않고 여기로 오셨다는 건······.”
“매각 제안이라면 제게 과분하기에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럼 이제 갈 길 가라는 듯 태선이 비켜주었다.
하지만 스티븐은 방금 전만 해도 파고와 웰스를 두고 갈 기세이더니.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건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도록 하고 다른 분과도 사귀고 싶으시다면···오, 마침 저기 발 넓은 친구가 있군요. 이봐, 다니엘!”
스티븐이 손을 흔들자 이내 누군가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자네 태선의 소문을 듣고는 친분을 쌓고 싶다 했지. 이 분이 태선일세.”
“오늘 온다는 말은 들었네만 이렇게 만나다니 이거야 보람이 있군. 반갑습니다. 다니엘 앤더슨입니다.”
다니엘 앤더슨이라 자기를 소개한 활달한 인상의 남자가 태선에게 악수를 청했다.
“태선 킴입니다.”
“하하, 예.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전구 사업도 놀랍지만 석유 사업도 대단하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뭘 존경까지 하십니까.”
다니엘 앤더슨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니엘, 나는 아버지께서 시키신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네. 자네가 태선에게 사람들 소개 좀 해주게나.”
“그런 일이야 내 전문이지. 스티븐 자네는 편하게 일 보게.”
스티븐이 가고 나자.
“자, 그럼···오, 마침 여기에 웰스 씨와 파고 씨가 계시는군. 태선 이 두 분은······.”
“예, 이 두 분은 소개를 받았습니다.”
다니엘 앤더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웰스와 파고를 소개해주려고 했다.
그 둘은 스티븐이 가버린 방향을 보며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다니엘 앤더슨에게로 시선을 옮겨서 스티븐을 대하듯 했다.
“앤더슨···그래, 자네는 스티븐과도 친하지. 좀 도와주게나.”
“우리 사업이 좀 어렵다네. 스티븐에게 말해서 저스틴 씨를 만나게 해주게.”
확실히 아까 하는 걸 보면 스티븐 저스틴과 다니엘 앤더슨이 친한 것 같기는 했다.
아니, 다니엘 앤더슨 자체가 표정이나 말이나 활달한 것이 인싸 같았다.
다만 왠지 태선은 그런 점에 묘하게 위화감을 느꼈지만.
‘나야 기분 탓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웰스 씨하고 파고 씨에게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친분에 기대고 싶은 모양이군.’
마침 고용인 하나가 쟁반에 와인을 가져와서 술을 곁들이며 이야기 나누었다.
“전쟁이 끝나면 여러 가지 수요가 생길 걸세.”
“그렇지. 그런 면에서 우리 회사가 전역에 뿌려둔 지점망이라거나 지리에 대한 지식은 큰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겠나.”
“암만! 물론 기차 산업 탓에 침체하고 있지만 그 철도를 설치하는데 우린 큰 무기를 가지고 있거든.”
“웰스 말이 맞다마다. 철로를 까는 루트도 그렇거니와 인디언들의 땅은 배달부 친분으로 매입에도 유리할 거야.”
다만 윌리엄 파고와 헨리 웰스는 뭔가 말을 하면.
꼭 그 마무리가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니 우리에게 투자를 좀 해주면······.”
결국, 돈 좀 달라는 것이다.
“에이, 파고 씨. 그리고 웰스 씨도 가만히 듣자니 너무 과하십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스티븐에게 따로 이야기하시지요.”
태선이 있어서인지 처음에는 다니엘 앤더슨도 들어주었으나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 탓에 분위기가 굳었으나 덕분에 이들의 문제가 뭔지 정확히 알게 됐다.
그리고 저 두 사람은 자못 심각하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미소 띠었다.
‘잘됐네.’
석유회사나 유전 싹쓸이를 위해서 그동안 현금이나 다른 자산들까지 합쳐서 어마어마하게 비축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석유회사와 유전을 매입하려면 다소 소모가 있겠으나 상관없었다.
전구 사업이 한창 흥하고 있으니 그걸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심지어 유니온 은행이나 필라델피아 제이 쿡 은행과는 개인적으로 친분도 있고 말이다.
‘다만 급할 거 없지. 오늘은 얼굴 익히는 정도만 하자.’
오늘 만남을 인연의 끈으로 찾아가면 될 것이다.
“큼···이보게, 앤더슨.”
그 사이 누군가 다가와 다니엘에게 속삭였다.
“······.”
방금 면박까지 받은 웰스나 파고의 입장에서는 저런 모습에 빈정상할 수도 있었다.
“많이 바쁜 모양이군.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부디 스티븐에게 좋게 우리 이야기를 전해주게.”
쓸쓸히 가는 윌리엄 파고와 헨리 웰스에게 인사해준 건 다니엘 앤더슨이 아니라 태선이었다.
“그럼 두 분 가시지요. 언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둘이 갔는데도 다니엘 앤더슨은 남자와 뭐라고 말을 주고받느라 바빴다.
“그럼 앤더슨 씨,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모임 초대해주셔서 고맙다고 저스틴 씨에게 전해주십쇼.”
“어어, 잠시만요! 하하, 죄송합니다. 급한 건 탓에···벌써 가시다니 섭섭하지요.”
아까 파고나 웰스와 달리 앤더슨은 급히 태선을 잡았다.
“이렇게 가시면 나중에 스티븐에게 제 면목이 서질 않지 않겠습니까. 고작 두 사람 만나셨을 뿐이잖습니까. 다른 분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좀 피곤해서요.”
당장 돌아갈 기미를 보이자 앤더슨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 무리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며 소리쳐 불렀다.
“오, 마침 전도 유명한 사업가들이 있군요. 모건 씨! 듀폰 씨!”
JP 모건과 헨리 듀폰 그리고 록펠러가 그걸 보자 마찬가지 반갑게 마주 인사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러분께 소개해주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이분은 태선 킴입니다. 최근에 아주 뜨거운 전구가 바로······.”
“이분이 바로 요새 유명한 킴이었군요. 반갑습니다.”
“아시아인이 미국에 오는 것만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과연 대단하시군요. 더구나 군납도 하신다고요?”
“오, 그러고 보니 듀폰 씨는 원래 군인이었군요, 하하하!”
원래는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앤더슨이 저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개해준다면 굳이 마다할 건 없었다.
‘모건, 듀폰, 록펠러······. 뭐 일단 이렇게 전초전 삼아서 만나두면 나쁠 건 없으니.’
그렇게 무슨 전속 매너지인 것처럼 앤더슨은 내도록 태선을 따라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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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선이 모임을 나와 힐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꽤 지나서였다.
“오, 태선! 왜 이리 늦었나!”
그리고 돌아왔을 때 태선을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누구라 했더라. 아무튼 누가 와서 급하다면서 자네에게 이 편지를 전해달라더군.”
‘편지?’
조선에서 답장이 올 때는 아니고 혹시 랠스턴이려나?
‘아니, 소인이 없군. 우편을 통하지 않고 직접 건네준 건데.’
태선은 이내 편지를 뜯어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이 뭔?!”
그리고 이내 태선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뭔데요···왜 그래요, 태선?”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에 샬롯이 약간 놀랐을 정도였다. 태선은 이내 진정하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작정하고 우리 뒤통수를 거하게 때린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