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58
058 협잡꾼들(1)
“전쟁이 끝난 뒤의 일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운을 떼며 태선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전쟁을 거치며 민중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지.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그게 마지막이 되어버린 이들도 있을 테지.”
전쟁터에서 죽은 이들과 유가족들이 치른 희생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또한 국채를 산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 돈이 있어 전쟁이 가능했었지요.”
거기에 태선은 국채 발급의 정책적인 바탕을 제시했고 직접 발로 뛴 당사자 아니겠는가.
“그래, 그 역시 틀린 데가 하나도 없는 말이야.”
체이스 재무장관은 태선의 한마디 한마디에 동조하는 것도 모자라 덧붙였다.
“그런 큰 희생을 치렀으니 위정자이자 관리로서 민생을 더 안락하게 해줘야 할 텐데···하아!”
그의 표정과 어조에서 그런 진심이 여실히 묻어났다.
‘역시 체이스 장관님하고는 이야기가 잘 풀려.’
기뻐하는 기색을 숨긴 채 태선은 자못 진중하게 민중을 걱정하는 어조로 말했다.
“에두르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중에게 빛을 나눠주시지요.”
“빛···이라면 전구 조명을 이야기하는 겐가?”
여느 때라면 이 타이밍에 샬롯이 보고서를 건넸겠지만 지금 그녀는 여기 없다.
새삼 그 빈 자리를 느끼며 태선은 셀프로 보고서를 꺼냈다.
“지금까지 많은 건물에 전구 조명을 설치했지만 사실 아직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나도 늦게까지 일하고 가면서 더러 보네만 아직 거리에는 가스등이 있고 민가를 보면······.”
“예, 각 가정의 사정이야 더 말할 것도 없죠.”
사실 전구가 나온 초기에도 기름으로 불을 켜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그조차도 부자가 아니면 마음대로 불을 밝힐 수도 없다.
아니, 태선이 석유 업계의 폭락을 앞당긴 덕분에 등유가는 격하게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자칫하면 불이 날 위험성은 그대로였다.
“좀 큰 규모의 발전소를 설치하고 전선을 끌어서 잇는다면 가정에서도 전구의 불빛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사락───사라락───!
하지만 그런 불편과 위험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며 태선은 보고서의 관련 내용을 펼쳐 체이스에게 보였다.
“안전하게 빛을 가져오는 것으로 인한 이익은 개인에게 국한되지만은 않을 겁니다.”
범죄 예방으로 치안 유지에 좋다거나.
각 가정에서 불을 밝힐 수 있다면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사회적인 지식 수준이 올라가고.
“···또한 기술을 배우는 자는 기술을 밤에도 연습할 수 있고 예를 들어 빵집에서는 반죽을 밤에도 할 수 있어 생산성이 크게 늘어납니다.”
보고서의 다음 페이지 경제 생산성의 그래프로 넘겼다.
첫 그래프에 비해 두 번째 그래프는 더 큰 면적을 끌어안고 있었다.
“보시지요. 달리 자원이 더 투입되지 않더라도 빛이 있다는 것만으로 생산성이 늘어납니다.”
노동생산성 투입이 늘 수 있음을 들먹이며 태선은 그래프 면적의 크기가 생산성 향상에 비례함을 어필했다.
잭과 함께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이니 빈틈은 없었다.
“확실히 이렇게만 되면 각 가정에도 큰 도움이 되고 나라 전체에도 이득이군.”
더구나 재무부 장관이 이가 보고서의 내용을 못 알아들었을 리도 없었다.
“더구나 게티즈버그 전투의 전례를 생각하면 군사적으로나 다른 분야에서 응용할 방안도 얼마든지 있겠지. 수출하는 것도 괜찮겠고.”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눈치였으나 사실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러더니 지난 페이지를 들춰내더니 잠시 동안 침묵하면서 면밀히 훑어봤다.
태선 역시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역시 저 페이지를 유심히 보시는군.’
저 페이지가 어떤 내용인지 태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나···자네도 짐작하겠지만 돈이 발목을 잡는데.”
“예, 발전소도 짓고 전선도 이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기반 설비를 지어두면 뒤로는 유지만 들어갈 겁니다.”
“그래, 그런 점도 부정할 수 없이 매력적이야.”
다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체이스 장관은 여전히 애매하고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초기 비용을 줄일 방안도 있습니다. 전봇대를 박아 전선을 잇는 것은 당장 모든 곳에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거기다 어차피 전신을 위해서라도 전선을 잇는 작업은 해야 하니 겸사겸사 할 수도 있겠구먼···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여전히 시원찮은 반응.
“자네가 바라는 건 저번에 역사나 기차에 전구 설치를 했듯 연방정부나 주정부의 지원을 바라서겠지?”
“지원을 받으면 좋겠지만 무리라는 걸 압니다.”
“그래, 지원···으음, 안다고?”
체이스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업 지원에 대해 논의하러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면 좋겠지만 역에 전구 조명을 설치하는 것과 한 구역에 전기를 공급할 발전소를 세우고 전선까지 잇는 사업은 스케일이 다르니까요.”
그러면 그냥 나중에라도 검토해달라는 말이나 하려고 왔나···싶은 생각도 하는 체이스였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태선이 정부 이득에 합치하는 일을 많이 해줬어도 자선사업가는 아니라는 걸.
“연방정부나 주정부에서는 투자할 여력이 되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여력이 되는 만큼 투자···란 것은 전구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려는 모양이구먼.”
“예, 다만 연방정부나 재무부에서도 상장하면 주식을 매입해줬으면 해서요.”
“호오, 하긴 그러는 편이 입소문도 있고 다른 투자자들에게 호응 끌기도 훨씬 좋겠군.”
제안이 흡족했는지 체이스 장관의 표정이 밝아지자 태선은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거기에 이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 기반 산업인데 일반 투자자들보다 차라리 국가가 지분을 얼마쯤은 가지고 있는 편이 좋지 않겠는지요.”
“확실히 그렇지만···자네는 괜찮겠나? 자칫 회사 경영의 자율성이 침해될 수도 있을 텐데?”
그래, 전에 석유회사 상장을 두고 저스틴의 제안을 거절했듯 상장하면 이게 문제다.
하지만 주식을 늘리면서도 경영에 간섭하는 걸 차단할 길은 있었다.
“실은 그렇기 때문에 주식을 발행하되 우선주로 했으면 합니다.”
“우선주라······. 흠, 그러면 배당을 노린 평범한 투자자들에겐 상관이 없겠지만 회사 자체를 매력적으로 보는 큰손들은 많이 망설이겠군.”
“예, 그리고 거기에는 정부 역시도 포함되겠죠.”
체이스 장관은 중요한 건 다 봤다는 듯 전구 보급 보고서를 덮으며 빙긋 웃었다.
“이제야 알겠군. 자네가 날 찾아온 것은 주식을 우선주로 발행하되 정부가 든든한 투자자로서 뒤에 서주었으면 해서인 거지. 맞는가?”
“맞습니다.”
태선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지막이 덧붙였다.
“아울러 상장을 노리고 있습니다만 주식이 공개되기 전까지 최대한 주주를 끌어모으기 위해 다소의 정보전을 벌이는 계획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보전을 벌인다라······. 흠, 사실 내 사위가 뉴욕증권거래소 특별회원으로 있기야 하네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군. 일단 들어보세나.”
‘응? 체이스 장관 사위도 특별회원이었어?’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거늘 뜻밖의 횡재였다.
다만 체이스 장관은 태선이 잠시 침묵한 걸 오해했는지 다독이듯 말했다.
“꺼리지 말고 말해보게. 내 장담을 못 한다고나 했지, 자네를 완전히 모른 척하겠는가.”
“아뇨, 꺼리는 게 아니라 사위분이 특별회원이라니 놀라서요. 아무튼 정보전이란 건 거창한 작전은 아니고 우선주란 걸 일단 숨기려 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투자자로 나선다는 건 밝혀서 투자자를 끌어모은다?”
“예. 사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누가 될 수 있단 것을 알고도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태선이 살짝 고개 숙인 이후 체이스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태선도 이해는 갔다.
‘21세기에 비해서 이 시대의 법이 엉성하다고는 해도 정보전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리고 거기 정부가 끼어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조직 수장으로서 달가울 리 없을 터···였을 테지만.
체이스 장관은 씨익 웃었다.
“좋군. 만약 자네 제안대로 한다면 월가 놈들뿐 아니라 거물들도 오겠구만. 그, 세간에 도둑남작이라 부르던가?”
순간 체이스 재무장관이 도둑남작을 언급하자 태선은 가슴이 뜨끔했다.
민생을 위하느니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사실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석유 사업에 수작 거는 다니엘 앤더슨과 알렉스 에드워드라는 놈들.
딱 도둑 남작이라 불릴 녀석들에게 철퇴를 날리려는 선행 작업이었기에.
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는 체이슨 징관은 말을 이었다.
“그 돈에 미친 놈들이 좋은 먹잇감이다 싶어서 떼로 달려들겠어, 하하핫!”
“역시 예리하십니다. 실은 저 역시 그들을 전구 회사를 키울 자양분으로 삼을 생각을 하던 참이라서요.”
적당히 맞장구쳐주고.
“오오, 그랬던가? 역시 자넨 마음에 들어. 사실 안 그래도 전쟁을 이용해서 사기 치고 돈 벌어들이는 수작이 곱게 보이지 않았거든.”
“맞습니다. 그런 자들일수록 전도 유망한 회사가 상장한다면 왕창 달려들겠죠.”
그가 내심 바라는 바를 콕 짚어서 언급해주자 체이스 장관은 이내 호언 장담했다.
“걱정말게. 내 이 건은 적극적으로 도와줌세. 사위에게 직접 말해놓도록 하지. 물론 기밀도 기해서 말이야.”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 대해 한 가지 제안이 더 있습니다만.”
“음? 제안이 더 있다고?”
체이스 재무장관이 일어서다 멈칫했다.
하지만 이쯤해서 끝내려는데 다시 불러세워 귀찮다는 반응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태선이 무슨 제안을 하려나 기대하는 낌새.
“전구나 전기가 그러하듯 이 역시 민생에 도움이 되고 전구 보급에도 기여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만.”
태선이 잠시 뜸을 들이자 체이스 장관이 채근할 정도였다.
“허허, 그러니까 그 제안이 무엇인지 어서 말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뭐냐면······.”
***
스완 제니럴 일렉트릭 상장 건에 대해 체이스 재무장관과 미팅하고 한 달여 뒤.
1856년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와 칼베르 보가 설계한 뉴욕 맨핸튼의 명소 셀트럴 파크에 뭔가가 생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어졌다고 해야 할 터였다.
“저걸 연다고 하더니 벌써 열었던가?”
“허어, 몰랐나? 난 며칠 전에 가족들 데리고 갔는데 전구를 켜놓으니 밤에도 대낮이야.”
“지금 여기서도 창문으로 빛 새는 걸 보니 정말로 밝구먼.”
지나가는 두 사람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제법 규모가 큰 한 채의 저택이 있었다.
“그러지 말고 지금 바로 들어가보세나.”
“쯧,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들어가서 같이 간단히 시집이나 읽어보고 가세나.”
“으잉, 안에 시집도 있는가?”
건물로 들어가며 한 남자가 묻자 다른 남자가 괜히 자기가 자랑스러워하며 웃었다.
“시집만 있겠나. 돈만 내면 간식도 파는······.”
“오오, 이럴 수가 있다니!”
다만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설명하던 말은 질문한 남자의 감탄사에 묻히고 말았다.
“공원에서 전구 실험하는 건 나도 봤지만 집 천장에 전구를 달아놓으니···허허, 이렇게 밝을 수가 있는 건가?!”
그는 신세계를 본 듯 연신 감탄을 토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밤에는 고작 촛불이나 등불로 밝히던 시대였다.
물론 태선의 사업으로 뉴욕우체국을 비롯해 몇 군데의 공공기관에는 전구가 들어갔지만 민간에는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전구를 천장에 달아놓으니 이렇게 밝다니.
“자네가 말한 시집이 저기 저것인가. 벽을 아예 책장으로 만들어서 책으로 채웠군.”
“게다가 곳곳에 의자가 있지. 원하는 곳에서 읽으면 된다네.”
“밤에도 이렇게 밝게 독서할 수가 있다니. 등불 밝혀서 책을 읽을 때는 눈이 침침해지는 것 같았거든.”
“자자, 군말은 말고 자리나 잡으세나. 마침 저쪽에 한 자리가 비었군.”
말을 주고받으며 두 남자는 한쪽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쪽 테이블에 앉은 태선은 커피를 마시며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인기가 많네요. 안 그래도 공원에서 전구쇼를 해서 많이 알렸는데 이 카페 덕분에 더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
맞은편에 앉은 샬롯이 사뭇 둘러보고는 소회를 밝혔다.
이제 다리가 다 나아 퇴원한 그녀였다.
“샬롯이 퇴원하자마자 여길 데려올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그래요? 저로서는 더 빨리 퇴원해서 여길 짓는 미팅을 지원하지 못해서 아쉬운데.”
말마따나 이 카페는 그녀가 입원하는 동안 지어진 것···이긴 해도 몇 개월 전에 체이스 재무장관과 미팅에서 던진 제안의 결과였다.
즉 그녀가 아무리 일찍 퇴원했어도 이 카페를 짓는 일에 지원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할 일은 많으니까. 앞으로는 더욱.’
태선은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고는 일어서서 짐짓 카페를 걸었다.
마침 지나치는 테이블에서 소곤거리는 잡담이 들렸다.
“그런데 소식 들었어? 전구 회사 있잖아. 스완 제네럴 일렉트릭··· 여기 만든 곳 있잖아. 상장한다던데?”
“물론 들었다네. 재무부도 투자에 나섰다지?”
테이블을 지났지만 얼마 못 가서 비슷한 대화가 또 들렸다.
“내 장담하는데 전구 주식은 무조건 오를 거야.”
“지나가는 꼬마한테 물어도 아는 걸 말이라고 하나, 쯧!”
“아무튼 이건 큰돈을 벌 기회라고. 이번에 돈이란 돈은 다 끌어서······.”
스완 제네럴 일렉트릭의 상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역시나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찌라시는 좋은 가십거리가 되네.’
재무부가 큰 투자를 하기로 했다느니.
물론, 이건 사실이고 태선이 은밀히 뿌린 정보였다.
‘그리고 덕분에 전구가 더 보급되면 석유업계는 더 추락할 수밖에 없겠지.’
게임으로 치면 석유회사를 가지고 있으면 –10씩 들어가던 대미지가.
이제 –100도 넘게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비슷하려나.
‘그러고 보면 걔네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아직 유전이랑 석유회사를 안 팔고 쥐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즉 지금까지는 버틸 만했고 자금을 돌릴 만큼 매력적인 투자처도 없었다는 뜻이겠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터였다.
몇 개월 동안 소강 상태가 이어졌지만 준비 작업은 이걸로 마무리됐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카운터 펀치를 날릴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