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68
068 빌드업(2)
1860년대 이르러 미국만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영국도 그 못지않은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6년이나 하더니 하수관 공사도 거의 끝나가네요. 듣기로 내후년에 끝난다던데 더 앞당길 수도 있겠는데요.”
마차 타고 뉴 런던 브리지를 건너는 존 브라더튼의 눈에 비치는 도시가 딱 그러했다.
산업혁명 이후 런던에는 인구가 몰려들어 무질서하고 특히 템스강에는 온갖 오수가 버려져 더러웠거늘.
“조셉 바잘제트였던가. 이번 공사를 맡은 토목기사가 오래전부터 준비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겠지.”
템스강 바로 옆에 있어 그 악취를 웨스트민스트 의사당에서 직접적으로 맞았고.
자기들 공통 이해가 걸리자 의회는 전격적으로 결정.
그 결과 대도시건설위원회가 무려 300만 파운드를 조달하여 하수 시스템 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저것만 완공되면 냄새도 덜 나고 템스강의 물도 훨씬 깨끗해지겠군요.”
“······그래, 아마도 그렇겠지.”
어쨌거나 이는 대중에게도 반가운 소식이건만.
조카의 말에 대답해주는 화이트하우스의 표정은 그다지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실 질문 던지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조카 존 브라더튼도 애써 밝은 척을 하려는 티가 났다.
“그러고 보니 런던에는 패린던에서 비숍스를 잇는 지하철이 개통됐다면서요.”
마치 날씨처럼 비가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서만 막춤을 추는 느낌.
“그렇다더구나. 찰스 피어슨 의원이 1년만 더 살았다면 직접 제안한 지하철 운행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화이트하우스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고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마지못해 그걸 받아주고 있는지라 더 그랬다.
“······.”
결국 목적지인 왕세자궁에 다다를 쯤 되자 아예 마차는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대신 화이트하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담배를 물고 있었으면 뿌연 연기가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토해져 나왔을 것만 같은 그런 한숨이었다.
존 브라더튼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삼촌.”
여태 억지로라도 밝게 떠들어댄 것과 달리 존 브라더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꺼낸 말은 사과였다.
마침 마차는 왕세자궁 앞에 도착했다.
이제 내려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
“···됐다.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하겠느냐. 오늘 앨버트 왕세자 전하를 만난 자리에서 그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예, 그 수밖에···없겠죠.”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심호흡 한 화이트하우스와 존 브라더튼은 걸음을 옮겼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차기 왕위 계승 1순위의 앨버트 왕세자를 접견하기로 되어있기에 제지는 없었다.
“오, 두 분 드디어 오셨군요. 특히 브라더튼 씨는 울버햄프턴에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히려 궁내부 왕세자궁 담당부의 서기관 해리 왓킨슨이 기다리고 있다가 둘을 보자 반갑게 맞아줬다.
“화이트하우스 씨도 공사 준비를 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시겠습니다, 하하하.”
“예···뭐···그렇지요.”
왓킨슨 서기관을 따라가며 화이트하우스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답을 했다.
어렵다···라는 말은 적어도 앨버트 왕세자의 면전에서 직접 올려야 한다.
안 그래도 앨버트 왕세자는 다혈질적이라 좋을 땐 확 기분 좋았지만 나쁠 땐 확 나빠지는 스타일.
거기에 조카가 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한 공사를 못 하겠다는 말을 서기관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게 된다···?
뒤끝이 장난이 아닐 터였다.
‘물론 어차피 뒷감당을 해야 되겠지만···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이라도 덜어야지.’
끼이이익──!
마음을 다잡는 사이 마침내 왕세자실에 들어섰다.
“왔군. 어서 오시게나.”
딱 보면 아, 이 사람이 왕세자구나···싶은 티를 내는 화려한 차림새 청년.
어려운 말을 꺼내야 하는 자리인지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모습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앨버트 에드워드 웨틴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화이트하우스는 일단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자, 예는 그 정도면 됐고 어서들 앉으시게. 도면은 가져왔는가? 도면을 놓으려면 큰 테이블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렇게 준비도 해뒀다네, 하하하!”
과연 영국 왕실답게··· 아니, 그보다는 앨버트 왕세자의 취향이려나.
보석 잔뜩 박힌 커다란 원목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저 위에 도면 올려놓으라고 준비했단다.
그 말 듣는 순간 화이트하우스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자신이 이런데 조카 존 브라우튼이야 더하겠지.
“······.”
슬그머니 옆을 보니 존의 안색은 예상보다 더 파리했다.
하기야 오랜 견습 기간을 거쳐서 튜브 사업에 나름 관록이 붙고 울프햄프턴에 회사까지 차렸다지만.
그래봐야 이제 서른넷이다. 육십 넘은 자신도 긴장 되는데 조카가 어찌 멀쩡하겠나.
‘그럴수록 내가 더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만 해.’
“이런···그러고 보니 차도 권하지 않았군. 미안하네. 내 너무 들떠서 말이오.”
“왕세자 전하, 지금 홍차를 내올까요?”
“그래, 얼마 전 스리랑카에서 들여온 그 홍차 있잖은가. 맛이 좋더군. 그걸로 가져다주게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금방 들이지요.”
앨버트 왕세자와 왓킨슨 서기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화이트하우스와 존 브라더튼은 앉아있기는 한데 무슨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자, 홍차는 곧 내온다니 이 케이크라도 먼저 먹어보게나. 덴마크에서 온 건데 아주 맛이 난다네. 사실 영국 음식이 맛은 별로이지 않은가, 하하!”
“듣자 하니 요새 상류층에 컨트리하우스가 유행이라지. 어떤 곳은 궁궐보다 더 호화롭다던데 사실 왕실 위신이 있지 궁이 그보다 뒤처져야 되겠는가. 아니 그러한가?”
“목욕도 그래. 목욕이 로마 때부터 있었다는 거 들어봤는가? 상류층들이 욕실을 꾸며 목욕을 한다는데 사실 유행을 선도하는 것은 왕실이여야지.”
이어지는 말···말···말······.
화이트하우스는 공사가 어렵다는 얘기를 언제 말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지만 도통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그 와중에 왓킨슨 서기관이 시종을 대동하여 홍차를 내오자 앨버트 왕세자의 수다는 지금까지는 몸풀기였다는 듯.
“듣자 하니 안사람도 목욕에 흥미를······.”
멈출 줄을 몰랐다.
‘하아, 한순간 한순간이 피 말리는 것처럼 괴롭구나. 이런 어려운 자리가 아니라······. 나도 그저 물건을 발명하고 만들고 팔기만 하면 좋으련만.’
고통의 시간을 버티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별생각이 다 스쳐지나갔다.
특히 얼마 전 미국에 가서 성공했다는 조셉 스완의 이야기고 떠오르며 왠지 자신의 처지와 대비됐다.
법제적으로는 신분이 폐지되었어도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 신분이 아예 사라질 순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왕세자는 여왕 다음으로 절정에 군림하는 자.
‘빌어먹을, 나도 그냥 확 미국으로 떠버리고 싶다. 마침 조셉 스완과 동업하는 태선 킴이라는 사업가에게 연락도 왔고···좋은 제안도 받았었는데!’
여기서 발목 잡은 게 영국 왕실과 맺은 계약이었다.
“크흠, 이거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구먼. 그럼 두 사람도 조금 지루해하는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잠시 다른 생각으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앨버트 왕세자가 그 계약을 마침내 입에 올렸다.
“저번에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튜브로 2층에 새로 만들 욕실에 물을 끌어오되 난방이 가능하도록 주문하는 부분까지 였습니다, 왕세자 전하.”
“그래, 맞아. 그랬지.”
왓킨슨에게 잘했다며 고개 끄덕이고는 앨버트 왕세자가 말을 이었다.
“안사람이 덴마크 출신인데 추위를 좀 탄다는 말이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추운 겨울날 딱 씻고 나와서 따스하게 몸 데울 수가 있다면 정말 좋겠더구만.”
꿀꺽───!
화이트하우스는 심호흡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눈 딱 감고 말하자. 아니, 말해야만 해.’
3······2······1······.
속으로 숫자를 센 뒤.
“왕세자 전하, 이번 공사 관련으로 드릴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질렀다. 앨버트 왕세자는 내도록 혼자 떠들다가 화이트하우스가 입을 열저 반가운 표정.
“오, 그런가? 말해보게나. 주문대로만 되면 내 무슨 지원을 아끼겠는가.”
“그···지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욕을 한다는 건 몸을 깨끗이 하는 게 아닌지요.”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냥 주문대로 공사 조건을 맞추기 어렵습니다!
···라고 짧게 굵게 말했어야 하는데 앨버트 왕세자와 눈이 마주치자 줄줄 늘어놓고 있다니.
“몸을 데우는 것은 난로가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난로를 가동하려면 석탄을 지속적으로 떼워야만 하는데······.”
최악이다. 결론부터 말한 게 아니라 왜 이 공사가 어려운지 설명을 하다보니 슬슬 왕세자도 감이 오나보다.
“······.”
표정이 굳어져간다.
“그 아무리 하인들이 석탄을 옮겨도 석탄이라는 것이······.”
“잠깐만! 혹시 이제 와서 공사를 하기 어렵다는 말이나 지껄이려고 내 시간을 빼앗은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방금 전까지 들떠서 잔뜩 수다나 떨어대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게 싸늘했다.
‘그···그래도 이건 못 한다고 말해야만 해.’
“안사람에게 이미 다 말해뒀다는 말이지. 덴마크에서 멀리 영국까지 온 사람일세. 마음 고생 심한지 표정이 늘 어둡던 그 사람이 간만에 웃었다는 말이네.”
‘아니, 왕세자비가 표정이 어두운 건 당신이 난봉꾼이라서 그렇다는 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그걸 왜 나한테!’
“만약 자네가 공사를 못 하겠다고 말하면 안사람의 웃음을 빼앗아 가겠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것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네.”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려서 그런 거잖습니까.’
물론 난봉꾼인 건 천성이고 그나마 아내가 좋아하는 목욕과 난방이 콤보로 되는 욕실을 선물해줘서 마음을 풀겠다.
더 나아가 그걸 통해 자칫 냉각될 수 있는 덴마크와 관계를 다독이겠다.
···라는 건 이해 가지만 왜 하필이면 이런 판에 끼어가지고.
“······.”
그럴수록 조카 녀석은 더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녀석을 다독였지만 막상 앨버트 왕세자를 대하고 압박을 받으니 자신도 암담해졌다.
‘하아, 저 녀석은 왜 하필 그 공사가 가능하다고 호언장담을 해서는.’
그만큼 삼촌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믿었던 탓이겠지만 이건 사고가 커도 너무 컸다.
“그렇지만 자네는 운이 좋아. 아직 그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은가.”
짐짓 홍차 한 모금을 마시고 음미하더니 곧 앨버트 왕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하던 대화를 계속 하세나. 방금 전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지?”
“······그···공사에 관해서······.”
못 한다고 해야 한다. 강행해봤자 무조건 폭망이다.
따뜻하게 샤워할 수 있도록 바깥에서 물을 데워서 끌어오는 것이야 왕실이니 어떻게서든 될 것이다.
그건 하인들이 물을 데워 튜브로 흘려넣으면 되니까. 뭐 왕실이라 노동력을 갈아넣을 수 있기에 가능한 일.
다만 나와서 몸이 젖은 상태에서 온기를 유지하려면 벽난로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석탄 때문에 아무리 조심해도 무조건 그을음이 묻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당연히 공사를 한 나한테 묻겠지.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조합이었다고.’
“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건가? 슬슬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려고 하네만.”
달그락──!
왕세자가 찻잔 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와 함께 화이트하우스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는 듯싶어 본능적으로 말했다.
“···되···됩니다! 오늘 도면은 가져오지 못했지만 공사는 잘 진행될 테니 안심하라는 말씀을 드리려던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그제야 왕세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 역시 그랬지? 난 또 자네가 공사가 안 된다느니 그런 말을 할까봐 걱정했지. 도면 못 가져온 거야 어떤가. 나중에 또 오면 되지.”
“하하···예···그렇다마다요.”
옆에서 조카 존 브라더튼이 정말로 되는 건지 아니면 임기응변이었는지 긴가민가하는 사이.
‘···끝났다. 다 끝났어. 영국 떠서 미국 야반도주 준비라도 해야 하려나···하···하···하.’
화이트하우스는 영혼이 탈곡 당한 듯 맥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