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75
075 왕실 계약(1)
18세기 퍼진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영국에서는 사교 모임이 유행하였다.
이는 19세기 이르러 상류층 남성들 사이에는 신사 클럽으로 거듭났고.
“하하, 어서들 오시지요.”
지금 커크먼 호지슨이 저택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모임도 그러했다.
모임에 참석한 이의 면면도 따져보면 실로 대단했다.
기실 호지슨 본인부터가 영국은행 총재와 부총재를 겸했으니 어련하겠는가.
“이런 라이오넬! 못 본 사이 얼굴이 반쪽이 됐군.”
“티가 많이 나는가? 웰링턴 공작님 신경도 써드려야 하고 배어링 은행 탓에 본업도 신경을 써야 하고.”
그중 응접실에 들어서며 하인에게 외투를 넘기고 푸념하듯 말을 늘어놓는 이의 행색은 지나치게 검소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이거 로스차일드 씨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는 진작 굶어 죽었겠습니다, 하하.”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에서 유럽으로 원정을 간 웰링턴 공작에게 배팅하여 큰 성공을 거둔 금융가.
영국은행은 국영이니 논외로 치고 민간 은행 가운데서는 프랜시스 베어링의 은행과 1, 2위를 다투는 곳.
바로 이 초로의 노인이 로스차일드 은행의 주인이자 영국 로스차일드가의 당주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드님이 내년에 버컹엄셔에서 선거에 출마한다고 들었는데요. 분위기도 상당히 좋다면서요?”
그러니 먼저 와서 앉은 채 로스차일드를 맞으며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네는 또 한 사람 초로의 노인도 결코 만만찮은 배경의 소유자일 터였다.
“역시 피보디 씨는 늘 일찍 와계십니다. 예, 그나마 조나단 녀석 덕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출신 조지 피보디.
“허허, 그 아드님이 케임브리지에서 앨버트 왕세자와도 친해졌다더니 복입니다 그려.”
“피보디 씨도 자식을 가지셨다면 그놈보다 훨씬 훌륭했을 텐데요. 아니, 아직도 하려면 하실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재산을 핏줄에게 물려주고 가야 하지 않겠는지요. 제가 알아봐드릴까요?”
주변에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느니 말하지만 피보디는 그저 옅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여자 입장도 생각해야지요.”
이내 말하며 소탈히 웃는 얼굴에서 그 성품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하여간 신기합니다. 흉보는 것이 아니라 피보디 씨 같은 분께서 금융업에서 이렇게 성공하셨다는 것이요.”
“에이, 그건 모르시는 말씀들입니다. 사적으론 이래도 일 관련으로는 엄격하시거든요.”
“아, 모건 자네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겠구먼.”
하기야 영국은행 총재와 로스차일드 당주와 대등히 앉아있는 사람이 어디 보통 인사일 리가 있겠는가.
실제로 피보디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적수공권으로 금융의 심장인 런던에서 저명한 금융가로 성공하여 인정 받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자식은 없는데 오히려 그래서인지 후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겠다거나 하는 욕망 따위는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피보디 씨가 은퇴한다고 말씀하시던 해가 벌써 성큼 왔습니다. 자선사업을 할 거라고 하셨던가요?”
“하하, 예. 돈을 벌었으니 사회에 다시 돌려줘야지요.”
대신 지금 커크먼 호지슨의 말에 답하는 것처럼 박애주의나 자선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
아까 전까지 짐짓 한 마디씩 대화에 끼었으나 그런 조지 피보디를 불만족스럽게 쳐다보는 50대의 남자.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가 모건이라 불렀던 이였다.
“모건, 왜 그러나? 차 맛이 별로인가? 한 입 대고는 아무래도 표정이 별로군.”
그때 이 모임의 호스트답게 커크먼 호지슨이 그런 모건의 표정을 캐치하고는 물었다.
“아··· 아닙니다. 차맛은 아주 맛있습니다.”
“그런가? 그런 것 치고는 근심이라도 있는 모양인 듯한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하게. 도와줌세.”
호지슨이 나서자 라이오넬 로스차일드도 나섰다.
“그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하게나. 이제 피보디 씨의 뒤를 이을 자네가 아니던가. 서로 돕고자 이렇게 모이는 게 아닌가. 개의치 말고 말해주게나. 안 그렇습니까, 피보디 씨?”
“······.”
그렇게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가 피보디에게 물었으나 그는 홍차로 입술을 적시고는 옅은 미소만 띠고 있을 뿐.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피보디나 모건은 아는 것이었다.
‘역시 모건 이 친구는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는구먼.’
모건···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 피보디에게 조카뻘 나이 차이가 있는 그는 확실히 재능이 있는 금융가였다.
그렇기에 1854년 사업 파트너를 고민할 때 수많은 후보 중에서 그를 선택했다.
10년 계약으로 그 기간이 끝난다면 자신은 은퇴하고 이후 사업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 운영가기로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너무 거친 방법을 많이 쓰고 있어.’
엄격하되 그런 불법적이거나 거친 방법은 피보디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몇 번 타일렀거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10년의 기간이 다 끝난 시점에 이르러 그는 투자금을 고스란히 빼내어 갈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모건이 눈치는 빨라서 그런 냄새를 맡아서 저러는 것일 가능성이 높을 듯싶었다.
“하하하, 실은 제 문제는 아니고 미국에 있는 제 아들 있지 않습니까.”
다만 커크먼 호지슨이나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가 혹여라도 그런 눈치챌세라.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은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시켰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요, 존 피어넌트 모건이라고. 하아, 로스차일드 씨의 아드님과 다르게 미국에서 일처리 하나를 제대로 못하나봅니다.”
“듣기로는 자네 아들이 전쟁에서 금과 채권 거래도 수익을 많이 올렸다던데?”
“그건 그런데 전신으로 얼마 전에 소식을 보내왔는데······.”
그는 무대에 서도 될 정도로 연기에 능숙해서 화제는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갔다.
“아, 정말입니까?! 허허, 아시아인이 굴러들어와서 사업을 하다니 참나······.”
거기에 이 자리의 구석에 자리한 또 한 사람의 40대 남자.
‘모건의 말에 맞장구치는 솜씨가 역시 대단하군.’
사실 모건까지는 커크먼 호지슨이나 로스차일드나 피보디에 비해 어리더라도 이 자리에 낄 급이 되었다.
다만 저 붉은 머리의 남자는 사실 모건이 추천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헌데 동양인이라고? 사업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자네 아들이 그리 언급할 정도면 크게 성공했나 보구먼.”
“오, 호지슨 총재님 말씀을 들어보니 그렇긴 하군요.”
뭐 그래도 적재적소에 끼는 리액션 하나는 타고나서 모임의 진행에 감초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 잠시만요! 그러고 보니 왕세자궁에 시녀로 간 제 조카 있잖습니까.”
“그래, 모리스 자네가 그런 이야기도 했지. 그 애가 무슨 이야기라도 귀띔해 주던가?”
“지금 들으니 생각이 났는데 앨버트 왕세자 전하를 뵙기로 한 미국 출신의 동양인 사업가가 있었다는데요···?”
모리스라는 이름의 남자, 거기에 그는 이런저런 루트로 정보통이기도 했다.
거기에 대대로 나름 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기도 했다.
“정말인가? 음, 아들 녀석 말로는 그 동양인 사업가가 마침 영국으로 갔다는 말이 들린다고 하더라만?”
“이거 정말로 영국에 와서 앨버트 왕세자님과 약속까지 잡은 거라면···허허, 대단하구먼.”
덕분에 이제 대화의 주제는 미국의 동양인 사업가.
“그 사람 이름이 뭔가? 그 정도라면 다른 건 몰라도 수완 하나는 대단하다는 거 아니겠나. 궁금하구먼.”
“태선 킴···이라고 하더군요.”
태선 킴, 김태선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모건을 고깝지 않게 여기며 잠시 침묵하고 있던 피보디조차 살짝 눈이 빛났다.
‘태선 킴이라.’
그 이름에는 그 역시 흥미가 동했다는 듯.
슬슬 은퇴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 시기 그가 이런 눈빛을 띤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
콘월 공작 저택, 달리 말해 왕세자궁의 대기실.
“······.”
사람은 여섯 명이나 있건만 침묵이 흘렀다.
그중 화이트하우스와 그의 조카 파이프업자 존 브라더튼이 이곳에서 긴장하고 있는 건, 사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하하, 너무 긴장들 하지 마시죠. 앨버트 왕세자님은 그리 엄하지 않고 사교적인 성격이시거든요.”
그럼에도 자기도 긴장한 존 브라더튼이 애써 이렇게 말할 정도로 다른 소파에 앉은 둘은 그야말로 돌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뻣뻣했다.
“하···하···하···그, 그런가요. 그래도 제가···화···왕세자 전하를···뵙다니···하하!”
“이봐, 새···샘! 말이 왜 그리 어눌한가. 편···편하게 하라고.”
그 둘은 바로 새뮤얼 앤드루스와 조셉 스완이었다.
‘왕세자 만나는 데 이 정도면 여왕을 알현하게 됐으면 아예 기절했겠군.’
그 모습을 보며 태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이건 그 둘을 탓할 건 아니기야 했다. 옆에 있는 샬롯조차도 애써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긴장한 것이 느껴질 정도이니.
‘뭐 나도 심적으로는 조금 긴장되지만··· 생각보다 괜찮네? 몸이 좋아서 그런가.’
그런 생각과 함께 검토하고 있는 서류를 보는데.
“킴 사장님은 괜찮으십니까?”
화이트하우스가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물었다.
다만 존 브라더튼이 조셉 스완이나 새뮤얼 앤더슨의 멘탈을 다독여주려고 건넨 말과 사뭇 느낌이 달랐다.
‘날더러 괜찮냐고 물으면서 정작 자기가 더 긴장하고 있네. 손도 떨고.’
그것은 아무래도 며칠 전의 만남 때문일 터였다.
“네, 괜찮습니다. 그러니 화이트하우스 씨도 아무 걱정 말고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태선은 여유로운 미소 띤 채 화이트하우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다독여주면서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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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도착한 바로 그날, 화이트하우스에게 답장이 왔고.
“화이트하우스 씨, 계십니까. 미국에서 온 태선 킴이라는 사업가입니다.”
태선은 호텔 직원이 이어준 마차를 타고 첼시의 화이트하우스의 사무실로 갔다.
“음, 미국에서도 편지는 줄곧 보냈지만 직접 와서 보니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뭐랄지 저택 느낌이네요.”
기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샬롯이 조심스레 말했다.
확실히 태선도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다.
“원래 회사는 버밍엄에 있고 런던에는 왕세자궁의 공사 건에 힘쓰라면서 왕세자 전하가 구해주셨다잖아요.”
“음, 그래서 여기를 구해준 것이려나요. 아무튼 화이트하우스 씨도 많이 부담스럽겠어요.”
끼이이익──!
“오, 킴 사장님! 오셨군요.”
그때 문이 열리면서 아마도 화이트하우스 본인···인 듯싶은 이가 나와 맞아주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태선 킴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샬롯 로렌스고요.”
“두 분 다 반갑습니다. 아시겠지만 조지 화이트하우스입니다.”
악수하며 인사 나누었을 때 마침 그의 뒤로 한 청년이 더 나오는 게 보였다.
“아, 마침 나왔군요. 여기 이 아이는 조카인 존 브라더튼인데 파이프 관련해서 어린 나이에도 실력이 상당히 괜찮지요.”
‘화이트하우스에 존 브라더튼이라. 드디어 만났군.’
사실 화이트하우스는 특허를 보유했지만 사업적으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다만 조카 존 브라더튼은 수완도 있어서인지 사업이 번창한다는 사실을 태선은 이미 알고 있었다.
‘뭐 이번에는 일을 따내려는 적극성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버리게 된 것 같지만··· 어차피 나한테는 잘됐어.’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고 화이트하우스의 구세주가 되어주면 파이프 석유 운송을 위한 공사 큰 전력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내 화이트하우스와 존 브라더튼을 따라 응접실로 갔다.
심지어 저택에는 왕세자가 신경을 써줘서 하녀도 있어 차와 쿠키를 대접받았다.
물론 내내 화이트하우스의 표정은 안 좋았지만··· 아니, 오히려 하녀만 봐도 부담과 압박감을 느끼는 듯싶었다.
“손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나가있거라.”
화이트하우스가 하녀들을 내보냈다.
“그···뵙자마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조금 그렇지만 편지에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만한 단서를 어쩌면 알고 계실지도 모르신다···고요?”
그러고 눈치 보며 조심스레 묻자 태선은 뭐가 이렇게 급하냐는 듯 옅게 웃었다.
“일단 정확한 사정을 한 번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편지에서 구체적인 사정을 알려주지 않아서 대략적으로 추측하고 그렇게 말씀은 드렸지만···상세히 들어보면 또 모르지요.”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물론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런던은 물론이고 영국 각지의 난방업자를 죄다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거든요.”
화이트하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는데 자문을 구한 결과가 어떠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마침 킴 사장님이 편지에서 난방 분야에도 관심이 있다고 하셨으니······. 존, 거기 도면 좀 가져와봐라.”
그리고 테이블에 도면을 펼쳐놓고 화이트하우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무려 30분 동안 그의 말을 듣고서 태선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다행히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군.’
이내 태선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만 그 전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오···되는 겁니까?! 과연 미국에서 스완 씨의 전구를 성공시켰다는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군요. 무슨 문제인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게 기술적인 건 아니고 계약에 대한 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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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시한 계약 문제 중 하나는 거기서 바로 해결했고.’
다른 하나는 영국 왕실과 계약에 화이트하우스뿐 아니라 당사자로 이쪽을 넣는 것이었지만 이건 왕세자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터였다.
‘뭐 들어보니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는 주의···인 것 같으니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잠시 생각하는 사이 대기실 문이 열리고 의전 담당 왓킨슨 서기관이 들어와서 고했다.
“왕세자 전하께서 방금 각 장관들과 회의를 마치셨습니다. 준비하시지요.”
꿀꺽───!
괜히 긴장한 눈으로 화이트하우스가 태선을 봤다.
그뿐 아니라 존 브라더튼은 물론이고 조셉 스완에 새뮤얼 앤드루스까지.
심지어 샬롯도 약간 긴장한 듯한 기색으로 굳은 채였다.
“자, 모두 준비하죠!”
그렇기에 태선은 일부러 큰 소리 내서 말했다.
“왕세자 전하를 뵐 준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