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77
077 왕실 계약(3)
“이번 공사는 스완 제너럴 일렉트릭의 기술로써 진행하게 될 겁니다.”
앨버트 왕세자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왕세자답지 제법 들어주는 리액션이 괜찮다.
아니면 지금 기분 좋아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태선은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하여 앨버트 전하가 영국 법인 설립을 도와주시면 공사에 도움이 될 겁니다.”
“회사 설립이라. 그게 불가능해서 말을 꺼낸 건 아닐 테고.”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왕세자가 옅게 웃었다.
“빠른 시일 내로 가능하면 좋겠다는 거군.”
“예, 바로 그렇습니다.”
화이트하우스와 계약 건 이야기는 첫 만남 때 다 끝냈다.
다만 엄연히 이 계약 주체의 한쪽은 영국 왕실.
그러니 이쪽과도 이야기가 되어있어야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실컷 일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으니 확실하게 해둬야 하니까.’
“헌데 꼭 영국 법인을 세울 필요가 있는가? 미국 회사여도 괜찮은데.”
“이번 한 번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서요. 아까도 추후 새 기술이 생기면 추가해드린다고 말씀드렸듯 말이지요.”
“아아, 그랬었지. 그런 마음가짐이었다니 더 마음에 드는군!”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됐다. 슬슬 계약서 수정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겠어.’
사실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 이미 계약을 맺었는데도 자신을 위해 고치자는 요구는 간단하지 않아서였다.
다름 아닌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왕실이 상대라 자칫 자기 체면이 손상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왓킨슨, 방금 들었지? 상공회의소장에게 전해두게. 태선 킴 회사의 법인 설립 신청은 바로 처리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왓킨슨이 답하는 사이.
“아울러 영국 왕실과 계약에 우리 회사 이름도 올릴 영광을 주신다면 다른 회사나 기관에 협력을 구할 때도 일이 더 쉽고 빨라질 것입니다.”
계약하자는 말을 구실 좋게 포장해서 슬쩍 들이밀었는데 다행히 왕세자도 그게 좋겠다는 반응이었다.
“오, 그렇군. 자네가 끼면 계약서 내용도 달라져야 하겠군. 왓킨슨?”
“예,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왕세자의 의전 담당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이쯤 되면 저 왓킨슨이라는 서기관은 자동응답기인 것 같았다.
“······.”
다만 아까 왕세자의 요구로 무시하는 발언은 정정하고 사과까지 했지만.
왕세자의 의전 담당 서기관이라면 본투비 영국 귀족이라 그래서인지.
자신을 슬쩍 보는 표정에 순간적으로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뒤끝···은 아닌 것 같고 저 사람도 저 사람 나름대로 중대한 사안이라 신경 쓰나 본데.’
그렇다면 결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업도 걸렸지만 왕세자가 이렇게나 밀어주는데 실패해서야 되겠는가.
‘특히 앨버트 왕세자 같은 기분파들이 기대한 것보다 결과가 좋으면 더 잘 기억해주거든.’
뭣보다 마침 난방과 수도관 작업이라면 특별한 선진 기술을 더하지 않더라도 퀄리티를 올릴 방법이 있었다.
21세기 스타일의 화장실을 보여주는 것.
‘18세기 말에 이미 수세식 변기는 발명됐고 심지어 수압 프레스도 있다고 들었어.’
다만 그걸 21세기 스타일로 세련되게 정돈되고 다듬어지는 것은 아직 200여 년 시간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문명의 발전은 근본적으로는 원류가 되는 기술이 받쳐줘야 하겠으나 동시에 커버로 씌워지는 디자인의 발전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만약 디자인이 구리면 그 원류가 되는 기술이 무시 받거나 나중에 빛을 볼 수 있으므로.
‘나가는 대로 타일공이나 유기장인도 알아봐야겠네.’
***
호로록──!
티 하우스에서 차를 마시며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은 흘깃 회중시계를 봤다.
넓지는 않지만 잘 꾸며진 방이었다.
특히 여느 티 하우스의 다른 공간이 개방된 것과 달리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 있었다.
“미안하네, 주니어스. 내 좀 늦었구먼.”
이윽고 붉은 머리칼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일전 영국은행 총재 커크먼 호지슨의 저택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도 모건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사내였다.
“그만큼 바삐 움직여주느라 그런 거 아니겠나. 남작 작위를 가진 자네가 열심히 해주다니 고마울 뿐이야.”
“남작이라도 허울만 남은 작위일세.”
모건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바로 로이 모리스 남작이었다.
“그나마 자네를 만나 사업도 하고 그 연줄로 친척들을 여기저기에 꽂아주고 체면치레하면서 살고 있지.”
그 말에 주니어스 모건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모리스 남작의 반응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다리를 꼬고 옅게 웃는 모습은 상전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알아보라고 시킨 건 어떻게 됐나?”
더구나 자연스레 하대하듯 던지는 질문에 이르러서는 누가 귀족인지 누가 외국인 사업가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소상하게 알아왔네. 일단 왕세자를 만났다는 검은머리 미국인 사업가는 자네가 말했던 태선 킴이 맞았어.”
“흠···역시 그랬나.”
짐작이 맞았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주니어스 모건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왜 하필 지금 영국에 왔을까. 더구나 그 짧은 사이 왕세자를 만날 수 있는 연줄은 어떻게 만들었고.”
“영국에 온 이유야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그런 거 아니겠나?”
모리스 남작은 자기 멋대로 확신하고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까지 쳤다.
“화이트하우스라는 웨스트 미들랜드 파이프업자가 왕세자와 수도관 계약을 했는데 거기 끼었다는구먼.”
“흠, 그게 어떻게 열등감 극복으로 연결이 되는가?”
“그야 간단하지. 동양인 놈이 미국에서 운 좋게도 사업에 성공했는데 주변 시선은 따가워서 둘러봤겠지.”
모리스 남작은 마치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도 되는 양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걸 보는 모건의 시선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 왕실에 묻어가보려 대서양을 건넜다? 황실과 계약을 맺은 업자를 마침 딱 알아내서는 자기를 끼워넣게 구워삶았고?”
대놓고 티 내지는 않았으나 약간 한심스러워하는 시선을.
“그렇지!”
심지어 눈치가 느려 아직도 그걸 못 알아채고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모건은 결코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잘 모르는 건 일러주면 되고 눈치가 필요한 일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면 그런 능력을 가진 다른 부하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적당히 신분이 높고 적당히 인맥도 있으며 적당히 멍청해서 부려먹기 좋은 작자는 모리스 남작뿐이지.’
“···왜 그러는가?”
더구나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몇 초쯤 가만히 보고 있자 넌지시 물어왔다.
“존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킴의 사업체가 잘 나가는 듯 보이지만 지금 상황이 여유 부릴 때는 아니었네.”
“존···이면 자네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 말이지.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요새 한창 재미 보고 있다면서?”
“듀폰과 록펠러라는 쓸만한 동업자를 구한 모양이야.”
그는 ‘록펠러’라는 이름을 언급하면서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특히 그 록펠러라는 자를 이용해서 태선 킴의 사업 기반을 뺏고 있다던데······. 그런데 굳이 지금 영국에 온다?”
“음···듣고 보니 이상하구먼.”
모리스 남작이 무안했는지 뺨을 긁적거리자 이내 모건은 그걸 보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허나 우리가 미국의 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으잉? 나야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자네는··· 그, 미국에 존이 있지 않나?”
주니어스 모건은 그 말에 무심하게 답했다.
“미국 일은 존 그 아이가 알아서 해야지. 마찬가지로 나는 영국에서 내 일을 알아서 할 따름이고.”
“허어, 과연 주니어스 자네는 뭔가 달라도 다르군. 사업가로 성공하려면 핏줄에게도 그리 태연할 수 있어야 하는 건가.”
모리스 남작이 감탄하는 걸 보며 모건은 속으로 조소했다.
‘귀족이나 되었으면서 아직 모르다니······. 그나마 믿을 건 당연히 혈육뿐이지.’
말은 이렇게 했어도 모건은 누구보다 미국에 있는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을 누구보다 믿고 신뢰했다.
다만 공공연히 그런 기색을 비치면 그건 자신의 약점이 될 것이기에 모리스 남작 앞에서도 블러핑을 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곳 영국 금융계는 살얼음판과 같으니······. 지금 호지슨이나 로스차일드와 손잡고 베어링 은행과 대적하고 있지만 누가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고.’
더구나 요새 자신의 뒤를 밀어주던 조지 피보디가 파트너 계약이 끝날 때가 도래하자 뭔가 눈치가 이상했다.
자칫 자신과 조지 피보디 사이의 그런 균열을 피 냄새 맡은 피라냐 무리가 끼어들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러니 위장은 필수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태선 킴이 왜 영국에 와서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왜 왕실에 접촉했는지는 좀 알 것 같군.”
“알겠다고? 역시 모건 자네 심계는 깊구먼. 뭔지 내게도 일러주게나.”
다만 위장과 동시에 아들이 미국에서 벌이는 사업도 가급적이면 백업할 생각이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 담지 말란 말처럼.
‘만약 영국에서 내 사업이 흔들리면 미국에서 아들이 구축해놓은 기반을 토대로 얼마든지 일어설 수가 있다.’
반대로 아들의 사업체가 흔들리거나 동력을 필요로 하면 지금처럼 자신이 알게 모르게 도울 수도 있고.
마치 머리 두 개의 뱀처럼.
“미국에서 태선 킴은 저가에 유전과 정유회사를 쓸어담고 그걸로 윤활유를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는구먼.”
“석유업자였나. 하지만 고작 그걸로는 금융업을 하는 자네나 자네 아들에 비해 특별할 것도 없는데?”
“거기에 영국에서 조셉 스완이라는 전구 발명가를······.”
조셉 스완의 이름이 나오자 모리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끼어들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앨버트 왕세자를 알현할 때 몇이 더 있는데 그 중 조셉 스완이란 자도 있었다고 했어.”
“···음, 그랬었나. 영국 출신 동업자를 데려왔다면 역시 사업 모델을 이식하려 한 것이 맞겠군. 다른 정보는 없나?”
모리스 남작이 머뭇거리자 모건은 직접 짚어주었다.
“예를 들면 태선 킴이 도중 끼어든 계약이 무엇에 관한 것이라거나?”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말해주려다 깜빡했군. 수도와 난방 공사라는데 사실은 그 배경에 앨버트 왕세자가······.”
모리스 남작은 이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조카를 왕세자궁에 시녀로 밀어넣었더니 여자들 사이 네트워크에서 나온 정보가 죄다 흘러들어왔다.
뭐가 어떻게 쓸모 있을지 모르기에 주니어스 모건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수도관에 난방을 교체할 정도의 사업에 끼어들었고 전구 회사의 동업자가 같이······. 공사를 하는 김에 전구나 발전기도 들이게끔 설득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니겠나. 그런데 은행업도 아니거늘 그런 일에 우리가 굳이 신경쓸 필요 있겠나?”
늘 그렇듯 누가 사업을 하면 돈이나 빌려주고 성공하면 그 이득에서 좀 떼어먹고.
사업가가 실패하면 어떻게든 쥐어 짜내 원금을 토하게 만들고 그걸로 다시 새로운 사업가를 찾아나서고.
여태 그래왔듯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 묻는 표정.
“신경 쓸 필요가···있지. 물론 있고 말고.”
하지만 그에 대한 주니어스 모건의 답은 이러했다.
‘미국에서 아들의 사업체를 키워줘야 하니. 그걸 위해 태선 킴은 록펠러의 자양분이 되어야 하고, 아들 녀석이 록펠러의 양분을 빨아들이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결과는 없다.’
다만 이걸 말할 순 없으니.
“내가 듣기로 윤활유나 전구 모두 지속적인 연료가 투입되어야 하더군.”
“나도 그렇게 들었네. 하지만 그게 왜···?”
“그걸 쥐고 있으면 지속적인 이득이 생긴다는 말인데 마치 이자와 비슷하지 않나?”
“이자라. 오오, 생각해보니 그렇게도 보이는군.”
모리스 남작이 납득했다.
“거기에 영국 왕실이 고객이 된다는 말일세. 사실 왕실이 돈을 빌려가더라도 이자를 미룰 수는 있을 걸세. 그러나 당장 빛이 안 들어올 텐데 체면 때문에라도 전구 사용료를 미루겠는가?”
“그럴 리가 없지. 자네 말을 들어보니 태선 킴이라는 친구 머리를 비상하게 굴렸군!”
‘···모리스의 말대로 확실히 태선이라는 놈 머리가 비상하기는 하군. 돈 빌려주지 않고 체면과 편리를 미끼로 걸어 지속적으로 돈을 뜯어낼 방법을 찾아내다니 말이야.’
왕실이 전구 사용료를 지불하면서 빛을 밝히게 되면 그건 왕실의 명예를 드높이게 되니 오히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돈도 받으면서 호의적인 관계까지 챙겨가고 다른 사업에도 유리하게 작용하겠지.’
거기서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생각이었지만.
‘···혹시 내가 알지 못한 다른 수도 있는 것이면 정말 무서운 놈이다.’
다만 그렇기에 이는 오히려 부전자전이라고 모건가의 피에 새겨진 본능을 자극했다.
‘탐나는군. 빼앗고 싶다, 그 태선이라는 놈이 일군 사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