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8
008 샌프란시스코(1)
캘리포니아에 벌링게임이란 이름의 도시가 있다.
태선이 사귄 미국인 친구 제이크의 사촌이자, 몇 주 뒤에는 주청미국대사로 임명될, 바로 그 ‘앤슨 벌링게임’으로부터 따온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시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건 누구의 결정인가?
‘바로 윌리엄 C 랠스턴이지.’
링컨이나 록펠러 같이 어디서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그런 네임드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캘리포니아에서만큼은 윌리엄 랠스턴의 이름값이 그 둘에 뒤지지 않는다.
그의 여러 업적 중 하나를 꼽자면 ‘캘리포니아 은행’을 설립했다는 것.
‘미국에서 처음 메인PD 맡은 다큐가 은행 관련이어서 기억하지.’
물론 그 캘리포니아 은행이 지금의 캘리포니아 은행은 아니다.
아마 지금 시기의 랠스턴은 다른 은행을 운영하느라 한창 바쁠 시기이다.
얼마 안있어 그 은행과 다른 은행을 합병해서 캘리포니아 은행을 만들 것이고, 파산 위기를 겪다가 미쓰비시에 인수되면서 새로운 은행이 된다.
자그마치 뉴욕에 본점을 두고, 무려 수억 달러 자산을 보유하는 거대 은행으로.
그런 큰 은행의 씨앗을 캘리포니아에 뿌린 사람이 랠스턴이다. 하물며 벌링게임과 절친한 사이라는 건, 그가 정계에 닿는 인맥도 간단하지는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밴더빌트와도 연줄이 있었다지. 밴더빌트의 철도와 연결한 운송 회사 같은 거였던가.’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그렇다.
요점은 랠스턴의 사업적 영향력과 재산은 대단하다는 것.
“혀, 형님메! 이렇게 큰 집이 있다니.”
“태경아, 영어로.”
“아차! 집이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주의를 주긴 했지만 태선도 눈앞에 있는 대저택을 보고 적잖이 감탄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실물이랑 사진은 다르네.’
같은 시대라도 억 소리가 날 정도의 발전 격차.
불과 몇 개월여 전에는 조선에 있었던 태선이다.
거기서는 흙길이나 초가집이 당연했다.
그러하거늘 눈앞의 랠스턴가 저택은 어떤가. 저택을 그대로 21세기 유럽에 옮기더라도 고풍스럽게 어울릴 대저택이다.
“형, 우리 정말로 이 집에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
“물론이지. 그렇지만 너무 경거망동하지 말고 배 타고 오는 동안 알려준 대로 예의 지키면서 있어야 한다.”
집안 유전자가 어디 가진 않았는지 그새 마음을 다잡은 태경은 영어로 곧잘 답했다.
그런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태선은 저택에 기별을 넣었다.
잠시 후 와이셔츠에 검정색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나와 태선과 태경 형제를 맞이했다.
다만, 갸웃거리는 고개는 감추지 못했다.
랠스턴가의 집사인 모양인데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검은머리 동양인······거기에 한복 차림이니 말이지.’
물론 검은머리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을 거다.
이 시기 캘리포니아주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청나라 노동자가 많으니까.
캘리포니아 청나라 영사관이 생기는 건 1880년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서로 잘 뭉치는 것이야말로 화교의 강점이다.
이 시기에도 이미 그들은 중화회관을 만들어 청나라인들의 네트워크가 형성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발전해서 나중에 캘리포니아 차이나타운이 될 정도로 이때의 청나라 사람의 규합력은 대단했다.
의아한 눈빛으로 형제를 바라보던 집사를 두고 태선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집사가 흠칫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이크 벌링게임의 친구, 태선 김이라 합니다. 그 친구 소개로 윌리엄 랠스턴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여기 그의 편지도 받아왔습니다.”
유창한 영어가 나오는 순간 집사가 그대로 굳었다.
태선이 앞으로 내민 편지를 살짝 팔랑거리자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주···주인님께 보고드려 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길.”
집사도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손님이거늘 들여서 차라도 대접해야지 확인한다면서 밖에 세워두다니.
아쉽지만 미국에서 동양인이 받는 처우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오히려 집사가 방금 자신의 말을 그대로 믿고 주인에게 보고하러 간 일이야말로 이례적이라 해야 하려나.
잠시 기다리자, 다시 문이 열렸다.
다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집사만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집의 안주인인 엘리자베스 랠스턴이라 해요. 제이크의 친구시라고요. 실례지만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태선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했다. 랠스턴 본인을 보면 또 해야겠지만, 이역만리 타지에선 인맥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여자는 랠스턴 가문의 안주인.
인사쯤은 얼마든지 해주지. 아니, 자기 이름을 기꺼이 들어주겠다면 환영이다.
태선은 자신의 이름에 동생 태경까지 얹어서 소개했다.
“남편은 지금 서재에 있어요. 제이크가 보낸 추천서를 읽으며 기다리고 있죠.”
태선은 엘리자베스 랠스턴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서재로 향했다.
아까 자신이 집사에게 건넨 추천서가 랠스턴의 털이 수북한 손에 쥐어져 있었다.
방금 막 다 읽은 참인지 랠스턴은 책상 한쪽에 편지를 내려놓고는 웃으며 환대해줬다.
“어서 오게. 윌리엄 채프먼 랠스턴이라 하네. 제이크가 보낸 편지는 방금 본 참이야.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군.”
“김태선입니다. 김이 성이고 태선이 이름이지요. 이쪽은 제 동생인 태경이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김태경이라 합니다. 존경스런 선생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태선이 랠스턴과 악수하는데 태경도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물론 영어 인사였고 태선이 가르쳐준 성과였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태선의 영어에 이어 태경까지 영어로 막힘없이 인사하자 랠스턴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너털 웃었다.
“영어를 이렇게나 잘 하다니 놀랍군.”
“열심히 배웠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려면 그 나라 말부터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그래. 맞는 말이지. 재차 환영하네. 일단 앉게. 차는 아직인가?”
랠스턴은 차를 내오라고 채근하더니 태선을 앉혀두고는 본격적으로 대화를 텄다.
“제이크가 보낸 편지를 보니, 자네는 한동안 미국에 머무르며 문물이나 제도에 대해 배우고 싶다지. 내 작은 힘이나마 지원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언젠가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하하하, 부디 방금 한 말을 잊지 말게나. 자네라면 분명 성공해도 할 듯하니.”
역시, 어딜 가나 인맥이 중요하다. 제이크의 추천서 한 장만으로도 시작이 순조롭다.
게다가 랠스턴의 그릇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사업가는 사업가인지, 농담으로 툭 던진 것 같아도 이 말을 할 때 그의 눈빛은 분명 이채를 띠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투자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즉, 자신이 뭘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랠스턴에게 뭘 얼마나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는 점점 더 달라지게 될 것이다.
‘뭐 그럼 나야 좋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지만 사업에서는 기대가 크면 그로 인해 생기는 이점도 있으니까.’
그리고 태선은 그걸 최대한 챙겨먹을 생각이었다.
“그럼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편지에서는 자네가 워싱턴으로 갈 예정이라던데?”
“예, 동부로 갈 생각이기는 하지만 당장은 아닙니다. 미국은 아주 큰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동부와 서부로 쉽게 오가기가 힘든데 서부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니까요.”
“허허, 그런가.”
고작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거늘 대화하면 할수록 랠스턴의 표정에 요놈 보게 하는 감정이 한층 짙어졌다.
“더구나 오는 동안 조금 들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나라가 북과 남으로 갈라져 전쟁하고 있다더군요.”
“?!”
거기서 태선이 남북전쟁을 언급하자 랠스턴은 아까 문 앞에서 집사가 한 것과 비슷한 표정을 지어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자신들이 동아시아에서 무슨 전쟁 있었다더라··· 하는 건 가십거리처럼 종종 있는 일이지만, 반대로 검은머리 동양인 입에서 자신들 나라의 전쟁에 대해 듣게 되다니.
참신하다 못해 충격이었다.
“···여독도 있고 하니 당분간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르며 정세 파악도 했으면 해서요.”
잠시나마 태선의 남은 말마저 흘려들을 정도로 말이다.
아내인 엘리자베스가 직접 커피를 내오자 랠스턴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렇군. 얼마든지 머무르다 가게나. 거처는 당장 구하기 어렵다면 내 집에 머무르게나.”
“오,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감사하지요.”
“이렇게 시간 날 때 같이 커피라도 들면서 이야기 나누세. 뭐든 필요하면 말하고.”
조금 전의 태도가 단순히 제이크의 얼굴을 봐서였다면, 지금은 호기심이 조금 더 섞였다.
필요한 거야 많지. 추천서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줄곧 그 궁리를 해왔다.
‘랠스턴도 그렇고 다른 한 사람도 은행 계열이야. 그걸 감안해본다면.’
돈 좀 주십쇼.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요!
···라는 것이 궁극적인 바람이었지만 지금 그 말을 한다고 해봐야 얼마나 줄까.
사업을 위한 돈이 아니라 생활비에 보태라는 정도나 주려나.
태선이 바라는 건 그런 스케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사업을 할 때, 은행의 제대로 된 백업을 원한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부탁은 은행 업무를 돕게 해달래서 인맥이라도 쌓거나 돈 흐름을 보는 건데··· 솔직히 초면에 말해봐야 안 해주겠지.’
하지만 배 타고 태평양을 건너면서 캘리포니아에서 반드시 어떤 걸 얻어서 나가겠다고 생각한 것은 있었다.
그걸 위해서는 랠스턴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은행업 동업자들에게도 신망을 얻어둬야 한다.
“필요한 것이라······. 그럼 신문과 책을 보게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하, 신문이나 책이야 얼마든지 보게나. 오히려 자네 같이 머리 좋고 우리와 다른 시야를 가진 청년의 견문을 늘린다면 나로서는 좋은 말상대가 생기니 환영이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제 넘은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기왕 미국에 왔으니 훌륭한 사람들을 가능한 많이 만나고 사귀어보고 싶습니다.”
“하기야 그럴 테지. 그러면 기회를 봐서 내 그런 사람들도 소개해주도록 함세.”
랠스턴은 짐짓 장하다는 듯 웃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소개해주는 사람들에게 내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자네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걸세. 내 믿어봐도 괜찮겠는가?”
“물론입니다. 동양에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 지날 때마다 눈 비비고 다시 본다는 뜻이지요.”
“재밌는 표현이군. 모레쯤엔 눈을 비비고 자네를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보지.”
태선은 짐짓 겸손하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물론 그 기대에 응해드리죠.’
지금 자신은 인맥 말고는 없다. 심지어 그 인맥도 지금은 몇 가닥 실과 다름없다.
다만 향후 미래의 흐름을 알거니와 200여 년의 역사를 농축시켜서 진보된 최신 학문을 대학교에서 배웠다.
행정확과 경제학 복수 전공. 이건 어느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랠스턴이 종사하는 은행 업무에도 그러할 터였다.
‘특히 이 시기 은행업무는 현대와 달리 고도로 전문화되지는 않았고 경제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니까.’
중요한 건 랠스턴이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신이 아는 걸 푸는 속도의 조절.
그걸 생각하며, 이날 오후 태선은 한동안 랠스턴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