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80
080 보일러(1)
부강한 나라의 왕족쯤 되면 좋은 점은 셀 수도 없을 것은 자명했다.
하물며 지체높은 대영제국의 왕세자임에야.
“왕세자궁으로 쓰는 저택이 따로 있고 별궁도 따로 있고 집무실도 따로라니······.”
정원에서 물을 끌어 수도관으로 연결하던 존 브라더튼이 문득 중얼거렸다.
일곱 살 차이 났지만 세대가 비슷한지라 브라더튼과 친해진 새뮤얼 앤드루스가 작업을 도와주며 응수했다.
“게다가 나는 궁전에 여왕님 가족들이 같이 사는 줄 알았는데 따로였다니.”
“쯧, 자넨 어릴 적 미국에 살아서 그런지 나보다 모르는군. 성인 되면 따로 살고, 집도 다 가깝지는 않고 멀리 있는 건 또 따로 있다더라고.”
끼이익──끼이이이익───!
수도관 밸브를 같이 풀면서 새뮤얼이 투덜대듯 답했다.
“나야 아버지 따라 영국과 미국을 계속 왔다 갔다 해서 잘 모른다고.”
“아, 그랬었지. 아무튼 진짜 부럽구먼.”
“왜 아니겠어. 집도 몇 채고 여배우도 내키는 대로 만나면서 마누라 기분 풀어준다고 이런 공사까지···어어, 수압이 세지는데?”
푸화하핫──!
“인부들이 수원 쪽의 파이프 위치를 제대로 잡았나보군. 샘, 이제 밸브를 잠가야 해. 셋까지 세면 같이 돌리자고.”
“알았어.”
“하나, 둘, 셋···지금이야!”
두 사람이 힘을 모으자 곧 밸브는 단단히 조여졌다.
끼리릭──!
“후우, 이제 물은 끌어왔군. 압력도 충분하고.”
“고생했어.”
“자네야말로 수고했다네. 왕세자궁 내부에 보일러 쪽은 스완 씨와 삼촌이 갔으니 잘들 하실 거고······.”
우지끈──쾅──쿠웅──!
잠시 휴식을 즐기며 다시 만담을 나누려는 차에 큰 소리가 브라더튼의 말을 끊었다.
“······그건가.”
“···그놈들이구먼.”
며칠 전 처음 굉음을 들었을 때는 자신들이 있는 왕세자궁 현장에서 사고라도 났는지 알고 놀랐었다.
쿠르르르릉───쿠우웅──!
“저쪽은 대체 뭘 하는 거야? 같은 공사를 하는 거 맞나?”
“며칠 동안 이런 걸 보면 사고는 아닌데.”
뿐만 아니라 건물 안에서 작업하던 조셉 스완과 화이트하우스와 태선조차 즉시 밖으로 나와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며칠 동안 내도록 반복되고 있어 이제 여기서 나는 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아, 왕세자님께는 조금 서운하군. 우리를 못 믿고 저리 요란하게 공사하는 업자를 추가로 고용하다니 말이야.”
존 브라더튼이 이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뭐 좋게 생각하자고. 우리는 왕세자궁이고 저긴 별궁이라지 않는가.”
“뭐 그렇기야 하지만 그래도 기왕 두 군데 해야 했으면 우리에게 맡기면 됐을 텐데.”
못내 아쉬워하는 브라더튼의 말에 새뮤얼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 둘의 뒤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어머, 제가 듣기로 처음에는 공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셨다면서 이제는 현장을 늘리지 못해서 고민이신가요?”
한쪽 팔에 피크닉 바구니를 걸치고, 와이셔츠와 치마에 끈 넥타이는 단정히 목에 장식한 그녀는 샬롯이었다.
“어, 로렌스 양이시군요. 기척이라도 하고 오시지.”
“했어요. 샘과 존 두 사람이 대화에 몰입해서 듣지 못했을 뿐이었죠.”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샬롯은 바구니 속에서 쿠키를 꺼내서 두 사람에게 나눠줬다.
“간식이군요. 이 시간만 기다렸다니까요.”
“브라운스 호텔 쿠키···막 구워낸 걸 가져오셨군요.”
“자, 우유도 한 병씩 받으세요.”
병에 든 우유를 나눠줬지만, 새뮤얼과 브라더튼은 벌써 각자 받은 커다란 쿠키를 거의 다 먹어치운 터였다.
그러고는 하나만 더 줄 수 없겠냐는 듯 쳐다봤지만 샬롯은 단호히 선을 그었다.
“안 돼요. 나머지는 왕세자궁 시녀들한테 줄 쿠키라는 거 잘 알잖아요.”
“그···그렇죠. 예, 알죠. 그냥 쳐다보기만 한 거였어요.”
괜히 브라더튼이 주눅 든 목소리로 답하자 샬롯은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저녁에 저택에 돌아오면 다 같이 만찬을 즐기자고요.”
“로렌스 양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하하, 브라더튼 이 친구가 나하고 이야기할 때는 다르게 왜 이렇게 점잔을 빼나? 그렇지만 아서게나. 샬롯은 이미 태선 사장님이 계신······.”
“크···크흠! 다른 분들은요?”
샬롯이 괜히 헛기침까지 해가면서 급히 말을 끊자 새뮤얼은 괜히 자기가 즐거운지 싱글벙글하면서도 대답해줬다.
“늘 그렇듯 안에서 보일러와 배관 작업을 하고 계시죠.”
“그렇군요. 이만 가볼게요. 고생들해요.”
“예, 샬롯도요. 참, 그리고 수도관 작업은 이제 다 끝났다고 전해주시고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인 샬롯은 곧 왕세자궁으로 들어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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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향한 곳은 보일러를 설치 중인 장소가 아니었다.
“어머, 샬롯 왔군요.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얘는 요새 샬롯 올 때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안젤리카는 사실은 샬롯이 아니라 브라운스 호텔 쿠키를 기다리던 거 아니려나?”
“오호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샬롯 믿는 거 아니죠?”
왕세자궁으로 쓰는 저택에서 시녀들이 휴게실로 쓰고 있는 별채였다.
“절 기다려주셨다니 너무 기쁘네요, 후훗. 오늘도 브라운스 호텔 쿠키를 가져와봤는데 같이 먹어봐요.”
“우리도 샬롯 오면 쿠키랑 먹으려고 이걸 준비했답니다.”
“원래 왕세자님께 선물로 들어온 고급 홍차인데 우리한테 내려주셨어요.”
쪼르르르르───!
그렇게 서너 명의 여자들은 티타임을 즐겼다.
서먹함 따위 없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기야 샬롯은 미국에서도 사교적인 성격으로 회사뿐 아니라 관공서에서도 일을 원활하게 잘 처리하지 않았던가.
“아가씨들이 너무 부럽네요.”
그런 장점은 여자들 사이의 관계가 되자 더 극대화되어 발휘되는 듯했다.
애초에 칭호부터가 ‘아가씨들’이라고 해주고 있었다.
“어머, 부럽다뇨? 난 샬롯이 부러운데.”
“나도 그래. 왕세자님···흠, 아무튼 샬롯이 모시는 분은 엄청 멋있던데요?”
“그러게요. 동양인은 막 괴물처럼 생겼는지 알았는데 그렇게 멋진 분도 있어서 놀랐어요.”
“혹시 둘이···그···좀 그렇고 그렇다거나 한 관계는 없었어요?”
이런 대화에서 그렇고 그런 것이 있다고 잘못 말을 꺼내면 겉으로는 호들갑 떨어도 질투를 사고 말겠지.
“에이, 그런 거 없어요. 저희 사장님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칼처럼 끊으셔서.”
“어머, 기사 같아. 그러니 더 멋있어.”
“나도 슬쩍 일하는 모습을 봤는데 소매까지 걷고 열중하는 모습이 정말 반할 정도였다니까.”
“안젤리카, 너는 아무나 보면 반하잖니?”
“아···아니에요, 큰 언니.”
태선에 대해 환상을 가지면 알아서 자신은 빠져주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지금 사장님께서 하시는 작업이 성공적으로 되면 아가씨들이 하시는 일도 수월해진다네요.”
호기심도 살짝 자극하고.
“그러고 보니 나도 듣긴 했는데···구체적으로 뭐가 더 쉬워지는 거려나요?”
“일단 물 데우느라 너무 힘드셨잖아요. 것도 할 필요 없고 석탄도 나를 필요가 없고 그러니 자연히 빨래도 그렇겠죠.”
“어머, 그렇게만 되면 엄청 좋겠는데?!”
“어머나, 왕세자님 위해서 만드는 거라더니 우리한테도 이득 되는 점이 있었네요!”
그러는 와중에 이게 잘 되면 자기들한테도 이득이라는 점을 슬쩍 어필했다.
이러니 샬롯이 환대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흐흠!”
다만 샬롯이 환대를 받는다고 본래 이 무리 속에 겉도는 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안젤리카, 빵집에 가서 주문해둔 크로아상을 받아와주겠니?”
큰 키에 날카로운 눈매, 꼬장꼬장한 얼굴의 최고참 하녀가 안젤리카라는 하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네.”
누가 봐도 적당히 틈을 봐서 일부러 내보내는 눈치였다.
내키지 않은 눈치였지만 어쩌겠는가.
안젤리카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나가자마자 다른 하녀 하나가 슬쩍 입구로 가서 복도 쪽을 살폈다.
“에린 언니, 갔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에린이라 불린 최고참 하녀가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샬롯이 저번에 부탁한 거 있잖아. 봤는데 그게 안젤리카 쟤였더라고.”
“···저, 정말인가요? 저도 이야기만 듣고 확신은 못 해서 부탁드렸던 건데···하아!”
자못 충격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말과 달리 샬롯은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태선의 말이 맞았어.’
단지 이들 앞에서 대놓고 그 티를 내서 좋을 것도 없고 특히 이야기를 더 끌어내려면 이런 리액션이 훨씬 좋았다.
“글쎄, 태선이나 다른 분들이 밤에 가면 저 애가 몰래 가서 엿보더라니깐.”
봐라, 말이 술술술 나온다.
“그뿐 아니라···엘리, 네가 봤다는 걸 직접 말해줄래.”
“네. 별궁에 친구가 있어서 만나러 갔었는데······저 정말로 놀랐다니까요. 거기서 안젤리카가 거기서 공사하는 분인지 모르겠는데 웬 남자분에게 한참 동안 얘기하더라고요.”
“뻔하지. 듣자하니 이 공사가 그냥 공사가 아니라 정치가 얽혔다면서요.”
거기다 한두 명이 말을 쏟아내자 이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수다의 장이 열렸다.
“뻔해. 태선 사장님이 잡은 기회를 밀어내고 자기네들이 차지하려는 거겠지.”
“맞아, 맞아! 거기 공사하는 사람은 얼굴도 봤는데 무슨 쥐같이 생겼더만! 태선 사장님 이겨야 해.”
“언니, 암만 그래도 대놓고 외모로 그러는 건······.”
“어머, 그러면 너는 태선 사장님이 졌으면 좋겠다는 말이니?”
거기에 역시 젊은 여자들 사이의 대화가 되자 남자 외모의 위력이 컸다.
“그건 절대로 아니죠! 태선 사장님이 이겨야죠.”
“그럼, 그럼! 거기다 방금 샬롯도 말했잖아. 태선 사장님이 하시는 게 잘 되면 우리 일도 편해진다고.”
그리고 샬롯은 분위기에 맞춰주며 적당히 듣고 있다가 틈을 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가씨들에게 하나만 더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뭐든 말해요. 우리하고 샬롯이 보통 사이인가.”
왕언니 에린이 말했고 다른 시녀들도 뭐든 들어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리카라는 그 분에게는 이번 일 내색하지 말아주세요.”
“···으응?”
그 말을 듣자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에린이나 다른 시녀들이 갸웃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기술을 유출해가는 거 아니었나?”
“맞아. 당연히 엄벌을 할지 알았는데.”
“증인을 해달라고 하면 것도 해줄 생각이었거든.”
‘물론 그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겠지만.’
태선이 시녀들과 친해져서 동향을 파악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그 이후에 대해서 같이 언질을 줬었다.
“마음은 고마워요.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안젤리카라는 분을 계속 봐주시되 내색은 말아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샬롯만 괜찮다면······.”
“그치만 태선 사장님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니겠지?”
‘으음, 아까부터 좀 그런데 그쪽들이 태선 사장님을 왜 그리 챙기시는 건데요.’
어차피 공사 끝나면 다시 태선을 볼 일도 없는데.
옆에서 태선을 챙겨주는 건 자신이거늘.
‘아니, 좋게 생각하자. 그래, 보일러를 설치하면 시녀들 일이 편해지잖아. 그래서 그래. ···뭐 태선 사장님이 잘생겨서 가진 호감도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샬롯은 이내 훌훌 털어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러니 부디 부탁드릴게요.”
***
“태선의 말이 맞았어요. 안젤리카라는 하녀가 보일러나 다른 장치를 염탐하고 그걸 고스란히 넘겨주고 있었다네요.”
샬롯의 보고를 듣자 태선은 예상대로 흘러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미소마저 띠고 있었으나 반면 샬롯은 여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샬롯?”
“예?”
“왜 그래요?”
태선이 문득 묻자 샬롯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가요?”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요.”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굳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샬롯은 뜨끔한 듯 했다.
“아니, 뭐 그냥······. 그래요, 심각한 상황이잖아요. 기술을 빼돌리고 있었다니 너무 분해서 그랬어요.”
‘어째 둘러대는 느낌이 있는 것도 같은데······. 뭐 다른 일 있었나보지. 샬롯도 프라이버시가 있을 테니 캐묻지 말자.’
그렇게 생각한 태선은 이내 방향을 돌려 기술을 빼돌리는 협잡에 대해 생각했다.
‘···모건이겠지.’
물론 금융가인 모건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고 그날 왕세자 집무실에서 본 염소수염 남자를 엮은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나선 것이 아니라서인지 허술했다.
“그래서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세요?”
마침 샬롯이 묻자 태선은 웃으면서 답했다.
“저쪽이 우리 기술을 빼가길 원한다면 내주죠.”
“예? 잠시만요, 방금 기술을 그냥 준다고 하셨어요?”
샬롯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다른 속내 있는 걸 자기는 다 짐작하고 있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왠지 태선이라면 주더라도 그냥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역시 샬롯이네요. 저를 잘 아시는군요.”
잘 안다···는 말이 그렇게나 기분이 좋았던 걸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표정이 굳었던 샬롯이었으나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 때보다 환하게 폈다.
그런 샬롯을 보자 태선은 자신도 기분이 좋아져 웃으면서 하던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잠시 놓아둔 걸 주워 먹을지 안 먹을지는 저쪽 자유겠지만··· 그걸 먹고 배탈 나더라도 우리가 책임질 수는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