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81
081 보일러(2)
별채 공사를 맡은 염소수염 남자의 이름은··· 사실 태선도 모른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공사 내내 얼굴 볼 일도 없었다.
“태선이야 내 진작 믿었지만 머독 자네도 제법이로구먼.”
다만 왕세자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니 어쩔 수 없이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별채였다고 하나 왕세자비님께서 쓰실 욕실의 작업이 아니었겠습니까.”
‘이름이 머독이었나. 아주 혓바닥에 참기름을 발라놨나.’
“조금이라도 그분을 위한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서둘러 작업했습니다.”
거기에 어디서 태선이 왕세자에게 했던 말을 주워들었는지 그대로 베껴서 말했다.
“왕세자님이 덴마크에서 오셨다지요. 이제 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바다를 형상한······.”
의례적인 미사여구야 그렇다 치더라도 콘셉트에 대한 것까지.
‘그래, 들은 대로 콘셉트까지 훔쳐 갔군.’
“어째 태선에게 들은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하핫, 뭐 나를 생각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모두 한결 같다는 뜻이겠지!”
더 심각한 건 앨버트 왕세자 이 작자는 평소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아부를 하도 들어서인지 이런 방면으로는 살짝 감도가 약해진 모양이었다.
“아무튼 칭찬해주겠네. 기실 태선이나 화이트하우스는 일찍 고용했고 시간을 충분히 줬는데 머독 자네는 부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완성하다니!”
집무실에서 왕세자는 연신 칭찬을 쏟아냈다.
“사실 알음알음 소개 받아 자네를 쓸 때는 탐탁지 않았거든. 그런데도 역시 누가 소개하면 이유가 있어.”
“모두 앨버트 왕세자님의 인복이 좋은 것이지요.”
“흐하하핫, 그러한가? 그래, 내가 인복이 좀 좋기야 하지.”
거기에 본래 성정이 이런 칭찬에 약해서인지 왕세자는 매우 만족하다가 뒤늦게야 태선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참, 이거 태선과 화이트하우스도 앞에 두고 머독만 너무 추켜세웠구먼. 이해해주게. 물론 자네들도 공사를 하느라 정말 고생했어.”
“감사드립니다.”
다만 그럼에도 평소와 달리 태선의 대답은 담백했다.
조금이라도 태선에게 관심을 뺏기는 것이 싫었던지 머독이 재빠르게 나섰다.
“그럼 욕실을 보러 가시죠. 간청을 드리자면 저희 쪽을 먼저 보셨으면 합니다만.”
“음, 그건···태선이나 화이트하우스가 허락하면 허락하지.”
아무래도 태선이 약간 기분 상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왕세가 눈치를 봤으나.
“그건 저희가 먼저 계약······.”
화이트하우스가 이건 양보할 수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그 순간.
“그러지요.”
뜻밖에 태선이 담담히 말을 끊고는 화이트하우스에게는 믿어달라는 듯 살짝 눈짓했다.
“······.”
같이 의견 나누고 작업하며 태선의 능력에 대해 잘 알게 된 화이트하우스였다.
“태선은 그렇다는데 자네도 괜찮겠나, 화이트하우스? 방금 뭐라 하려고 했었나?”
“아···아닙니다. 그러시지요.”
그래서 일단 왕세가자 다시 묻자 태선의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바로 가보도록 하지. 왓킨슨, 일단 별채부터 가보도록 하세나.”
“예.”
“자네들도 따라오게. 그래, 공사도 끝났으니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겠군. 모두 따라오시게.”
그리해서 별채로 가는데 화이트하우스는 아무래도 저쪽에 말렸다고 싶었는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태선, 우리도 뭔가 어필하는 게 좋지 않겠나?”
‘작업할 때는 괜찮더니 불안 증세가 또 도졌네.’
사실 화이트하우스뿐만은 아니었다.
뒤따르는 존 브라더튼이나 새뮤얼 앤드루스나 조셉 스완도 정도는 다르지만 조금 불안한 기색들은 있었다.
오직 샬롯만 그런 기색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만 뭘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일부러 공사 마치고 갈 때 핵심적인 파트에서만 세팅을 교묘하게 해두고 가라고 했고···그 계획을 핵심 멤버들에게는 다 일러뒀는데.’
그럼에도 불안해하면 성격 차이려나, 믿음의 차이려나.
아니면 영국 출신에게는 아무래도 왕세자 앞이라 더 긴장이 돼서 그런 것이려나.
뭐 어차피 루비콘강 건넜고 주사위는 던져졌고 앞으로 나올 결과의 안배는 정해져있었다.
“다 잘될 겁니다. 저만 믿어주세요.”
“물론 믿지. 그렇겠지만 하다못해···하아, 저치 보게나.”
화이트하우스가 가리키는 앞에서는 머독이 한창 앨버트 왕세자에게 손금이 다 달도록 아부 떨고 있었다.
“저치처럼 우리도 전하의 물음에 답을 잘해드리면 좋을 듯싶어서 말이야.”
“그것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태선은 그 한마디로 화이트하우스의 불안을 불식했다.
‘말빨도 내실이 있은 다음에 먹히는 건데 지금 저렇게 입 털어놓고는 보일러나 공사를 망쳐버렸다?’
바람을 넣은 만큼 역풍으로 돌아올 터.
반면 한껏 기대를 품었다가 거하게 말아먹은 욕실을 보고 실망하던 차에.
‘100퍼센트, 아니 200퍼센트 퀄리티로 완성된 욕실을 보면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그때야말로 정치적 언어가 곁들여져야 할 환상의 타이밍이었다.
그렇기에 아까 머독이 자기 먼저 공개하겠다가 나섰을 때, 같은 콘셉트이니 선수 치겠다는 얄팍한 술수를 들이밀었을 때 양보해준 것이었다.
오히려 그의 실패는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테니까.
“자, 그럼 왕세자비님께서 목욕하신다 가정하고 바로 욕실로 가보시지요.”
더구나 이제 별채에 들어온 터라 뭘 더 할 것도 없었다. 지켜봐야 할 따름.
‘아니, 이건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시쳇말로는 팝콘각? 속담으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고 해야 맞으려나.
“자, 타일을 깔아놓은 걸 보십시오. 마치 덴마크의 야경처럼 멋지지 않습니까!”
“오, 과연 그러하군. 조명은 일부러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등불을 썼나?”
‘아, 저건 전구 기술 없어서 훔치지 못했나보네.’
“그···그렇지요, 하하하하핫!”
다만 머독은 분위기를 위한 거라며 둘러대고는 부하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배관업자가 아닌 마술사라도 되는 양 말했다.
“자, 왕세자 전하! 방금 보일러를 켜라고 지시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보일러는 물을 끓이는······.”
“그 설명은 됐다네. 전에 태선에게 질리게 들었어.”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먼저 설명한 건 아니고.
조선의 온돌에서 유래했다고 말하니 하도 궁금해하기에 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해서 대답해줬던 건데.
그게 오히려 왕세자에게는 자신이 발명한 거라 각인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니 인생사 과연 새옹지마였다.
“하하하···예, 그럼 보일러가 가동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니 물을 틀어보겠습니다.”
끼리리릭──!
싱긋 왕세자에게 미소 지어보이더니 머독이 화려하게 장식한 밸브를 돌렸다.
쏴아아아아아────!
“일단 냉수입니다만, 이제 이렇게 돌리면 됩니다. 쉽게 돌아가도록 해뒀기 때문에 왕세자비님께서 혼자 하실 수도 있죠.”
후우우욱───!
“오오!”
머독이 밸브를 빨간색으로 돌리자 후끈한 김과 함께 열기가 전해지며 왕세자를 비롯해 시종들이 자못 감탄을 토했다.
“······.”
그나마 왓킨슨은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하긴 그에게는 태선이 이미 보여준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는 궁에 비밀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내 기술을 훔쳐간 걸 인지는 한 모양이네. 더구나 거기에 기술을 제출하도록 시킨 자기 책임도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슬쩍 태선을 보는 왓킨슨의 표정에 미안함과 죄책감이 어려있었다.
‘그렇게 책임 느끼면 나중에라도 푸쉬 좀 해달라고요.’
잠시 그런 생각하는 사이.
“···그런데 이거 너무 뜨겁지 않은가?”
앨버트 왕세자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안 그래도 밀폐된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내내 틀어놓고 있어서 공기가 상당히 데워진 터였다.
거기에 왕세자가 비만이라 공기가 후끈해지니 반응이 민감하기도 했다.
“그러면 이렇게 반대로···음?”
해결책이라고 머독은 밸브를 반대로 돌렸으나.
후우욱──후우우욱──!
밸브는 딱 봐도 냉수를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돌아가있건만 물의 온도는 그대로였다.
“크흠, 너무 뜨겁구만. 일단 나가보겠네.”
결국 왕세자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욕실을 나갔다.
“이거 뜨거운 물도 좋지만 잘못했다가 알렉산드라가 화상을 입겠는데.”
나오며 왕세자가 중얼거리는 말을 또 들었는지 머독은 급히 나서며 변명했다.
“사···사소한 문제입니다. 수도관이 좀···아무튼 그런 문제가 생겼나본데 쉽게 해결이 됩니다. 송구하옵······.”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왕세자님의 앞에서!”
다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왓킨슨 서기관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머독은 뭐라고 둘러대는데 실속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겠지. 뺏겨서 간신히 흉내만 낸 기술인데 어디서 잘못됐는지 설명되겠냐.’
물론 자신은 당장이라도 설명해줄 수 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걸 보고 훔쳐가라고 작업실을 비울 때는 안배해뒀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진짜 문제가 터지게 될 부분은 따로 있기에.
“···이, 일단 난방을 보러 가시지요. 수도는 제가 기필고 고쳐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일단 난방부터 봐주십시오.”
아직 포기 못 하고 사정하듯 말하는 머독.
“왓킨슨, 그만 됐네. 기왕 왔으니 난방도 보고 가세나. 자, 안내해보게.”
“가···감사합니다! 그럼 왕세자비님께서 목욕을 했다고 치고 욕실에서 나오셔서···어어?”
하지만 막상 욕실을 나와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의 안내 멘트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콸콸콸──!
“······.”
눈앞의 장면을 보고 앨버트 왕세자는 그저 어이가 없었는지 허허 웃었다.
심지어 아까 머독을 막 다그치던 왓킨슨 서기관도 할 말을 잃고는 멍하니 서있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낸 말이 가관이었다.
“전하, 발이 젖습니다. 이만 나가시지요.”
“그래, 그러세나.”
하기야 대체 뭔 짓을 했는지 바닥에서 뜨거운 김 나는 물이 펄펄 올라오고 있는 상황.
다그치고 뭐고 하는 것도 상식적인 선 안에서야 하는 거지 이거는.
“참 뭐라고 할 말이 없군. 다 됐으니 그냥 원상복구나 잘 시켜두도록 하게나.”
“···죄, 죄송합니다.”
이건 퍼내고 말고 할 수준도 넘어서 하인들도 다 빠져나왔고 머독은 사고 말고는 다른 말은 올리지도 못했다.
그 모습이 사뭇 아까 왕세자 옆에 붙어서 아첨을 떨어대던 모습과 겹쳤다.
머독이 유난을 떨어댔기에 태선뿐 아니라 다른 이들 눈에도 그러리라.
반면 이렇게 되니 태선을 향한흔 왕세자의 시선은 묘했다.
“자네는···믿어도 되지?”
반쯤 불안감 나머지 반쯤은 기대감이 실린 눈빛.
“···자네는 다르잖나. 그렇지?”
그런 왕세자에게 태선은 딱 한마디 했다.
“따라오시죠.”
머독과 달리 백 마디 말이 아니라 결과로 보여주겠다는 듯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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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앨버트 왕세자는 기능을 보기도 전에 감탄사를 토해냈다.
“타일은 아까 머독이 했던 것과도 비슷하나······세면대라거나 변기라거나 전부 도자기로 만든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제 귀족들이 식사할 때 도기를 쓴다면 왕실에서는 유행을 선도해서 욕실에도 써야 하지 않겠는지요.”
태선의 말에 만족한다는 듯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래야 왕실의 체면이 서는 법!”
다만 그렇게 만족하면서도 외관은 그럴 듯했지만 막상 물을 켜고 나니 엉망이었던 머독의 전철이 떠올랐는지.
“그럼 기능을 보여주게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슬쩍 손수건을 꺼내들고 여차하면 나갈 준비를 했다.
물론 의미는 없었다.
쏴아아아───!
머독과 달리 밸브를 돌리자 바로 펄펄 김이 나는 물이 나왔다가 중간쯤에 놔두니 적당한 온수가 나오기도 하고 파란색에 다다라서는 냉수가 쏟아졌다.
“오오오!”
언제 손수건을 땀 닦으면서 나갈 준비를 했냐는 듯 즉시 앨버트 왕세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되는군. 정말로 돼!”
그리고 아까 전에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태선을 욕실을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둘러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까 머독 씨가 했듯 알렉산드라 왕세자비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요. 이렇게 샤워기를 틀어놓고 몸을 간단히 씻을 수도 있거니와 이 욕조에 물을 받아 담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거리를 두고 놓인 변기로 가서 커버를 올렸다.
“그리고 10년 전부터 미국 호텔에서는 편의를 위해서 이렇게 샤워 시설과 용변 시설을 같이 두기도 합니다만 이는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도 굉장히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남사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듣고 보니 그렇군.”
이제 와서 앨버트 왕세자는 아예 자신도 이걸 이용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확 풍겼다.
“그럼 이제 샤워를 다 했다 치고 방으로 가지요.”
태선은 아까 머독이 했던 안내를 그대로 따라갔다. 저쪽은 물난리가 났었지만 이쪽에서는 그럴 리가.
“오오, 따뜻하구먼! 정말로 따뜻해. 안 그런가, 왓킨슨?”
“예, 이건 벽난로의 온기와 다르군요.”
“장담하지. 이건 벽난로보다 나아, 하하하! 방 전체가 아예 훈훈해지는군.”
앨버트 왕세자는 이제 아예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본격적인 설명을 하기 전에 이미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일러 난방의 효과를 몸으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달칵──!
대신 태선은 스위치를 켰고 천장에 달린 전구에서 하얂게 불빛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갔다.
티타임도 아니건만 거기에는 빈 잔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설령 빈 잔과 찻주전자라도 이 온도에 이 분위기라면 감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씻고 나오셔서 이 방에서 홍차를 한잔하시고 시집이라도 읽으시면 아주 우아하지 않으시겠는지요?”
그리고 이 말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건 1860년대가 아니라 21세기 가서도 부정 못할 최고의 호사일 테니까.
“그렇군. 마침 말 나온 김에 티타임을 하세. 여기로 차를 내오도록.”
아닌 게 아니라 왕세자는 티타임을 가지겠다고 선언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
‘잘 됐다. 절호의 기회네.’
때마침 전생하기 전에 봤던 보일러 회사 광고 문구가 막 떠오른 태선이었다.
“원하신다면 왕세자 전하 집무실에도 보일러 하나 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앨버트 왕세자는 곧바로 답했다.
“이를 말이겠나! 부디 부탁하겠네, 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