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82
082 여왕이자 여자(1)
앨버트 왕세자와 알렉산드라 왕세자비는 후대까지 익히 알려졌듯 사이가 좋지 않았다.
뭣보다 일단 둘은 성격이 상극이었다.
“이분이 욕실을 만들어주신 태선이시군요. 왕세자님과 달리 잘 생기셨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소?”
“누구는 대놓고 여배우와 추문이 났다던가······. 그래도 사생아는 안 만들겠다니까 봐주는 줄 알아요.”
“···아니, 말을 해도 그렇게.”
지금 정찬을 앞두고 나란히 앉아서 딱 한 마디씩만 주고 받았는데도 그런 티가 딱 났다.
‘···기싸움 장난 아니네. 이게 왕실 스타일인가. 아니면 이 부부만 이런 건가.’
태선은 어색하게 웃었고 정찬에 초대받은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앨버트 왕세자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무튼 우리가 초대했으니 이만 해둡시다.”
“물론이에요. 귀한 분들을 초대한 자리니까. 그게 아니면 당신과 마주 앉는 자리는 나오지도 않았겠지만······.”
여전히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에게는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안 그래도 산욕열로 고생하는 터에 그 따뜻한 방이 너무 도움이 됐거든요.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태선을 향해서는 그야말로 따뜻했다.
하물며 알렉산드라 왕세자는 이 시대의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지금 봐도 청초한···아니, 저건 청초한 게 아니라 파리한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방금 산욕열이라고 했지···아!’
그제야 태선은 여태 공사에 집중하느라 신경 못 쓴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왕세자 부부 사이에 장남 앨버트 왕자가 1864년 1월에 초에 태어났었지.’
그러고 보면 이후로도 무려 다섯 명의 자녀를 더 낳는데 아이러니하다 싶었다.
방금 눈앞에서 봤듯 저렇게 싸우고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하는데도 자녀는 여섯이라니.
‘역시 왕실인가. 사적으로는 탐탁치 않더라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서는 서로 참아주는 느낌인가.’
그러고 보니 이제야 앞뒤가 맞춰진다.
앨버트 왕세자로서도 첫째를 낳을 때가 돼서 대외적으로도 더 신경 쓰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였으리라.
‘뭐 어쨌거나 그런 의미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아닌데도 우리 앞에 두 사람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준 것은 대단한 일이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음식이 차례로 들어오자 자리가 자리인지라 차분한 분위기로 식사를 이어갔다.
달그락──달그락──!
왕실에서 자라고 배워서 그런지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야 말할 것도 없고.
앨버트 왕세자도 설령 난봉꾼일지언정 식사 예절은 몸에 밴 듯했다.
‘입 안 열고 조용히 식사만 하니 왕세자비 부부 사이도 좋아보이는군.’
물론 식후 티타임이 그런 분위기는 바로 끝이었다.
“···당신과 티타임 갖는 건 오랜만이구려.”
“그러게요. 늘 당신 맞은편에 앉은 건 다른 여자였을 테니까. 아차, 손님들을 불러두고는 또 이런 말이 나오고 말았네. 다들 미안해요.”
저 말에 괜찮다고 답할 수도 없고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크흠, 아무튼 태선과 화이트하우스 그리고 자네들 덕분에 공사는 성공적이었어.”
앨버트 왕세자도 무안했는지 홍차를 마시고는 짐짓 화제를 돌려서 말을 이었다.
“알렉산드라도 자네가 해준 보일러에 만족하는 듯하고······. 이것만은 알렉산드라도 불평 없으니 말이야.”
“그건···네,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솔직히 왕세자님에게 이렇게나 괜찮은 선물을 받을 줄 몰랐는데.”
이 와중 굳이 ‘왕세자님’이라 불러서 조금 툴툴거렸지만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처음에 비하면 평화로웠다.
더구나 태선을 대하면서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말을 이었다.
“사실 내 목에 수술 상처가 있는데 그게 누구 때문에 트라우마가 됐거든요.”
찔리는 점이 있었는지 차를 마시다 뜨끔하는 앨버트 왕세자에게 눈을 흘겨주고.
“하아, 그래서 시녀들에게도 보이기 부끄러워서 목욕할 때는 마음이 불편했는데 태선의 그 보일러···였나요?”
“예, 보일러라 합니다.”
다시 태선을 향해서는 세상 온화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띠었다.
샬롯은 약간 불편한 듯싶은 기색으로 조용히 내내 홍차만 마셨지만 왕세자비는 앨버트 왕세자와 달리 사교적이거나 눈치가 빠른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대의 작품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뭐라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그녀가 손뼉을 쳤다.
“맞아, 결혼을 안 했다고 그랬었죠? 제가 좋은 혼처를 찾아봐드릴까요?”
“오, 그것도 좋겠······.”
모처럼 왕세자도 괜찮다고 말하며 둘의 의견이 일치되는 듯 싶었으나 뭔가 느꼈는지 급히 왕세자가 말을 멈췄다.
“······.”
왕세자답지 않게 흘깃 눈을 돌린 곳에는 무표정하게 앉은 샬롯이 있었다.
이미 그녀의 옆에 새뮤얼 앤드루스나 조셉 스완 심지어 화이트하우스나 존 브라더튼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알고는 눈치를 살피고 모양새였다.
“하···하하! 결혼은 중요한 일이니 우리가 억지로 권할 일이 아니지.”
앨버트 왕세자가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이건 궁합이 잘 안 맞는 운명이기라도 한지.
“어머나, 그 말은 마치 제가 억지로 권하기라도 한다는 듯 들리네요. 어떻게 사사건건 제 말에는 그럴 수 있죠?”
알렉산드라 왕세자비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왕세자여도 비대한 체격으로 여배우와 숱한 염문을 만들려면 유들유들하게 흘리는 화술은 기본으로 장착한 모양이었다.
“반대하는 건 아니고 아까 그대가 태선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라면 그대를 위해서라도 내가 직접 나서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이어 알렉산드라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바로 태선에게 말을 덧붙였다.
“뭣보다 왕실 명예가 크게 높아졌음이야. 그러니 뭐든지 말해보게나. 내 그대 청을 가능한 한 들어줌세.”
“어머, 놀랐어요. 오랜만에 훌륭한 생각을 다 하셨네요.”
동의하는 와중에도 날카로운 말이 꽂히지만 어쨌거나 태선으로서는 기회였다.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좀 부탁하려는 일 있었는데 먼저 말 꺼내지 않아도 돼서 잘됐네.’
***
왕세자 부부와 만난 그날 태선은 또 만남을 가졌다.
“일이 잘 풀려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태선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어땠을지.”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화이트하우스와 그의 조카 존 브라더튼이었다.
“헌데 스완 씨나 앤드루스나 다른 분들은 안 보이는군요. 우리끼리 축하연이라도 하려는지 알았는데?”
“그러게요. 좀 늦으시나?”
주변을 둘러보며 꺼낸 화이트하우스의 말대로 샤이엔워크가 저택을 방문한 건 태선 혼자, 더구나 샬롯도 없었다.
“제가 왕세자님께 부탁드린 일로 다들 바빠져서요. 우리가 영국에 머물 날이 그리 길지는 않으니까요.”
“아···그랬었죠. 그걸 잊고 있었네요.”
“아쉬워요. 계속 같이 영국에 있어주시면 좋을 텐데요.”
화이트하우스와 브라더튼은 아쉬움을 표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어조나 표정을 보건대 연기라면 배우를 해야 할 터였다.
“저도 이 인연을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습니다. 오늘 만남은 그래서입니다.”
“예?”
“애초에 제가 처음 편지를 보내서 우리는 인연이 닿았죠.”
“아, 그랬었죠.”
보일러 공사에 열중하느라 잊었지만 확실히 그랬었다.
“태선이 편지로 미국에 석유 운송 파이프에 대해 자문을 구해왔었죠.”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그럼 이번에는 삼촌이 미국에서 태선 사장님을 도울 차례네요.”
미국에 와서 일을 맡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좋은 반응이야.’
다만 왕세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고 그에 따라 태선도 계획을 약간 수정한 터였다.
더 준비가 갖춰진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
“왓킨슨 서기관의 도움으로 스완 제네럴 일렉트릭의 영국 회사가 세워졌습니다. 이번 왕세자궁의 공사도 저희는 그 회사로 진행했었죠.”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갸웃거리는 반응.
“······혹시?”
그러다 이내 설마 싶었는지 화이트하우스가 흠칫거렸다.
“···왜 그러세요, 조지 삼촌?”
반면 브라더튼은 아예 그런 생각도 못하는 듯 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체급으로 따지면 이 둘의 회사를 합쳐도 스완 제너럴 일렉트릭에 미치지 못 하기에.
‘하지만 그렇기에 이 제안은 매력적이지.’
자신에게도 영국 현지에서 믿을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좋고.
“두 분이 SGE 영국 회사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괜찮다면 회사도 합병했으면 합니다만 어떠신지?”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 제안이었더니······.”
“자···잠깐만요. 합병해서 우리에게 회사를 맡기신다고요?”
역시나 반응은 극적이었다.
“삼촌, 방금 들으셨죠? 태선 사장님이 회사를 합병하자고 하셨는데 환청 아니죠?”
두 사람은 얼떨떨해하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그럴 만하긴 했다.
‘그날 앨버트 왕세자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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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의 시공 및 사용을 일반 귀족이나 민가에서 가능하도록 허락해주시면 합니다.
태선이 청한 것, 그 하나는 보일러를 널리 보급하자는 것.
-음, 모두가 문명의 기술을 누르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왕실이 쓰는 걸 모두 다 쓰면 위엄이 아무래도······.
-그건 염려하지 마시지요. 욕실이나 보일러의 기본 기능을 누리면서도 왕실과 귀족 그리고 서민에게 품격을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장식이라거나 그런 것으로 말이다.
-뭣보다 귀족과 서민들도 보일러를 쓸 수 있되, 이 유행을 왕실에서 선도한 걸 알게 되면 왕실에 대한 위엄이 오히려 더 높게 설 것입니다.
-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듯도 하군.
-거기에 그들이 쓰는 세면대라거나 타일이나 욕조는 신분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지니 더욱 그러하죠.
그렇게 설득해서 앨버트 왕세자는 태선의 영국 회사가 보일러나 욕실 관련 용품을 파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아니, 뿐만 아니라 왓킨슨 서기관에게 지원을 명했다.
-저도 다른 부인들에게 보일러나 욕실을 소개해줄게요.
거기에 알렉산드라 왕세자도 저리 나서줬으니 향후 일은 안 봐도 예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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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와 그 기술을 쓴 욕실은 무조건 인기가 폭발할 거야.’
즉 태선의 회사는 그날 왕세자에게 받아낸 지원 덕분에 안정적인 수요가 확보됐다.
더구나 태선은 계속 영국에 머물 것도 아니고 곧 미국에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니 합병하며 자율적인 경영을 보장하고 일감도 몰아주는 격이었다.
사실 새뮤얼 앤드루스가 이 자리에 못 온 것도 그 작업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하겠습니다!”
“저도요!”
기회를 놓칠세라 화이트하우스와 브라더튼은 얼른 답했다.
“잠시만요, 결정하기 전에 들어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다만 막상 그 둘이 답하자 태선은 손을 저었다.
태선의 마음이 변했을까 초조해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으며 이 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나와 관련됐기 이 일이야말로 더욱 그렇겠지.’
그러니 달콤한 면만 보고 와서는 곤란하다.
힘든 일이 있어도 같이 견딜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화이트하우스나 브라더튼과 같이 일해봤고 협잡질도 같이 이겨냈다.
그러니 믿을 만한 사람이란 판단은 섰지만 그래도 그림자를 알려줄 필요는 있었다.
“머독이었던가요? 별궁의 공사를 한다며 왕세자께서 갑자기 들인 업자를 기억하실 겁니다.”
“예.”
“아, 그 공사 망치고 도망친 녀석 말이죠?”
태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못 무겁게 말했다.
“그 배후에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라는 은행가가 있습니다.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회사를 합병하면 같이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무조건 그렇겠지요.”
“···그 위험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거군요.”
태선은 다른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