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83
083 여왕이자 여자(2)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요. 좋은 쪽으로는 아니지만.”
‘역시 모건가······여기서도 악명을 자자하게 떨치나 보네.’
사실 화이트하우스나 블라더튼을 설득하려면 조지 피보디가 도와주기로 했다···는 걸 밝히는 게 좋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런 것 없이도 같이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두 사람이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디에나 적은 있기 마련 아닙니까. 정말로 힘든 것은 그 여정의 길에서 믿을 만한 파트너를 얻는 것이라 봅니다.”
화이트하우스에 이어서.
“예! 저도 삼촌과 생각이 같습니다. 태선 사장님과 같이 일하며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같이 일할 수 있으면 그 무슨 모건이라고요? 로스차일드 씨도 안 무섭습니다!”
젊어서인지 사뭇 패기를 드러내는 브라더튼에게 태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든든하군요. 사실 모건 씨의 인맥으로 보면 정말로 로스차일드까지 얽혔을 수도 있거든요.”
“···예?!”
“뭘 놀라느냐, 존. 그렇다면 우리도 로스차일드가 신경 쓸 정도의 거물로 단숨에 격이 올라간다는 말 아니겠냐?”
“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태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세자가 화이트하우스에게 빌려준 저택이었지만 뻔질나게 드나들어서 이제 태선도 어디 뭐가 있는지 알 알았다.
“이런 날에는 역시 한 잔이 빠질 수 없죠.”
뽁─!
찬장에 놔둔 와인과 잔을 가져와서 차례로 따랐다.
“그럼 계약서는 내일 왓킨슨 서기관의 도움을 받아서 쓰도록 하고 오늘 미리 축배를 들도록 합시다.”
“하하하, 예! 뜻밖의 일이라 이거 더 기쁘군요.”
다만 마찬가지로 기쁜 기색이면서도 브라더튼이 뭔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태선 사장님의 회사에 계약 같은 건 로렌스 양 담당이라던데 왓킨슨 서기관님이요?”
“왕세자님 분부로 이후에도 왓킨슨 서기관님이 서류 처리나 그런 부분에서는 편의를 많이 봐주기로 하셨거든요.”
그럼에도 브라더튼은 아직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표정이자 그제야 태선은 그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는 덧붙였다.
“아, 샬롯 말이었군요.”
막상 샬롯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자 브라더튼이 어버버했다.
“···이건 그냥 궁금한 거였고 태선 사장님이 엄연히 있으신데 감히 로렌스 양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하하하!”
사실 나이로 따지면 존 브라더튼이 더 많았지만 전생까지 합치면 태선이 보기에 그는 아직 어렸다.
‘샬롯을 좋아하나보군. 하긴 샬롯이 능력도 좋고 예쁜데다 성격도 쾌활하니 그럴 만도 해.’
그렇기에 그런 브라더튼의 모습에 질투 같은 감정 따위는커녕 귀엽게 보며 말했다.
“깜빡하고 아직 말씀을 안 드렸었군요.”
와인을 한 모금씩 마시고는 태선이 태연하게 말했다.
“실은 왕세자님 부부께 부탁드린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다행히도 잘 풀려서 조셉과 샬롯이 윈저성으로 갔거든요.”
다만 윈저성···이라는 말이 나오자 브라더튼은 물론 화이트하우스가 흠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버크셔의 윈저성이라면 그들도 왕세자를 접견하며 몇 번 들었기에.
“윈저성···여왕님이 칩거하고 계시다는 그 성···말씀인가요?”
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그 버크셔 카운티 윈저성이 맞습니다.”
***
아주 밝지도 아주 어둡지도 않은 오후 네 시경의 하늘.
빅토리아 여왕은 이 시간의 날씨를 보면 우울해져서 무척 싫어했다.
“그럴 때면 항상 그 사람이 곁에 와서 위로해줬지.”
문득 돌이켜보면 이 시간의 하늘이 우울해서 싫었던 건 핑계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여왕이었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위로해줄 때면 그 순간은 괜찮아지고는 했으니까.
“죽지 않고는 결코 벗을 수 없었던 왕관의 무게···그래, 이제 알겠어. 그게 숨 막혔던 거야.”
그렇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남편이 죽고 모든 걸 손에서 놔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윈저성에 와서 칩거했거늘, 이제야 자신을 옥죄던 뭔가의 압제를 깨달았다.
“···그렇지만 내게 자유가 있다면 그걸 함께 누리고 싶었던 사람은 이제 곁에 없구나.”
그렇기에 지금처럼 윈저성 정원을 거닐면서 오후 네 시경 우중충한 하늘을 볼 때면 그런 감정을 느꼈다.
“우울하지 않아.”
버킹엄에서 수많은 서류를 처리할 때만큼 기분이 우울하지 않으면서도.
“······그렇지만 우울하구나.”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며 이따금씩 예전보다 울적하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도 가슴이 텅 비어버린 기분.
자신의 무언가가 도려내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제 빅토리아 여왕도 알고 있었다.
문득 정원을 거닐던 걸음을 멈추고 동편으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
그곳으로 가면 필시 런던 버킹엄궁이 있을 터였다.
“내 가장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시간이 여왕의 이름 아래 묻힌 곳···참담하네.”
그리고 지금은 윈저성에 칩거하고 있으나 필연적으로 언젠가 돌아가서 남은 인생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곳.
그렇기에 빅토리아는 그때를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그나마 윈저성에 틀어박히며 잠시라도 여자의 삶을 살아보고 있었다.
아가씨 시절의 가장 화려한 자신은 아니지만 어떤가, 45세···여염집으로 치면 아주머니가 되어버렸을지라도.
생의 유일한 자유인 것을.
“하지만 돌아가면 다시 여왕으로서 살아야겠지.”
물론 벗어나려면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길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웃기는 것이 그걸 막는 건 다름아닌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는 왕실···그리고 여왕으로 책임감 탓이었다.
정통성 있는 왕세자도 세워놨겠다 그녀라고 그냥 왕위를 물려줘버릴 생각도 해봤지만 번번이 가로막혔다.
“앨버트 그 애는 아직 많이 부족해.”
자기 자신이 세운 엄격함과 지켜온 왕실 체통에.
그녀 나름대로 왕실이 정치 관여를 최소화하는 등 재위하는 동안 여러 안배를 다져뒀지만 그럼에도 왕이라는 자리는 그 무게감이 상당했다.
헌데 장남 앨버트 왕세자는 그녀가 보기에 너무 가벼웠다.
“그러고 보면 알렉산드라 그 애도 고생이겠네.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그렇겠지.”
여왕은 아니겠으나 지금은 왕세자···언젠가는 왕비로 여생을 보내야 할 터였다.
자신은 그나마 남편이 바람 한번 피운 적 없이 잘 대해줬지만 앨버트 그 아이는 아무리 자신의 아들인데도.
“하아······.”
생각하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만 나왔다.
“여왕 폐하, 여기 계셨군요. 시녀들도 데리지 않고요.”
그때 스코틀랜드 억양 짙은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남자 목소리가 있었다.
여왕은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존, 제가 어디 있든 그대는 찾는군요.”
“하하, 본래 제가 길리 출신 아닌지요. 게다가 윈저성이 저에게는 넓지도 않답니다. 손바닥 보듯이 훤하지요.”
그는 여왕의 개인 수행원 존 브라운이었다.
가져온 겉옷을 여왕의 어깨 위로 살포시 걸쳐주며 브라운은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가락을 내밀었다.
“여왕님을 모시러 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어서요. 오는 길에 보니 꽃이 아름다워서 헌상하고자 가져왔습니다.”
그가 내민 건 고작 몇 송이 꽃이었다.
대영제국의 여왕에게 헌상될 수많은 보물에 비하면 그야말로 보잘것없었다.
“후훗, 참으로 그대의 손과는 어울리지 않네요. 이 꽃 이름이 뭔지는 알고 있는가요?”
혹여 꽃이 다칠세라 섬세한 손길로 받으며 문득 꽃 이름을 묻는 빅토리아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묻어나 있었다.
“하하, 글쎄요. 제가 꽃은 잘 몰라서.”
“물망초, 이건 물망초예요.”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브라운은 보폭을 맞추어 그녀 곁에서 거닐었다.
그러면서 꽃에 대한 여왕의 이어지는 설명을 경청했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인데 이건 정말 신기하네요.”
“하하, 뭐가 그리 신기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원래 봄이나 여름에 피는 꽃인데 지금 겨울이잖아요. 한창 겨울인 1월달이고요.”
“오, 그렇다면 확실히 신기하기야 하군요. 계절도 모르고 핀 꽃이라니, 하하!”
브라운의 반응에 빅토리아 여왕은 미소 지었으나 약간 씁쓸해하는 기색이 배어있었다.
‘모르고 한 거였구나. 하긴 버킹엄과 다르게 브라운은 이런 식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이가 아니지.’
아마도 공교로운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공교롭게도 물망초라는 꽃은 자신의 마음을 묘하게 자극했다.
열여덟 살에 즉위했고 죽을 때까지 여왕이라는 직위를 내려놓을 수 없는 중압감.
‘너무 힘들어서 도망쳤지만 그럼에도 백성들이 나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생각도 하긴 해.’
마치 계절도 모르고 핀 이 물망초의 꽃말처럼 말이다.
‘하아,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아니, 언젠가 버킹엄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여왕이란 외롭구나.’
버킹엄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이란 여왕일 따름.
아부해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거나 정치적으로 뭔가를 앗아가려 하거나.
‘그나마 브라운에게 마음의 안식을 얻지만······. 남자이기에 선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부군이 죽고 자신의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 다른 이들과 달리 순박했던 이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지탱했다.
하지만 그 이상 관계로 넘어가면 문제가 아주 심각해진다. 자신은 여왕이기에.
‘앨버트 녀석이 여배우와 추문이 나는 것과는 수준이 달라.’
그렇기에 브라운에게 안식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경계해야만 하는데.
이게 여왕으로서는 어떤 면에서는 조금 스트레스였다.
‘딸들이 보고 싶구나. 아니면 친구···가 있으면 어땠을까. 내 어머니는 친구도 사귀지 못하게 하셨었는데.’
내가 만약 평범한 여자라서 친구가 있었다면 수다를 같이 떨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으려나.
“여왕 폐하, 그럼 슬슬 돌아가시면 어떠하신지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으려나 브라운이 말했다.
돌아보니 그가 허리춤의 회중시계를 보더니 덧붙였다.
“미리 말씀드렸는데 오늘 런던에서 손님이 오기로 하지 않았는지요.”
“어머, 그랬나요?”
사실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 늦어도 저녁이면 도착한다고 했으니 슬슬 돌아가지요. 왕세자님이 추천하신 분이 아닙니까. 하인들은 이미 한창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아아, 그랬었죠. 앨버트 그 애가 추천한 손님···이었죠.”
단지 아들이라도 앨버트 왕세자와는 사이도 안 좋고 성향도 맞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드는데, 하필 그 애가 굳이 칩거하는 자신에게 손님을 보냈다니 심술을 부렸을 뿐.
“알렉산드라 왕세자비도 오신답니다. 직접 오지는 못 하지만 태선 킴이라는 사업가가 전구라던가 여왕님께 헌상하고 싶은 물건도 가져온다고 하고요.”
왕세자비까지 언급하면서 이어지는 브라운의 말에 여왕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그럼 돌아가죠. 알렉산드라도 앨버트 그 애 때문에 고생이니······. 꼭 여왕이 아니어도 시어머니가 돼서 푸념이라도 들어줘야죠.”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잘 따라오시지요.”
무슨 밀림이라도 헤치듯 앞장서는 존 브라운의 행동이 짐짓 과장된 위트라는 걸 알면서도.
“···훗!”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빅토리아는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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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사이로 윈저성으로 들어가는 잘 닦인 대로.
마차 몇 대가 줄줄이 그 길을 가로질러 윈저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봐요, 샬롯 양. 옆으로 숲이 보이죠? 윈저성에 들어왔네요.”
그중 가운데 마차에 타서 마주앉은 이는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와 샬롯이었다.
“······.”
다만 왕세자비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샬롯은 창밖으로 지나는 숲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꿀꺽──!
심지어 마차 바퀴 소리에도 불구하고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여기가 여왕님이 계신 성···드디어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