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84
084 여왕이자 여자(3)
평소라면 이렇듯 긴장하지 않았을 텐데.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거물급 인사인 철도왕 밴더빌트 씨를 만났을 때도 안 이랬는데.’
앨버트 왕세자를 볼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역시 여왕은 그들과는 격이 달라서일까.
‘아냐, 그건 아냐.’
그러면 그들을 만날 때와 지금은 뭐가 다를까···고민하다 곧 샬롯은 깨달았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한 사람의 존재였다.
‘···아, 그랬었지. 그때는 늘 태선이 같이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네.’
그제야 샬롯은 문득 어떤 사실을 함께 깨달았다.
‘잠깐만···그러고 보니 태선을 만나기 전에 나 그런 거물들을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럼 밴더빌트나 저스틴이나 체이스 장관이나 그런 사람들 앞에서 멀쩡했던 것도.
‘실은 태선이랑 같이 있어서 괜찮았나···?’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영국 여왕은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정도의 거물일 테니까.
지금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인물이라 한들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더구나 앨버트 왕세자님 이야기로는 엄청나게 엄격한 분이라셨지.’
거기에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칩거하신 분.
예법을 잘 아는 사람이 가도 모자랄 터인데 자신으로 될까?
솔직히 영국 왕실 예법은 잘 모르는데.
더 최악으로 걱정이 들자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독립전쟁···내 선조인 푸어 장군님께서 거기서 활약하셨다고···아!’
그게 1775년이니 100년도 지나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때 영국왕이 지금 여왕님 할아버지라셨던가?!’
더 잘하려고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점점 더 꼬여버리고 있었다.
‘아, 내가 오는 게 아니었나. 영국 왕실에서는 독립전쟁 장군 후손을 안 좋게 볼 텐데.’
그때 누가 옆에서 팔을 가볍게 흔들자 그제야 샬롯은 정신이 들어 옆을 봤다.
“샬롯 양? 크흠, 샬롯 양!”
“아, 네?”
조셉 스완이었다. 그렇다, 마차에 알렉산드라 왕세자비 말고도 헌상할 전구 설치를 위해 조셉 스완도 같이 타고 있었다.
“방금 왕세자비님이 뭐라고 하셨는데······하하, 샬롯 양도 긴장하신 모양이로군요.”
“아, 그랬었군요. 죄송해요, 왕세자비님.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고.”
다만 역시 긴장감은 가라앉혀지지 않는다.
“괜찮아요. 저도 이해해요. 심지어 덴마크의 왕녀인 저도 여왕님을 처음으로 뵐 때는 정말 긴장됐었거든요.”
앞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시 한 귀로 들어와서 다른 귀로 흘러나갔다.
지금 믿을 건 자신뿐.
‘정신 차리자, 샬롯! 태선이 영국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자처해서 왔잖아. 잘 해내야 해.’
숨을 크게 들이마셔 심기를 다지고 주먹을 꽉 쥐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곧 멈추면서 마부가 보고했다.
“자, 그럼 내리죠.”
조셉 스완이 먼저 내려 왕세자비를 에스코트해줬다. 다음은 샬롯 차례였다.
‘이제 내려서 성에 들어가면 여왕님께서 계셔.’
유럽뿐 아니라 미국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가진 그야말로 대영제국.
태선은 길게 봐서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 세계를 시야에 두고서 사업을 구상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당장은 칩거 중이라고 해도 대영제국 여왕님과 만남은 중요해.’
아무리 다른 일이 바쁘다고 해도 그 일을 선뜻 태선은 자신에게 맡겨주었다.
‘그러니 실수라도 한다면 차라리 오지 못한 것보다 못하겠지만··· 절대로 그렇게는 안 해. 예법은 왕세자비님 도움을 받자.’
독립전쟁 장군의 후손인 건 굳이 이야기 꺼내진 말자.
‘그래, 그러면 돼.’
조셉 스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 눈앞에 우뚝 서있는 윈저성을 보면서.
‘다른 생각은 버리자. 내가 여왕님과 관계에서는 태선을 대변하는 얼굴이 된 거야.’
샬롯은 각오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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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를 다졌다. 방을 배정받았고 짐을 풀었고.
만찬 겸 여왕님을 접견하기에 앞서 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도.
“곧 빅토리아 여왕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기다란 식탁에 먼저 앉아서 여왕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드디어 나오시는구나.’
영국 여왕이라, 어떤 분인지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긴장도 되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각오를 다졌다···다만 그런 각오가 너무 무색하게도.
“알렉산드라,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네, 여왕 폐하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감사드려요.”
‘생각보다 그렇게 엄한 분은 아닌 거 같은데? 옷도 그렇고 평범하신 분이잖아.’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걸 끄덕이며 받아준 뒤 여왕의 시선은 샬롯과 조셉을 향했다.
“두 분도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이름이 신사분은 조셉 스완 씨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스완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조명 회사의 공동 대표로 있지요. 여왕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조셉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이기는 했어도 먼저 인사했고.
“그쪽은 아가씨는 샬롯 푸어 로렌스 양···맞죠? 어머, 알렉산드라도 유럽에서는 한 손에 꼽는 미인인데 샬롯 양도 전혀 그에 못지 않게 아리땁네요.”
이어 여왕의 인사가 자신을 향했다.
입을 열어서 대답해야 했다. 하물며 생각보다 평범한 분이라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음을 놓았거늘.
“······.”
어째서인지 직접 여왕을 직면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묘한 아우라를 느꼈다.
‘······아!’
윈저성은 넓고 웅장했다. 솔직히 처음 들어왔을 때 위용에 크게 감탄했을 정도이니.
‘이분이···이래서 여왕이구나.’
처음에는 여왕님 치고는 드레스도 화려하지 않고 인사도 평범하게 하기에 긴장감을 느끼지 않았더랬다.
그렇지만 이렇게 마주하니 윈저성의 모든 공간이 그녀를 위해서만 마련된 듯.
“미국에서 왔다죠? 언젠가 미국에는 가보고 싶었는데······.”
목소리에 마치 빛이 깃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잠시 정신을 놓쳐 여왕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렸지만 샬롯은 곧 전력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머, 너무 굳어있는 것 같은데 긴장 풀어요, 로렌스 양. 저도 윈저에는 편하게 있으려고 온 거랍니다.”
자신이 샬롯 맞고 뵙게 돼서 영광이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꺼내려고 했다.
그런 뒤에 태선 킴 사장님을 대신해서 왔다며 당초 목적도 놓치지 않고 어필하면 된다.
“······딸꾹!”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말보다 먼저 튀어나온 건 하필 딸꾹질이었다.
“예, 제가 샬롯입······딸꾹!”
수습하려고 다시 입을 열어도 나오는 것은 딸꾹질.
“···니다···흐읍···여왕님을 뵐 기회···딸꾹······.”
그걸 보자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입을 가리며 놀랐다.
“어머! 괜찮아요, 샬롯? 여기 따뜻한 물 좀 따라줘요. 자, 진정하고 이거 좀 마셔요.”
“네, 감사합······딸꾹···흐읍!”
물을 마셔도 소용이 없고 그야말로 낭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왕의 안전에서 대답은커녕 하필이면 딸꾹질을 하다니.
어떻게 죄송하다는 뜻이라도 표하려고 입을 열어보지만 이건 정말로 불가항력이었다.
“괜찮단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 모습을 보자 인자하게 웃고는 나긋하게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겠으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수도 없이 들은 식상한 말보다 인간적이고 반가운 인사로구나.”
그저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랬는지.
‘어···뭔가 좀 다른 느낌인데.’
조금 전 여왕의 위엄을 느낀 여인으로부터 샬롯은 뭔가 다른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깊게 두르고 있던 여왕의 위엄이라는 두꺼운 코트가 한풀 벗겨내진 느낌.
‘사람···같았어. 그냥 평범한 사람이 짓는 미소······.’
말이 이상하긴 한데 그러고 보면 사실 자신이 먼저 여왕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왕은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하지만 지금이 무슨 고대나 중세도 아니고 왕이라고 사람이 아닐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음, 그러고 보니 여왕님을 알현한 사람들은 으레 그렇게 생각했겠네.’
방금 전의 자신처럼 여왕은 고귀하고 품격 있고 한층 다른 무언가의 존재라고.
동시에 문득 그런 인생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자, 어서 식사를 내오게나. 딸꾹질을 할 때는 괜히 집중을 받으면 더 심해지거든. 샬롯 양이랬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도 괜찮아.”
“죄송합니···딸꾹······.”
샬롯이 어쩔 수 없이 고개 끄덕이는 사이 여왕의 명이 있어서인지 전채가 빠르게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전구를 가지고 왔다죠?”
“아, 예! 원래 영국에서 발명했는데 미국에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밤에도 전구만 켜면 마치 대낮처럼 밝지요.”
식사하고 나서 티타임을 할 때도 샬롯은 딸꾹질 탓에 그저 듣기만 했다.
“여왕님께서 허락해주시면 하루 만에도 설치가 됩니다. 내일 밤에는 전구의 빛 아래서 식사를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실은 이번에 제 처소에도 욕실을 공사하며 전구를 달았는데 전에 보던 전구들하고는 정말로 달라요.”
“어머나, 그러면 나도 전구의 빛을 보고 싶구나.”
대신 샬롯은 의도치 않게 여왕의 말을 더 경청하고 대놓고 보지는 못하더라도 관찰할 수 있었다.
“여왕님의 위엄과 윈저성의 경관에 잘 어울릴 겁니다.”
“여왕님께서······.”
“여왕님······.”
그리고 내도록 듣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아니, 그보다도 빅토리아 여왕의 모습에 어린 시절 봤던 뭔가가 겹쳤다.
참으로 여왕이라는 이미지에 맞지 않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올가미에 묶여 발버둥치는 짐승처럼 보였다.
올가미는 고작 ‘여왕님’이란 말이었다.
‘고작 말이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사람 같은 웃음이 잠시나마 내비쳤다가도 다시 처음 봤던 그 위엄 어린 여왕의 모습으로 돌아가는구나.’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마치 각인된 본능처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리 본다면 차라리 저건 저주였다.
“이제 딸꾹질이 멈췄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빅토리아 여왕이 말하자 그제야 샬롯은 딸꾹질이 멈췄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여왕을 측은한 눈길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하필 그때 여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
감히 대영제국의 여왕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딱 눈이 마주쳤으니 모를 리 없을 터.
샬롯은 급히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여왕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그러는 와중 얼핏 봤다.
“···그래. 알아주니 고맙구나.”
대답하는 ‘여왕’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와 아울러 씁쓸한 감정이 묻어난 것을.
***
이후에도 티타임은 이어져 잡담을 나누었다.
주로 빅토리아 여왕과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대화를 나눴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이번에 공사한 보일러나 욕실부터 조선의 난방법 온돌에 이르기까지.
구르륵──구르르륵──!
그리고 어둠이 깊어져 밤새 우는 소리 들으며 샬롯은 방에 돌아왔다.
딸꾹질 탓에 망칠 뻔했지만 무난히 끝난 하루···였나?
“···후, 그렇다고 하기엔 아까 여왕님과 눈 마주친 일이 계속 신경 쓰이네.”
다만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은 여왕을 측은하게 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그때 눈이 마주쳤을 때.
“오히려 여왕님은 약간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더구나 그 뒤 여왕님의 배려 덕분이라고 예의 차리는 말에 그녀의 표정은 씁쓸해졌다.
애초에 여왕이 남편을 잃고 침울해져 이곳에 칩거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단순히 나 혼자 생각은 아닐지도 몰라. 여왕님은 ‘여왕’으로 있기가 힘드신 거야.”
그래서 감히 여왕의 안전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반긴 것이리라. 아울러 자신이 그녀에게 그걸 빼앗은 것 같아서 약간 죄책감 들기도 했지만···사실 그건 별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칩거했어도 여왕인데 그럼 여왕을 여왕이라 부르고 예법을 차려야지 어떻게 하겠나.
“하아···어렵다.”
마음이 먹먹해져 샬롯은 커튼을 걷었다.
“사업을 위해 여왕님과 친해지러 왔는데······. 여왕이란 걸 인식하면 오히려 멀어져.”
밖에는 정원과 길 여기저기 일정한 간격으로 등불을 밝혀서 주황빛으로 번져있는 밤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뜻밖에 그 길을 산책하는 여왕이 보였다.
물론 그녀 혼자는 아니고 수행원 존 브라운이라 했나, 약간 거리를 두고 뒤떨어져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차라리 혼자 가는 것만 못하게 쓸쓸해 보여.’
자신이 만찬과 티타임에서 보기로 여왕은 분명 저 존 브라운이라는 수행원을 심적으로 많이 기대고 있었다.
그러니 밤 산책에도 동행을 허락했겠으나 동시에 멀찍이 따라오게 한 것도 납득은 됐다.
‘남편을 잃어서 칩거하는데 수행원과 가까이 지내면 사람들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좋을 테니 그랬겠지.’
결국 저 고독한 한 여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이는 ‘여자’여야만 했다.
그러나 윈저성의 시녀들은 감히 그럴 수가 없다.
‘알렉산드라 왕세자비님은 신분은 높지만 왕실의 일원이 되었기에 더 여왕님에게 예의를 지켜야만 할 테고.’
그 외 다른 여인들은 귀족 부인이나 영애라도 여왕이 출입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단지 여왕에게 무슨 변덕이 불었는지 이번 자신의 방문을 허락한 것이 예외였을 따름.
‘···나밖에 없어. 그리고 지금밖에 없어.’
샬롯은 얼른 겉옷을 두르고 방을 나섰다.
여왕의 마음에 생긴 빈틈을 채워주어 사업적으로 유리한 포지션을 챙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여왕의 길을 걸어온 힘든 여정에 지친 그녀 마음을 같은 여자로서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샬롯은 집사장의 허락을 받아 성을 나서면서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마땅한 답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 없잖아.’
둘 다 하고 싶은 것이야말로 자신의 마음이었기에.
“여왕님!”
“어머, 샬롯 양? 밤에 자지 않고 왜 이 바깥에?”
그리고 그걸 위한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딸꾹질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보니 여왕님이 홀로 산책하시는데······.”
대신 쌀쌀한 밤바람에 짐짓 옷깃을 여미면서도.
“좀, 아니 많이 쓸쓸해 보여서 말동무나 되어드릴까 해서요.”
감히 대영제국 여왕에게 쓸쓸해 보인다 말을 건넸다.
“쓸쓸해 보인다고? 내가? 그렇게···보였구나.”
물론 적당한 수준에서 선을 넘지 않으면서 샬롯은 다가서며 물었다.
“외람되지만···네, 그랬어요. 그러니 같이 걸을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