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90
090 샬롯의 부탁(1)
“장군님도 아실 겁니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그 탓에 뭘 해도 무기력하고 뭔가 하나가 빠진 것같이 허전하고 가끔 멍해지는걸요.”
그랜트는 점점 더 태선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신도 그걸 느끼고 있는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었거나, 겨우 목숨 구한 이들은 어쩌면 정신적인 감옥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전쟁 영웅이 이런 문제를 토로하면 나약해보이지 않겠는가.
“꿈을 꾸어도 계속 그때의 순간과 감정이 반복되고 나중에 가서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안 되고요.”
“맞···그래, 부하들이 그런 증세를 호소하기도 했었지.”
그리고 이건 꼭 전쟁 영웅이 아니어도 상황은 다르지 않을지 몰랐다.
왜냐하면 그런 건···사내답지 않으니까.
“부하들이 장군님을 많이 신뢰했나 봅니다. 그건 사내답지 않은 것이니 입밖에 잘 내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요.”
더구나 방금 그런 생각을 했는데 딱 맞춰 짚어낸다.
“장군님 같은 멘토를 뒀다면 좋겠지만 아닌 병사들은 속으로 상처가 더 곪아가고 있을 겁니다. 뭣보다 최악은··· 이 나라는 총을 구하기가 쉽다는 겁니다.”
다만 잘 나가더니 이번 이야기에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총 이야기는 왜 꺼내는가? 더구나 총 구하기 쉽다는 것이 문제 삼을 것이 되는지 잘 모르겠군.”
“예, 장군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이해합니다. 총을 통해 자경을 위한 무장할 권리가 보장된다는 뜻이겠죠.”
그랜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처음에 말해봐라 들어는 주겠다는 듯 싶던 태도와는 사뭇 달라졌다.
경청하고 있었다.
“계속 말해보게나. 원래 병사들의 처우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았나. 그게 총기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궁금하군.”
심지어 넌지시 태선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일단 오해하실까봐 하나 말씀드리자면 얼마 전에 저는 총기협회를 창립해서 그곳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총에 의한 미국인의 자경권을 결코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총기협회··· 그런 조직을 만들었던가. 아무튼 그건 알았으니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주게나.”
이번으로 두 번째 재촉.
“사실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 손에 총이 있으면 그만큼 위험하단 것이죠.”
“병사들이 총으로 자살할 수 있다는 건가? 그거야 꼭 총이 아니라도······.”
“전쟁의 후유증은 자칫 정신 착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그때 주변 사람들을 적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잠깐만! 그러니까 자네 말은 병사들이···내 부하들이 민간인에게 총을 쏠 수 있다고?!”
그랜트는 감정적인 거부감을 보였으나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예,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겠지만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하며 그랜트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나 태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오히려 시선을 피하는 쪽은 그랜트였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 보시지요. 사실 장군님도 납득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전쟁에 참가한 병사가 수십만 명입니다. 그중 몇몇만 그렇게 되더라도 그의 주변에는 비극이 생깁니다.”
“······.”
“그런 사건은 참전자에 대한 시선을 안 좋게 덧칠할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태선이 호소하는 어조로 말하자 그랜트는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건 감정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지. 자네 말이 맞기는 해.”
그랜트는 가슴이 답답했는지 시가를 꺼내물었다.
부관 드레이크가 불을 붙여주는 사이 태선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예방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피해를···예방할 수 있다?!”
그랜트는 솔깃해하는 반응을 보였다가 문득 시계를 봤다.
이야기에 몰입하여 몰랐거늘 점심때가 다 된 걸 보자 그제야 허기가 졌다.
“그 방법··· 더 자세히 듣고 싶구먼. 내 숙소로 같이 가서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같이 식사요? 물론 영광입니다만 식당이 아니라 장군님의 처소에서요?”
“불편한가? 주변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좋은데. 그렇다면 식당도 괜찮네만.”
“아닙니다. 장군님의 처소에 초대받아서 같이 식사할 수 있다면 영광이죠.”
그랜트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는 시가를 몇 모금 더 빨고는 부관에게 말했다.
“드레이크, 늘 먹던 걸로 4인분을 주문해주게. 방에는 내가 알아서 올라가지.”
“예,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태선은 곧 그랜트를 따라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면서도 처소에 들어가서도 식사를 기다리면서도 그랜트는 태선의 말을 경청했다.
“세 가지 방향에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실증적이고 정신적인 치료입니다만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겠죠. 가능하다면 저는 이를 위해 돈을 출자하여 상담을 위한 연구소라도 세울 용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현실의 적응을 위한 물질적인 면에서 지원입니다. 어떤 이들을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고 기술도 없을 텐데 이런 부분에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물론 기업과도 연동한 차원에서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드레이크가 호텔 직원과 함께 스테이크와 스프를 가져와서 세팅을 해주었다.
하지만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적절한 총기 규제가 병행되면 더 좋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랜트가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듣고 있었다.
자연히 태선은 이야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치료에는 무조건적으로 폭력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달리 풀어서 해소할 수 있도록······.”
“사실 돈이 없어서 범죄의 길로 빠질 수도 있는데 이는 치안에도 좋지 않거니와 특히 일자리를 준다는 것의 의미는······.”
그러니 그랜트나 태선은 물론이고 샬롯이나 드레이크도 스테이크에 손을 대지 않을 수밖에.
“장군님···죄송하지만 오후 일정을 시작하실 시간이 됐는데 어쩌실는지.”
“오후 일정? 일단 다 취소하도록 하게나.”
심지어 스테이크가 차게 식어버린지는 오래였고 부관 드레이크가 다음 일정을 알렸음에도 그랜트는 일축했다.
“아, 미안하네, 킴···아니, 태선이라 불러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장군님이 그리 불러주신다면 영광이지요.”
“그래, 태선. 그리고 자네도 율리시스라 부르게. 아무튼 계속해주게.”
지금 태선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보다 중요한 것 없다는 듯.
그리고 이는 태선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오후 일정은 포기해야겠네. 자동차 사업을 위해 그랜트와 만남은 중요했었지. 그래서 나도 그가 물어줄 것 같은 떡밥을 가져왔고.’
그런데 이렇게나 생각 이상으로 율리시스 그랜트가 관심을 가져주다니.
자신의 사업이나 자동차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이건 인권이나 안전의 차원에서는.
아예 미국 역사의 방향을 다르게 가져갈 수 있는 순간인지 몰랐다.
종종 어떤 역사의 전환점은 갑작스럽게 한 순간에 의해서 결정나는 때도 종종 있었다.
‘다큐를 만들면서 조종 그런 순간을 봤는데···어쩌면 지금이 그런 때인지도 몰라.’
그렇기에 태선도 더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태선, 저도 오후 일정은 조정하거나 취소할 수 있도록 전보 보내고 올게요.”
“네, 샬롯 그렇게 부탁해요.”
마침 눈치 빠른 샬롯도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채고는 드레이크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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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미안하네.”
겨울이라 저녁 무렵이 되자 밤처럼 캄캄해졌다.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래 붙잡아뒀구먼. 점심을 먹자고 부른 것이 저녁이 되었어.”
“아닙니다.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일정을 다 취소했으니 이 호텔에서 하루 자고 가죠.”
“오, 그러겠나? 하하, 그러면 밤새 자네와 이야기를 더 나눌 수도 있겠군.”
아닌 게 아니라 창밖을 보면 거의 밤이었다.
이 시간이나 돼서 무리하게 가는 것보다 아예 하루 통째로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루 만나고 가는 것과 하룻밤을 같이 새는 건 친밀감 쌓는 정도가 다르니까.’
물론 뉴욕에도 자신이 직접 처리할 일이 산적해 있지만 미래의 대통령이자 지금 전쟁 영웅인 그랜트라면 답은 나왔다.
“하하, 그럼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같이 식사하지. 드레이크, 스테이크 4인분을 다시 좀 주문해주겠나? 아, 그리고 옆방으로 태선과 샬롯 양이 묵을 방을 잡아주게.”
“예, 알겠습니다.”
드레이크가 방에서 나가자 그랜트는 직접 일어나더니 위스키 한 병을 가져왔다.
“아직 스테이크는 안 왔지만 식전 한 잔도 좋지 않은가. 이렇게나 훌륭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으니.”
“예, 저 역시 율리시스 같은 분과 술잔을 나눌 수 있으면 영광인······.”
“에이, 영광이니 뭐니 그런 말은 하지 말게나. 지겨워.”
쪼르르르륵──!
술잔을 채워주고는 그랜트 장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샬롯 양도 술 마시나?”
별 기대는 안 하고 예의상 물어봤던 모양인데 저번에 헨리 웰스나 윌리엄 파고를 만날 때도 그랬지만 샬롯은 의외로 술이 상당히 셌다.
“예, 주세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오히려 그랜트가 약간 놀랐을 정도였다.
“비서라서 할 일이 있어서 너무 많이는 곤란하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겠죠.”
“한 잔···이라도 이 술은 제법 독한데 정말로 괜찮나?”
“네, 한 모금 마셔보고 좀 아니다 싶으면···그랜트 장군님께 죄송하겠지만 조금 남길 수도 있겠네요.”
그 말에 그랜트는 피식 웃으면서도 잔을 채워줬다.
“하하, 독립전쟁 군인의 혈통이면서 굼벵이 맥클라렌 같은 소리를 하는구먼. 하지만 태선의 얼굴을 봐서 허락해주겠네.”
***
다음날 늦은 오전 뉴욕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괜찮아요?”
태선은 맞은편에 앉은 샬롯에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괜찮다고 하는데 별로 안 그렇게 보였다.
“것보다 태선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신 거죠?”
“뭐 제가 많이 마시긴 했죠. 그치만 샬롯도 술이 세다고 생각했는데···심지어 마신 직후에는 워낙 멀쩡해 보여서 괜찮은 줄 알았거든요.”
“네, 처음엔 그랬죠. 그런데 방에 가서 누우니까 뒤늦게 어지럽더니···으음.”
샬롯이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인데 현기증이라도 도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럴 때 해장국을 차려주면 좋을 텐데.”
“해장국이요? 저번에 태선이 말해줬던 국밥이란 거죠? 벌써 몇 년도 전인데 대체 그 국밥은 언제 먹을 수 있는가요?”
그러고 보니 그랬더랬다. 사업으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잊었을 뿐인데···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미안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오랜만에 독주를 많이 마셨으니 국밥으로 해장하고 싶네.’
사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그랜트와 밤새 마시느라 대미지가 없지 않았다.
물론 그만큼 율리시스 그랜트와는 막역하게 친해졌기에 얻은 것이 컸지만.
“아무튼 잊으시면 안 돼요. 이번에 그랜트 장군님과 만남을 성사시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기로 했죠?”
그때 샬롯이 말했다.
“국밥이랑은 다르게 이건 잊어버린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어제 그랜트 장군님과 만남이 길어져서 스케줄 조정도 새로 하느라 고생을 더 했다고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었네.’
행동 하나하나를 짚어볼 때마다 새삼스레 느낀다.
“거기다 일이 끝난 것도 아니고 돌아가서도 밀린 일이나 스케줄의 조정 건도 그렇고······.”
자신이 사업 행보는 샬롯이 뒤를 받쳐줘서 가능하다는 걸. 더구나 지금 파리한 안색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술을 마시고 싶어 마셨을까.
분위기를 맞춰주려고 한 잔이라도 같이 마셔준 것이겠지.
“네, 물론이죠. 이번에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들어줄게요.”
그렇기에 태선은 호언장담을 하며 선언했다.
“샬롯이 부탁하려던 거 말씀해보세요. 다른 일 다 제쳐두고 해줄게요.”
그 말을 꺼내자마자 언제 다 죽어가고 있었냐는 듯.
“방금 말했죠. 다른 일 다 제쳐두고라도 들어주겠다고요.”
샬롯이 짙게 미소 드리우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제가 태선에게 하는 부탁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