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580)
580_유진 킴
죽헌竹軒 김상준金尙俊 / 이신영李新玲
김유진金唯鎭 / 김유신金唯信 / 김유인金唯仁
[김유진]金唯鎭
Yu-jin Kim / Eugene Kim
1893 – 1971
미합중국 육군 대원수.
연합군 최고사령관, 합동참모의장, 국무부 장관.
카산드라, 대전쟁의 예언자, 전차의 아버지, 현대전의 선구자, 루즈벨트의 주머니칼, 어린이의 친구, 승리의 설계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제2의 카이사르, 국가 재건자, 장난감의 제왕, SF의 거장, 노벨 평화상 수상자, 민권의 등대, 그리고 겨레의 국부.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의 군인, 독립운동가, 기업가, 작가, 발명가, 외교가, 행정가, 정치가, 인권운동가.
김유진은 한국계 미국인 이민 2세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나고 자라 1915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미 육군에 임관했다.
그는 생도 시절 일명 를 통해 자신의 탁월한 통찰력을 입증하였고 임관 직후 포드사와 손잡고 세계 최초의 전차 개발에 나섰다.
멕시코 원정을 통해 퍼싱 대원수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미국 원정군에 합류하였으며, 326전차대대장과 제93보병사단장을 역임하며 캉브레, 아미앵, 생-미이엘, 뫼즈-아르곤 등 각종 전역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전간기 중 그는 소장파 장교로서 기갑 전력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신의 성장환경과 일본, 유럽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파시스트의 발호를 예측하였다. 두 번째 전쟁이 가시화되자 김유진은 미 육군의 핵심으로 발돋움하였으며, 육군 전쟁계획부장으로서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의 대전략을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유럽에서 추축국을 무너뜨리는 핵심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나치 독일 멸망 이후 태평양 전쟁 최후반부를 지휘하여 ‘승리의 조직자’ 조지 마셜과 함께 ‘승리의 설계자’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미군 점령하 한국과 패망 후 일본의 군정을 총괄하여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연방 설립에 공헌하였으며, 초대 합참의장으로 취임하여 냉전 초기 국공내전 수행과 군 현대화, 군제개혁 등에 앞장섰다.
김유진은 합참의장 임기 중후기부터 미국에 팽배해지기 시작한 공산주의자 마녀사냥, 일명 매카시즘을 ‘나치의 부활’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직책을 사임하였으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한 뒤 7년간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국무장관 재임 중에는 반공 정책과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확산을 요체로 하는 ‘킴 플랜’을 진두지휘했으며, 이른바 에 맞서 소련의 도발을 저지하고 체코를 소련의 위성국에서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퇴임 후 그는 유색인종 민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으며, 인종차별에 맞서 유색인종의 정당한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많은 지지를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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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인으로서의 김유진
– 음흉한 놈. 또 속였군. 어떻게 인간이 밥 먹고 숨 쉬듯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가 있지? (아돌프 히틀러, 1941년)
– 미군은 열등한 전투력이라는 약점을 은폐했고, 우월한 보급 능력이라는 강점을 극대화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그 어떤 노선에 탑승하더라도 패배라는 종착역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 에르빈 롬멜)
김유진의 전략은 철저히 미국의 국력 – 다시 말해 막대한 물량을 기반으로 정면 힘싸움을 벌이는 데 그 주안점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환호하는 ‘명장 김유진’은 수백만 대군을 문제 없이 운용하는 대원수의 역량보다는 주로 그가 전술적 우위를 잡기 위해 벌인 무수한 기만과 협잡, 첩보와 역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젊은 전쟁영웅 김유진이 세계에 선보인 제1차 세계대전 아미앵 전투의 경우, 객관적인 전력에서 미군 제93사단은 독일군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단순한 교전이었다면 베테랑인 독일군은 금세 전력차를 인지하고 재정비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김유진은 전차부대라는 신무기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전과 확대를 위해 심리전을 현대전에 도입했다. 서구에 가득하던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봤을 때 ‘열등한 흑인부대’가 정예 독일군에게 패주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고, 독일군은 그렇게 범 아가리로 스스로 뛰어들고 만 것이다.
김유진이 지휘하는 미군은 대체로 단위 전투력에서 적을 상대로 우위를 차지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점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상대의 선택지를 하나씩 거세한 후 미군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수법으로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은 수천 킬로미터의 사막 전역을 끝없이 뱅글뱅글 돌다 사실상 자멸했고, 김유진 신화의 정점을 찍은 마켓가든 전역에서는 아미앵이라는 땅을 거대한 떡밥으로 삼아 나치의 오판을 유도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영국군 구출과 적 집단군 섬멸이라는 대업적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이 모든 것들을 ‘야바위’, ‘속임수’로 평가절하했으며, 적의 심리와 같은 비정형적 요소에 의거해 군사적 모험주의가 팽배하는 것을 철저히 지양했다.
– 3배의 병력과 10배의 물자로 사방에서 줘패면 히틀러고 나폴레옹이고 결국엔 얻어터진다. 야바위질로 전쟁을 하고 싶으면 일본군 입대해라. (유진킴, 1942)
그의 전과에서 그리 조명받지는 못하지만, 뫼즈-아르곤 전역이나 프랑스 해방전 등에서 보이듯 김유진은 정면으로 싸워도 되는 싸움에서는 항상 극대화된 화력을 통한 힘싸움을 선호했다.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 측면에서 경지에 이른 그는 결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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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가로서의 김유진
자세한 사항은 김유진/일생, 아이젠하워 행정부/대외정책 등 참고.
– 내 코트 안주머니에도 히틀러가 하나 있소. 불알도 두 짝 다 있고 콧수염도 없는 데다 술과 고기도 잘 먹지. 내 히틀러가 저 히틀러보다 훨씬 낫군. (프랭클린 루즈벨트,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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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의 흑막.
김유진은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떠한 당적도 보유하지 않았지만, 항상 정권과 밀접하게 유착하여 자신과 미국의 이익을 꾀했다. 연구자들은 소수민족 이민자 2세에 불과했던 김유진이 탁월한 정치력을 갖추게 된 배경을 장인인 커티스 상원의원에게서 물심양면으로 전수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커티스 상원의원은 1차 대전 종전 직후, 김유진을 통해 이승만을 소개받아 윌슨 대통령의 병환을 폭로하고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하딩의 킹메이커가 되며 하딩 행정부의 실세로 군림했으나 하딩 사후 쿨리지 – 후버를 거치며 점차 몰락했다. 인척이자 후원자였던 커티스의 결말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김유진은 평생에 걸쳐서 정치에 직접 개입을 극력 거부하게 된다.
김유진은 커티스보다 더욱 간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했으며, 주로 샌-프랑코 그룹의 재력을 기반으로 여러 정치인들을 후원하거나 지지하는 형태를 취했다.
루즈벨트, 맥아더, 아이젠하워, 트루먼, 닉슨 등 그가 친분을 다진 정치인은 거의 대부분 어떤 형태로든 백악관에 입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김유진은 일반적인 제복군인과 달리 사적 친분에 기반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위대한 전쟁영웅이자 대원수로 자리매김한 그는 자신의 명성을 십분 활용해 여론전을 펼쳤으며, 조지프 매카시 의원 타도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반매카시 운동은 그의 행적에서 유달리 이례적인 일로, 평생 전체주의와 맞서 싸워 온 그의 신념과 더불어 매카시의 공세가 점차 군부를 목표로 하는 데 대한 불만과 냉전에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정치적 판단이 모두 합쳐진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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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독립운동가로서의 김유진
자세한 항목은 김유진/독립운동 참고.
– 전 일본이 영미를 배신하기까지 30년쯤 걸리리라 예상합니다. 일본이 열강들을 물어뜯는 그 순간, 열강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조선이 되어야 합니다. (김유진, 1911년)
김유진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조선 독립을 위해 본인과 가족의 일생 모두를 투자한 거룩한 삶’에서부터 ‘이민자 2세로서 권력과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에 불과’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스펙트럼이 모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사관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청년 김유진이 일본과 미국의 충돌을 예견하였음을 박용만과 이승만이 증언하였으며, 위 증언이 발굴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 김유진의 일생에 대한 해석은 크게 바뀌었다.
과거에는 주로 구 일본제국발 자료가 해석의 기준이 되었으며, 일제의 외교관과 군인들은 김유진을 자국에 우호적인 인물로 분류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유진이 반일로 돌아선 시점은 미국의 이익을 침해한 만주사변이 기점이며, 30년대에 접어들어서 대일 초강경파로 급선회하며 두 번째 세계대전을 예언하는 ‘카산드라’가 된 이유는 그동안의 친일 행적을 세탁하고 경쟁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시각이 우세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동양교육발전기금과 샌-프랑코라는 일본 내 네트워크가 건재했으며 전후 ‘킨 쇼군’으로서 비교적 온건한 군정을 펼친 점 또한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해당 증언의 발굴, 김유신과 유일한을 위시한 측근 회고록, 웨스트포인트 동창생들의 증언 등을 통해 김유진은 이미 10대 시절부터 일본에 극도로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레븐워스 교수사관 재직 시절 라는 명분하에 미 육군 내에서 일본제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할 것을 주장한 사실이 발견되며 김유진의 친일 행보는 모두 기만전술이었다는 주장이 주류설이 되었다.
동양교육발전기금을 통해 김유진은 일본 내 잠재적 협력자, 제5열을 확보하는 한편 식민지 조선 최고 인텔리와 독립운동가들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또한 훗날 미쓰비시그룹을 ‘하사’받은 가신 야마다 히로시가 지휘하는 샌-프랑코 대관팀은 수십 년에 걸쳐 어마어마한 금품을 살포했고, 그 결과 동아시아 전역에 일명 – 매수된 자와 회유된 자들로 거대한 첩보 네트워크를 형성해 일제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했다. 이 조직에 힘입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 전쟁 내내 방대한 블랙옵스를 시행할 수 있었다.
김유진의 독립운동론은 당대 독립운동가들의 핵심 화두였던 외교론, 자강론, 무장투쟁론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나, 당대의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그는 독립을 최소 2~30년이 걸리는 장기 계획으로 보고 ‘30년 뒤 대일 전쟁에 공헌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인프라 조성’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본다. 특히 그는 단순히 독립을 지상명제로 하는 것이 아닌, 독립 후 신생 대한의 향배에 관해서도 심도 있게 준비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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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가
–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에 가혹한 징벌적 배상을 청구할 경우, 일본의 권력층은 자신들의 과오를 떠넘기기 위해 미국에 그 원죄를 덮어씌울 것이고 우리는 다시 한번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소련의 일본 개입이라는 결론을 불러온다.
베르사유 조약이 나치의 집권을 초래한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일본이라는 나라를 대상으로는 관대한 처분을 하되, 일본 민중이 제국주의자, 팽창주의자들을 심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새 일본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친미적인 국가여야만 한다.
– 일본에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는 한국은 일본의 팽창욕구가 다시금 팽배해질 경우를 대비한 최적의 선택지라 볼 수 있으며, 유사시 미국이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아시아 대륙 정세에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도록 한반도를 로 탈바꿈하는 작업은 가장 적은 투자로 최고의 효율을 얻어낼 수 있는 선택지다.
(1939년 미 육군 전쟁계획부장 김유진)
역사를 바꾼 거인.
철마 타고 나타난 민족의 초인.
21세기를 민주주의의 시대로 만든 주역.
김유진은 아직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기도 전, 진주만 기습이 일어나기도 전 이미 미국의 참전과 승리를 기정사실로 상정했다.
몇 년 뒤 군산에 발을 디딘 김유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그는 몇 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제국주의에 물들어 폭주하던 나라 하나를 민주 국가로 탈바꿈시켰으며, 오랜 착취로 피골만 상접한 나라 하나를 세계 무대에 내세울 만큼 재건했다. 멸망할 수도 있었던 중화민국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교두보를 통해 몰려온 자유 세계의 도움을 통해 국체를 유지했다.
이후 국무장관이 되어 대외관계의 지휘봉을 잡은 김유진은 전 세계의 옛 식민지들을 재건하기 위한 에 착수했고, 이때 발흥한 민주 국가들은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멸망한 지금, 우리는 그가 토대를 닦은 냉전기의 기적과 같은 평화를 라고 칭하고 있다.
전 세계를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서 해방시킨 가장 큰 공로자로서, 김유진은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추앙받는 한 영원히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후기
2020년 6월 29일 월요일.
불쌍한 성냥팔이 명원이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퇴근 후 쓰던 소설을 문피아에 업로드한 날입니다.
그리고 2년하고도 5개월이 지난 2022년 11월 29일 지금.
저는 580화에 걸친 글을 마침내 마무리 짓고 이 후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 긴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2년 반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계속 기억될 겁니다.
오래도록 정들었던 이야기를 매듭짓게 되니 시원하면서도 참으로 섭섭하지만, 이 2년 반이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유진의 이야기를 이만 매듭짓겠습니다. 멈추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 펜에 불과하고, 앞으로의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의 가슴속에서 계속될 테니까요.
저 또한 첫 완결의 감동과 독자님들의 소중한 마음을 품고, 다음 작품에서도 매일매일이 기다려지는 재미있는 글을 가져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봐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덕택에 행복했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다시 만날 그때, 더 좋은 글을 들고 오겠습니다. 독자님들께서도 항상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2022년 11월 29일.
명원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