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Killer Whale Baby RAW novel - Chapter (104)
흑막 범고래 아기님 (104)화(104/275)
제104화
“그래서, 어디에도 안 가고 저택에 있었다고? 그럼 왜 안 나왔어?”
나는 아빠와 대화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저택 전체가 아빠의 인지 범위 안에 있으니, 내가 왔다는 걸 분명 눈치챘을 터였다.
‘언제나 불쑥 나타났었는데?’
보통 도착하기도 전에 응접실이나 혹은 건물 앞 낡은 분수대에 있던 아빠였다.
나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좋아서 하굣길을 더 빨리 재촉한 날도 있을 정도였다.
아빠는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표정으로 성가심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사고를 수습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고?”
“네가 데려온 사고뭉치 말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에키온을 보았다가,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어떤 일인지 짐작이 갔으니까.
‘으음, 또 여기 들어온 시종 하나가 에키온을 알아보기라도 했나?’
사실 지난 5년간 나랑 아빠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언제나 작은 실수나 소동은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3년 전쯤이다.
우연하게 시종 하나가 에키온의 정체에 의구심을 가진 적 있다.
‘이곳에는 시종이라고 해 봐야 아빠의 식사나 식재료를 가져오는 이들 뿐이었으니까.’
에키온과 마주치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여 왔는데 우연이 겹친 데다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빠의 명으로 라일라가 나서면서 잘 해결되었다.
‘제가 아는 친구가 아귀 수인입니다.’
아귀 수인들은 특기로 ‘최면’ 능력이 있었다.
이들은 보통 아주 폐쇄적인 성격의 가문이라 누구와도 교류를 나누지 않건만.
라일라가 용케 인맥이 있구나 싶었다.
‘아빠는 자기 같은 능력자만 수하로 삼나?’
이후,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판단하였고.
에키온은 신분을 새로 만든 뒤, 저택에 머무는 아이가 되었다.
법적 보호자는 라일라였다.
“일리아 벨루가를 만났다지.”
“응, 맞아.”
나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씩 웃었다.
“슬슬 움직여야지. 아빠도 알고 있지? 우리 곧 장례식장에 가야 해.”
“안다. 바이얀 아콰시아델 이야기 말이로군.”
“응.”
아빠의 어깨를 톡톡 유쾌하게 두드렸다.
생각할수록 걘 잘 죽었다.
“단언컨대, 걘 지옥에서도 결코 편하지 못할 거야. 걔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
장례식장.
리리벨이 자신이 죽인 바이얀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유를 가만히 짐작해보았다.
“우선 장례식에 갔다 와서, 일리아와는 다시 만날 생각이야. 그때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걸.”
내 얼굴로 악동 같은 미소가 스쳤다.
리리벨, 미안하지만.
네 날개가 펼쳐지기도 전에 하나만 꺾어도 될까?
아, 물론 허락은 필요 없어.
* * *
장례식날이 밝았다.
아니, 밝았다는 말은 조금 어색했다. 장례는 어제부터 이미 치러지고 있으니.
우리가 방문할 날이 밝았을 뿐이다.
나와 아빠, 그리고 아게노르까지.
서로 맞춰 입은 검은색 옷을 걸친 채로 커다란 건물에 들어섰다.
평소엔 잘 쓰이지 않는 건물이었지만, 직계 가문의 장례가 치러질 때면 성당처럼 사용하는 곳이었다.
문에 들어서자 옅은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보라색 꽃이 보였다.
‘여기서는 물칸나가 한국에서의 흰 국화 같은 역할을 한다지?’
보라색 물칸나.
수중 동물 수인의 장례식답게 꽃마저도 수생 식물이다.
나는 이미 관 근처에 한가득 놓인 보라색 꽃을 흘끗 보았다.
이곳의 장례식은 담백하다 못해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이루어진다.
왜냐, 범고래들은 전사였고.
사고사나 살해당한 것이 아닌 한, 그것이 정당한 전투에서의 죽음이라면 다들 그러려니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네.’
어째 침울한 분위기였다.
당연했다.
‘바이얀이 죽음으로써 끈 떨어진 신세가 됐기 때문이지.’
방계들에게 줄타기가 얼마나 중요한 일이던가.
사활을 거는 일이다.
그런데 로데센의 대부터 바이얀에게 이르기까지 최소한 20년 가까이 줄을 대 왔을 텐데.
형편없어졌다곤 하나, 그나마 믿고 있던 후계자가 덜컥 죽어 버렸다?
“와. 아빠, 쟤들 초조해서 뒈질 것 같은가 봐.”
“…….”
“끈 떨어지니 무서운가 보다. 그치? 아주 볼만하네.”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왜? 저놈들은 바이얀이 약자에게도 폭력을 쓸 때 신나게 옹호했던 놈들이다.
“그래 보이는군.”
아빠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정도 말소리라면 저쪽에게도 들릴 거다.”
“들으라고 해.”
“나는 상관없다만, 숨기고 있던 게 아니었나?”
힘숨찐, 아게노르에게 알려 줬더니 줄기차게 노래를 부르는 단어가 아빠에게서 흘러나오다니.
나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와, 진짜 안 어울리네.
“드러나도 상관없어.”
이제 숨길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적나라한 말을 들었던 몇몇 방계가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난 씩 웃으며 마주 노려봤다.
“뭘 봐.”
당당한 내 태도에 움찔하는 것도 잠시 투기마저 피우길래, 나는 슬쩍 아빠의 옷을 끌어당겼다.
“아빠, 나 몸이라도 풀게 되면 겉옷은 아빠가 맡아 줘. 데데랑 미사가 열심히 만들어 준 거란 말이야.”
“그러지. 도움은 필요 없나?”
“도움씩이야, 필요하겠어?”
“…….”
“누구 제자인데.”
아빠가 살짝 웃더니 나를 안아 들었다. 물줄기가 옆으로 일렁거렸다.
“다음엔 그 말 대신, 누구 딸이냐는 말을 듣고 싶군.”
“그 말은 5년간 많이 하지 않았나?”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말이라서.”
“……낯 간지럽지도 않아?”
“당연한 얘길 하는데 간지러워야 하나?”
“…….”
이런 말을 할 줄 알면서.
과거에는 대체 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까 싶었다.
그리고 과연 엄마와는 어떻게 지냈던 걸까.
새삼 궁금해졌지만 일단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가서 꽃을 가져오지.”
아빠는 나를 내려주고는 이걸로 모자라 손수 꽃을 가지러 갔다.
주변 가신들이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제 이상할 것도 없었다.
‘5년간 모습을 보인 거라곤 중급 기관, 가문 회의뿐이었으니.’
아직도 어색해할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나도 가끔 아빠를 보면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묘할 때가 있으니까.
“여동생님, 사람은 변하는 걸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 아빠?”
“뭐…….”
아무래도 나와 막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나도 신기하긴 해. 그래도 사람은 변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런가?”
“응. 본인에게 아주 커다란, 인생이 바뀔 정도의 충격이 있으면야. 변할 수도 있지.”
내가 겪어 온 회귀를 떠올리며 말했다.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뜻밖에도 아게노르는 신중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내게 늘 초롱초롱 열망과 집착으로 아롱진 눈을 하느라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냥. 변했다는 걸 생각하니까 떠오르는 놈들이 있어서?”
“떠오르는 놈들?”
“왜, 여동생님. 기억나? 내가 5년 전에 너한테 부탁했던 거.”
“뭐, 나한테 열 대만 맞게 해 달라고 했던 거?”
“그건 아직도 바라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아게노르가 머뭇거리나 싶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아틀란 있잖아.”
아게노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뒤에서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나는 체온이 닿는 동시에 홱 쳐냈다.
동시에 돌아서서 잡은 사람의 뒷목을 움켜쥐고 툭 다리를 쳤다.
쿵. 낮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아야야야……. 공녀님 아파요…… 힝.”
나는 곧바로 보이는 새하얀 머리에 놀라 얼른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본능이었다.
“헉, 야. 괜찮아? 그러게 왜 뒤에서 접근해. 그러지 말랬잖아.”
“멍청한 형이라서 그래요. 똑똑한 루가는 그러지 않아요.”
“누가 형이라는 거야. 내가 형이거든? 아야야…….”
내 아래에서 신음하는 소년 말고도 바로 옆에서 똑같이 생긴 하얀 머리를 가진 소년이 쏘옥 나타났다.
“루가, 루바.”
루가루바 쌍둥이 형제였다.
5년이 흘러 성장한 건 아게노르뿐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열두 살을 맞이한 쌍둥이였지만.
벨루가의 특성상 범고래만큼이나 성장 속도가 빠르지 않아.
아직도 아기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였다.
“헤헤, 공녀님!”
루바는 언제 내 손에 걸려 쓰러졌냐는 듯 씩씩하게 일어났다.
“다치진 않았어?”
“저는 튼튼해요!”
“아직 이마도 딱딱해지지 않은 것이 잘도 말한다.”
“힝, 진짠데.”
“너희도 온 거구나.”
“네, 엄마랑 아빠는 꽃 가지러 갔어요!”
“이봐, 두비두바.”
나는 살짝 찡그렸다.
“너무 가까우니까 좀 떨어져.”
“두비두바 아니에요!”
“공녀님이 원하시면 바꿀까여?”
“뭘 바꿔.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아빠랑 엄마는 이름도 바꿔 줄 거예요.”
“맞아, 공녀님 엄청 좋아해.”
“……진짜 할 것 같으니까. 그러지 말아 줄래?”
루가가 슬쩍 나랑 눈을 마주치고는 배시시 웃었다.
“공녀님은 5년 동안 만나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아한대요.”
“며칠 전 저택에 들렀는데도 우리는 보고 가지 않았지만요!”
“…….”
……안 그래도 머리가 좋은 애들이, 5년 동안 더 영악해졌달까.
자기 가문 좀 더 예뻐해 달란 말을 이렇게 둥글둥글 돌려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끄응, 한숨을 슬쩍 참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일리아와는 안 그래도 이번 주에 만나기로 했어.”
“와아, 제 방에 놀러 오세요.”
“네 방 아니고 우리 방이겠지!”
루가루바가 정신없게 꺄아꺄아, 재잘거리는 사이 자연히 우리에게 시선이 몰렸다.
“아게노르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멋있어요!”
“내가 뭐라고 부르랬지?”
“공녀님 수하 1호!”
“1호!”
“똑똑한데. 마음에 들었어. 너흰 영원히 내 후배 1호다.”
“와아아!”
아게노르는 대답해 주면서도 경계를 서는 물개라도 된 듯이 열심히 주변을 보고 있었다.
아니, 뭐. 주변을 본다기보단…… 노려보면서 쫓아내는 것 같지만.
‘하아, 교육 기관에서도 저러지 말라고 했는데. 또 이러네.’
저놈은 내가 있는 반에도 들어와서 저러곤 했다. 깡패야 뭐야.
‘범고래가 깡패라는 건 인정하는데 말이지. 난 좀 양심 있는 깡패 하고 싶거든?’
어째, 유치원을 벗어난 것 같은데 여전히 얘들과 있으면 5년이 흘렀음에도 다시 유치원 일짱이 된 기분이다.
‘할머니는 언제 오는 거지?’
오늘은 정식 장례를 치르는 날이니, 가주가 들어와서 바이얀을 보내는 의식을 치르면.
관이 묻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내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
가까워진 그림자에 머리를 갸우뚱하며 들어 올리면.
익숙한 얼굴이 앞에 있었다.
짧게 쳐진 머리, 범고래 직계를 상징하는 머리카락.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새빨간 눈.
“비켜.”
사납게 짓씹는 목소리.
둘째 아틀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