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Killer Whale Baby RAW novel - Chapter (25)
흑막 범고래 아기님 (25)화(25/275)
제25화
‘곧 달려오겠군.’
피에르는 분수대에 앉아 길 끝을 보며 나른하게 생각했다.
모든 것이 귀찮고, 또 귀찮다.
피에르 아콰시아델의 일상은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달리 말하자면 정해진 루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일상에 최근 한 가지 추가된 일이 있다면 갑자기 제자가 된 칼립소를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어째서 제 딸이 제자랍시고 나타나 제 밑에서 구르고 또 구르는지 모르겠으나.
‘굴리다 보면 알게 되겠지.’
피에르는 비교적 느긋했다.
그는 간만에 느끼게 된 흥미 어린 문제를 천천히, 달걀 껍질 까듯이 느릿하게 즐겨 볼 생각이었다.
그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의 딸은 나타난 순간부터 예상을 빗나가는 것으로 모자라 가끔 생각지 못한 문제를 터트렸다.
지금처럼.
“인사해, 스승님.”
칼립소는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옆에서 쭈뼛쭈뼛 기를 펴지 못하는 아게노르를 해맑게 소개했다.
“여긴 내 오빠야.”
“……그래서?”
피에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나타난 소년이 제 어린 시절과 퍽 닮은 아들임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피에르는 침묵했고, 지켜보던 아게노르는 더욱 희게 질렸다.
“…….”
지금 이 상황,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다를 게 뭐지?
그 사이 칼립소는 눈썹을 홱 치켜드는 피에르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제 저 애비의 감정 표현이 조금 보인달까.
‘저건 심기가 불편하단 소리지.’
그러거나 말거나 칼립소는 웃으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스승님.”
칼립소는 피에르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아게노르를 보는 것을 느끼며 준비했던 대사를 꺼냈다.
아주 활짝 웃으며!
“혹시 두 번째 제자는 안 필요해?”
* * *
다음 날.
제아무리 강력한 범고래라 하여도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나른한 오전이었다.
곧 점심시간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하품이 쏟아지는 시간.
이럴수록 낭독하는 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텐데.
너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기울이기는커녕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안 되지, 안 돼.’
할머니도 돌아온 이상, 더더욱 모범을 보여야 할 때였다.
반듯하게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어디선가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놀랍게도 카론 놈이 다른 방계 범고래와 키득대고 있었다.
‘웬일이래?’
내게 한 방 먹은 뒤로 쥐 죽은 듯이 살던 놈이었다.
플랑크톤도 이처럼 기척이 없을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로 살던 놈이.
기분 나쁘게 히죽대고 있다니?
게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완전 겁먹고 움찔하긴 했지만 기가 완전히 꺾인 느낌은 아니었다. 요거 뭔가 있겠다 싶다.
‘요 며칠 그냥 뒀더니, 다시 기가 산 건가?’
저걸 그대로 뒀다가 쌍둥이라거나 다른 애들을 때리고 다니는 깡패로 돌아가면 곤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루가루바 쌍둥이에게 약속도 했겠다, 날을 잡아야지 다짐하며 잠시 생각을 털어 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었다.
“공뇨님!”
“공뇨님!!”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도 하녀들과 점심 대신 다른 이들의 방문을 받았다.
“점심 준비해써여!”
“가치 먹어여!”
“좋아.”
어제 루가루바 쌍둥이에게 물어본 것이 있기도 한 데다, 겸사겸사 오늘은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미 하녀들에게도 아침에 미리 말해 둔 참이었다.
“공뇨님 기분이 좋아 보여여.”
“보여여!”
“그래 보여? 음, 틀린 말은 아니겠네.”
나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쌍둥이들은 날 따라서 웃다 말고 멈칫했다.
“공뇨님 팔이 아파여?”
“아야 했어여?”
“아아, 이거? 별거 아니야.”
나는 멍든 팔을 소매에 얼른 숨겼다.
이건 말이지…….
“어제 굉장한 일이 있었거든.”
“굉장한 일이여?”
“응. 아무도 모르는 부자 상봉이랄까…….”
으음. 굉장했지. 굉장했어.
나는 슬쩍 어제 일을 떠올렸다.
“혹시 두 번째 제자는 안 필요해?”
내가 이 말을 꺼냈을 때의 아빠 표정이란.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
단언컨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표정보다 더욱 선명하지 않았나 싶다.
“필요 없다. 썩 꺼져.”
단호한 말에 내가 놀란 것도 당연했다.
사실 나는 다른 곳에 더 놀랐다.
‘와, 꺼지라고 말하는 말투와 어조가 아게노르랑 똑같아!’
하루에 오빠와 아빠 두 사람에게서 꺼져란 소리를 들으니까 더 잘 알겠더라고.
물론 꺼지란 말은 나보단 아게노르에게 한 말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간에 어찌저찌 나는 아게노르까지 제자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는 제자라기보다는…….
“스승님, 쟤가 누군지 알아? 내가 오늘 쟤 이겼어. 스승님이 말했잖아. 싸우면 얻어터지지 말고 무조건 때리고 오라고.”
“……이겼다고?”
“응, 이겼어!”
언젠가 수하가 말했듯 피에르는 생각보다는 요구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건 나를 제자로 받아들였던 날처럼 이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내가 쟤를 이겨서 쟤가 내 수하가 됐는데 써먹을 곳이 없잖아. 여기에 함께 있으면 안 돼?”
“…….”
물론 두 번째 제자라기보다는 꼽사리처럼 낀 첫째 제자의 수하 정도에 그쳤지만.
‘이게 어디야?’
물론 아게노르의 자존심이야 우리가 지금 깔고 앉은 돗자리처럼 좀 구겨지기야 했겠지만.
그게 내 알 바인가.
그러게 나를 보자마자 여동생인 걸 알아봤으면 내가 더 잘해 줬을 텐데.
‘나도 무한정 선량하지만은 않다고.’
의외로 아게노르는 제 처지에 분함을 표시하거나 땅을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았다.
이게 사실 꽤 의외였다.
다혈질이다 못해 바닷속 분화구에 가까운 둘째였다면 분명 여기서 폭발했을 텐데 말이다.
“부자 상몽이 모예여?”
“부자 당봉이랬어!”
“아 진짜? 횽 천재다!”
“헤헷.”
“둘 다 아니란다.”
나는 회상에서 깨어나 쌍둥이들을 응시했다.
어느새 쌍둥이 근처에 쌍둥이들처럼 하얀 머리를 가진 성인이 보였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저희 가문 도련님들을 도와주셨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반가워.”
자신을 흰돌고래 가문의 집사라 밝힌 노인은 숙련된 솜씨로 눈앞에 휘황찬란한 도시락을 펼친 뒤, 다시 우리끼리 놀 수 있도록 물러났다.
“오늘은 집사가 왔어여.”
“맞아. 내일은 아빠가 올 거예여.”
“그래? 사이가 좋구나.”
역시 범고래를 빼면 다들 사이가 좋다니까.
나는 먹음직스럽게 펼쳐진 도시락을 보며 감탄했다.
‘아니, 이거 애들 셋이서 다 먹을 수 있는 거냐고.’
감탄하면서도 필요한 건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물어봤니?”
“네, 공뇨님!”
“녜!”
루가와 루바가 거의 동시에 대답하더니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락 가방을 뒤졌다.
무얼 하는가 싶어 보고 있자니, 곧 양피지 두 개를 가져와 나란히 내밀었다.
“이게 바로?”
“녜! 공뇨님이 어제 물어보신 거요.”
“물어보신 거!”
오, 이게 바로 그거란 말이지.
나는 서둘러 하나를 먼저 잡고 묶여 있던 끈을 풀고서 내용을 읽었다.
남은 하나의 내용까지 확인할 동안 루가루바 쌍둥이는 고요히 숨죽인 채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나는 모든 내용을 확인하고서 흡족하게 웃었다.
“아주 좋은데?”
“……!!!”
쌍둥이의 눈으로 마치 별빛이 내린 듯 초롱초롱해졌다.
“졍말요?”
“응. 아주 마음에 들어. 고마워.”
“횽이 아빠 졸라써요!”
“앗 너 그론 말 하지 마러!”
“아얏, 왜 때료!”
“싸우지는 말고. 둘 다 정말 고마워.”
나는 쌍둥이에게 받은 양피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아 들고는 루가와 루바 모두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애들은 애들인지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 헤헤 웃었고, 우리는 화목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공뇨님, 공뇨님. 아빠가요 왜 물어보는지 궁금해하셨눈데…….”
“공뇨님, 우리 집에 꼭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여전히 정신없는 쌍둥이들이지만, 적당히 걸러 듣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래? 음…….”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쌍둥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생각해 볼게.”
음식 맛이 아주 좋았던지라 단칼에 거절하기 약간의 미안함이 생겼으니까.
쌍둥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꼭이요!”
“꼬옥!”
“그래그래.”
식사 시간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쌍둥이네가 가져온 식사는 청어 자매가 하는 것만큼이나 솜씨가 훌륭하여 맛이 아주 좋았다.
내가 열심히 먹고 있자, 옆에서 루가가 신이 나서는 ‘우리 아빠는 영양까지 생각하며 음식을 차린다!’라고 자랑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더욱더 이 쌍둥이에게 부탁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쟤네 가문을 한번 방문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