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Killer Whale Baby RAW novel - Chapter (267)
흑막 범고래 아기님-267화(267/275)
제267화
아틀란이 당황하는 사이 에키온은 가만히 눈앞의 장소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신전이었다.
새하얀 기둥은 웅장하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거대했다. 온통 새하얀 터라, 고결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물론 더욱 거대한 용의 성에서 온 에키온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크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상치 않은 건물임은 분명했다.
“여기서 용의 힘이 느껴져.”
“아, 골치 아프네.”
아틀란이 제 관자놀이를 꾹 누르다가 이마를 짚었다.
“게다가…….”
“게다가 뭐?”
에키온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칼립소 앞에서를 제외하면 말을 흐리는 법이 없는 에키온이었다.
아틀란은 미약한 불안을 느꼈다.
아니, 뭔데 이 용놈이 뜸을 들이는 거야?
“용의 힘이…… 이상해. 오염된 건가?”
“오염? 그게 오염이 될 수 있었냐?”
“모르겠어.”
에키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므로.
곧이어 이어진 설명을 통해 아틀란이 에키온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너는 느껴지는 바 그대로 말한 거고. 용의 힘이 네가 아는 그 느낌이 아닌데, 이걸 표현하자면 ‘오염’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응. 정확해.”
아틀란이 고민에 잠겼다. 본디 그들의 임무는 칼립소가 대회의실에 참여한 사이 황성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그들 외에도 리리벨이나 여타 기사들이 똑같은 일을 다른 구역에서 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리리벨 쪽은 목적이 ‘병력 파악’이라 지향하는 바가 달랐지만.
어쨌거나 에키온이 용의 힘을 풍기는 진원지를 알아냈으니. 이제 여기서 물러나야 할 터다.
하지만 아틀란은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야,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저거 말이야……. 전생엔 없었거든?”
그들은 이전 생에 황성을 함락시켰다. 간부이자 최전방에서 싸웠던 아틀란의 머리에는 황성 지도가 지금도 선명했으며.
“내가 지금 대가리가 깨질 것같이 찝찝함을 느끼고 있단 말이지.”
실제로 모든 건물을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신전은 없었고.
황태자가 이번 생에 세웠을 테니, 조사하는 게 마땅했다.
아틀란은 판단을 끝냈다.
“들어가 보자.”
그러나 에키온에게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안 돼. 들어가면 들킬 거야.”
그들은 임무를 은밀하게 마쳐야 했다. 칼립소의 명이 그러했으니까.
게다가 탐색을 들켰다간, 한창 기싸움 중일 칼립소에게도 좋지 않을 터.
황실에게 괜한 트집을 잡힐 여지를 주는 일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떡하냐?”
칼립소가 회의실에서 나오면 신호를 주기로 했으나, 신호는 아직이었다.
아틀란은 잠시 귀에다 무언가를 꽂고 누군가와 소통했다.
“방금 리리벨에게 물어봤는데, 예상대로 지금 병력은 대회의실이 있는 건물에 집중되어 있어.”
그렇다는 건, 회의가 끝날 때쯤엔 이 신전 주변에도 얼마나 사람이 늘어날지 모른단 소리였다.
“어려우면 어쩔 수 없지. 저녁에 시도하자.”
저녁엔 연회가 열린다. 그렇다면 또 한 번 병력이 연회가 열리는 건물 주변에 집중될 터.
“시간이 필요해.”
“지금은 방법이 없단 소리지?”
“아니, 그게 아니야.”
에키온이 고개를 돌렸다. 아틀란은 에키온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금색 홍채와 몹시도 잘 어우러지는 듯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누가 수중 동물과 붙어먹은 용 아니랄까 봐, 빛도 무슨 푸른색이냐.’
아틀란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에키온의 뒷말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시간이 필요하단 소리야. 그래야…… 들어갈 수 있어. 조용히.”
방법이 있단 소리네? 아틀란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반나절.”
에키온의 대답에 아틀란은 하늘을 보았다.
반나절이라.
“연회 시작하고서 들어가야겠네.”
* * *
“사자 X끼!”
쾅! 문이 열리며 들어온 칼립소가 성질을 내며 냅다 제 장갑을 바닥에 던졌다.
레바이와 하우저가 뒤를 이어 들어왔고, 하우저까지 들어오면서 문이 닫혔다.
“후…….”
칼립소가 빠르게 진정했다. 순식간에 침착함을 갖추는 모습에 레바이는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살짝 감탄했다.
“기어이 연회 준비시간까지 시간을 끌던데.”
레바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칼립소가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어느새 하늘은 저녁이었다.
황태자가 주최한 대회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변잡기의 끝판왕이었다.
대화는 온종일 끄트머리만 맴돌았다.
그렇다고 참석한 가주와 대표들이 당장 박차고 일어나지도 못하게, 교묘하게 그들의 골칫거리를 하나씩 언급했다.
이를테면, 코끼리 수인들과 하마 수인들은 강 하나를 두고 오랫동안 영지 분쟁을 거쳐 왔다.
그런 점을 굳이 언급하면서 강의 영유권을 코끼리 수인이 가져가는 대신, 황실이 소유한 또 다른 영지를 내어주겠다거나.
들어 보면 매드럼과는 하등 상관없으나, 그들의 이익이 걸려 있는 탓에 넘길 수도 없는. 그런 주제들.
다들 하나같이 찝찝한 낯을 한 채 들어야만 했다.
이는 아콰시아델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모든 땅에는 황실이 어느 가문에게도 내어주지 않고 소유한 땅이 있었으며.
그중 하나가 바로 아콰시아델 옆에 위치한 강 주변의 땅과 황무지였다.
황실은 그들 소유의 땅에 땅의 힘을 심어 두었기에, 그들 허락 없이는 개간도 어렵게 만들었다.
‘머리를 잘 썼지.’
칼립소로서도 시간을 끄는 건 나쁘지 않았다. 바깥에서 조사하는 이들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데다가.
은밀하게 쫓아오는 피에르와 병력들이 충분히 도착할 시간을 주는 것이니.
그럼에도 화가 난 이유는 꼴도 보기 싫은 낯짝을 무려 반나절이나 보고 있어야 했다는 투정 같은 울분이었다.
“아, 내 눈 썩어 버린 것 같아. 한번 봐 줄래?”
“가주님, 돌고래가 세 보 이상 가까워지게 두지 마십시오. 허튼수작을 부릴 겁니다.”
“이거 놓지 그래요?”
하우저가 레바이의 어깨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레바이가 불쾌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칼립소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짓만으로 두 사람을 떨어트렸다.
“됐고. 레바이, 넌 저쪽에 연락해 상황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고. 하우저 넌 합류할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네.”
황태자가 준비가 촉박할 즈음에 회의를 끝내 버렸으므로, 에키온 쪽에 가 보기는커녕 별수 없이 곧바로 연회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참 음흉한 놈이었다.
“이런, 시간이 이렇게 되어 매드럼과 관한 이야기는 뒤로 미뤄지게 됐군.”
교묘하게 제 탓이 아닌 양 이리 말한 황태자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모든 인원이 연회에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을.
“매드럼 관한 황실의 최종 입장은 연회에서 공개하도록 하지.”
“외람되지만, 지금 말씀하시는 건 어려운 사항입니까?”
“이런, 염려들을 불러일으켰나? 그럼 내 특별히 땅의 맹세를 하지. 연회에서 반드시 매드럼 관련 참사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또한 중대 발표를 하겠네.”
황태자가 웃었다.
“기대해도 좋아. 그대들의 기대를 모두 충족할 테니까.”
성질 급한 가주의 불만마저도 억지로 가라앉히는 말이었다.
땅의 맹세까지 해 버리면 지킬 수밖에 없을 터이니. 가주와 대표들은 불평을 삼키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야, 근사한데?”
연회 준비는 최대한 빠르게 진행되었다. 칼립소는 미리 준비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기에 너무 화려한 디자인은 피해 채택됐다.
물빛을 띤 드레스는 천 위로 얇고 속이 비치는 천을 덧대어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치는 듯 우아한 흔들림을 자아냈다.
드레스 자락은 앞쪽이 다소 짧고, 뒤쪽이 긴 언밸런스 형태였다.
칼립소는 이쪽이 다리를 움직이는 데 편하리라 생각했다.
신발은 종아리까지 끈을 묶는 샌들형 구두였고, 발에 맞춘 것처럼 편안했다.
어깨는 모두 드러낸 오프 숄더 형태였고, 그 위로 얇은 재질의 숄을 걸쳤다.
‘이거, 사람 목조르기 딱 좋겠는데?’
물론 칼립소는 숄을 보며 이런 생각이나 했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우세요!”
디자이너인 토끼 수인은 칼립소를 돕겠다며 제자들을 대동해 의상을 걸치는 것까지 마쳤다.
옆에서 마사가 흐뭇한 얼굴로 칼립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
칼립소가 피식 웃었다.
한편으로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시간 전 다녀간 레바이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용의 힘을 내뿜는 진원지를 발견했지만, 잠입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
진원지는 3회차에는 없던 거대한 신전이라고 했다.
위에서 바라보니, 피뢰침 같은 것과 용 조각이 있었다나.
그리고 에키온은 반나절 내내 은밀하게 들어갈 준비를 했고, 그건 칼립소가 연회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신전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유감스러웠다.
‘혹시 황태자놈이 내게 그 건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렇게 시간을 끈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었다.
레바이는 보고를 마친 뒤 에키온 쪽으로 합류했다.
미지의 장소라면, 레바이만큼 도움이 되는 이가 또 없을 것이다.
그의 특기는 거기서 새로운 위험을 맞닥뜨렸을 때 미리 경고해 줄 수 있는 능력이니까.
“준비되셨습니까?”
칼립소는 고심 끝에 하우저를 제외하고 핵심 인력을 에키온 쪽으로 모두 보냈다.
감이지만 그리해야 할 것 같았다.
“웨일 님께서도 20분 전 준비를 모두 마치셨습니다.”
기다렸겠네. 칼립소는 이리 생각하며, 곧 웨일을 마주했다.
“멋진데?”
웨일이 미소했다.
“고마워.”
확실히 칼립소와 맞춘 형태의 하얀 예복을 걸친 웨일은 근사했다.
하얀 바탕에 가슴을 감싸고 허리에서 떨어져, 허리띠로 꽉 묶은 형태는 아콰시아델 전통 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복이었다.
푸른색으로 포인트를 준 형태가 웨일의 정갈하면서도 어딘가 거친 외양과 잘 어울렸다.
“우리 애들은 입으래도 잘 안 입던 제복인데. 결국 이번 생에선 네가 입은 걸 처음으로 보네.”
체격이 크고 팔다리가 길다 보니 시원시원한 매력이 돋보였다.
생각보다 저 가슴을 감싸는 천이 입기 귀찮게 만드는 주범인지라, 3회차의 수하들은 질색하며 입지 않았다.
매번 전투를 하는 일이 잦았기에 입을 일이 없기도 하였다.
생각해 보니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영광이야.”
그리고 그 생각은 웨일의 미소와 함께 사르르 사라졌다. 지금은 중요한 일을 할 때였다.
“그럼 훌륭한 미끼가 되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