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Killer Whale Baby RAW novel - Chapter (27)
흑막 범고래 아기님 (27)화(27/275)
제27화
나는 재빨리 양피지를 바닥에 던지고 피했는데, 정말 뜻밖에도 살짝 놀랐다.
부웅, 검이 흩날리는 소리가 꽤 컸기 때문이었다.
‘오, 썩어도 준치라 이거지.’
확실히 리치가 달라지니 조금 버겁기는 했다.
정확히는 이 몸의 팔다리가 짧은 것이 애석했다.
“하, 하하! 도, 도망만 치는 거 보니 무뎝지? 무셥지!!”
닿기만 하면 카운터인데 닿기도 전에 저 눈먼 검이 붕붕 돌아다니니 말이다.
‘계단에서 덤볐으면 차라리 밀어 버렸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나는 결심했다.
어차피 겁에 질려 마구 휘두르는 검이다.
그냥 둬도 자멸할 것이지만,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오늘 할 일이 많단 말이야.’
나는 결국 귀찮음을 조금 감수하기로 했다.
‘내가 싸움을 한두 번 한 줄 아냐.’
지난 회차, 가주가 되기 위해서 거친 싸움만 떠올려도 수백 번이 넘는다.
하물며 전쟁까지 합치면 어떻겠는가.
내가 선택한 것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저놈은 깜냥이 안 돼.’
휙휙 잘도 피하던 내가 검로로 얼굴을 들이밀자, 아주 잠깐이지만 카론이 멈칫했다.
‘그렇지. 여러 생각이 들지?’
내가 정말 직계를 해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부터, 아직은 첫 살인을 해 보지 못한 아이의 순수한 망설임마저 떠올랐다.
저놈은 내 오빠들처럼 또라이 혹은 망나니가 되지 못했다.
검이 멈춘 틈을 타 손쉽게 피했으나 검날이 내 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나는 발을 들어 카론 놈의 명치를 쑤셨다. 아주 통쾌하게 들어간 일격이었다.
무게를 실었으니 꽤 아플 거다 이놈아.
땡그랑!!
“콜록! 콜록콜록! 켈록!”
“분수에 맞지 않는 무기씩이나 쥐니까 이런 꼴 보는 거야.”
나는 담담히 말하며 돌아가서 양피지를 주웠다. 아니, 주우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저릿한 감각이 등에서 느껴져 한숨을 쉬며 빠르게 움직일 때였다.
“이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허공에 검이 물줄기에 휩싸인 채로 둥실둥실 떠 있었다.
물의 힘이다.
‘이 초급 교육 기관에 물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는.’
정체를 짐작하며 시선을 돌린 곳에 역시나 라일라가 서 있었다.
뒤로는 선생 두엇이 함께 보였지만 라일라에 가려 모두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까칠하고 빈틈 하나 없는 얼굴로 나와 카론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걸어왔다.
“장식장에 장식된 검은 학우를 위협하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카론 군.”
어찌 보면 무감하고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러나 왜일까, 나는 한순간이지만 날카롭게 빛나는 시선을 보았다.
“제가 대표로 있는 이 건물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뻔했다는 사실이, 아주 유쾌하지 않아요.”
“라, 라일라 님, 저, 저눈…….”
“힘에는 책임감이 따른다. 이는 모든 고래 수업반에서 가르치는 기초 사항입니다. 카론 군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눈 그져, 그져……!!”
“됐습니다. 나머지 말은 징계실에서 듣도록 하죠.”
단호한 말과 함께 라일라가 고갯짓하자, 그녀의 뒤로 서 있던 선생들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카론을 데려갔다.
아주 잠깐 내게 시선을 주는 것도 같았지만 잠시뿐이었다.
곧 복도엔 나와 라일라만이 남았다.
나는 아직도 양피지를 다시 주우려고 주춤거리던 자세였던지라 몸부터 바로 했다.
“고마워.”
내 인사에 라일라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릴 뿐이었다.
까칠하고도 사무적인 얼굴로.
“인사받을 일이 아닙니다. 이 교육 기관에서 장으로서 당연한 처신을 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라일라 당신은 정식으로 열리는 징계 회의가 아니면 절대 행동하지 않잖아?”
내가 아는 라일라라는 사람은 그러했다.
이전 회차에서의 일이지만, 지금이라고 그녀라는 사람이 달라졌을 것 같진 않았다.
“어떤 이유로 발발한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서기 어려웠을 거 알아. 그럼에도 날 도와줘서 고맙다는 거야.”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라일라의 표정이 잠깐 흐려졌다.
“당신은 그 어느 때에도 중립을 지키고 양쪽의 사정을 들어야 할 사람이니까.”
나는 머나먼 과거를 떠올렸다. 공정했던 사람.
그 공정으로 원했든 원치 않았든 내 편을 들어 주었던 사람을.
“고마워.”
“……제가 중급 기관의 우등생과 이야기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군요.”
라일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조금 전 공녀님의 자리에 다른 아이가 있었더라도 저는 그 검을 막았을 겁니다.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글쎄, 일단 내가 아니었다면 카론이 검을 휘두를 일도 없지 않았을까.
“뭐, 내가 카론에게 엄청난 원한을 샀을지 누가 알겠어. 그럼에도 내 편 들어서 막아 줬다고 생각할게. 고마워.”
이렇게 말하자 라일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녀는 꽉 당겨 묶은 제 머리를 만지려다가 멈칫하고는 날숨을 내쉬었다.
“정말 특이하신 분이시로군요.”
라일라의 날숨과 함께 물줄기가 검을 떨어트리고는 이번엔 나한테 다가와서 양피지를 주워 주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양피지를 받았다.
“사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두 들었으니까요.”
“들었다고?”
“초급 기관 1층 복도는 방음이 되는 곳이 아니니까요.”
물의 힘을 사용할 정도의 범고래는 오감도 뛰어나다.
소리부터 듣고서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설명할 일을 덜었는걸. 하지만 조금 의문이긴 했다.
대화를 들었다면 더욱더 전후 사정을 모를 수도 있었다.
“음,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이상한데. 나도 징계실 가야 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중간에 대놓고 카론을 도발하기도 했으니까.
‘같이 징계실로 가서 전후 사정을 말하는 거라면 몰라도.’
적어도 내 편을 거리낌 없이 들어 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공녀님께선 징계실에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분?”
“네.”
라일라의 물줄기가 나를 잡더니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덕분에 나는 둥실 떠오른 채로 라일라와 얼굴을 마주했다.
“피에르 님께서 칼립소 님을 잘 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어?”
나는 멈칫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이건 태연함을 유지할 새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가 얼른 표정을 숨겼지만 이미 들통난 뒤였다.
“저는 피에르 님께 빚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라일라가 살짝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피에르 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해야겠군요.”
아니, 뭐야? 라일라가 피에르의 사람이라고? 아빠의 사람?
그건 참 놀랍지만……. 내가 놀란 건 그 포인트가 아니라고.
‘아빠가 나를 잘 봐 달라고 했다고? 왜? 도대체 언제?’
입술이 뻐끔뻐끔 움직였다가 다시 닫혔다.
제대로 묻고 싶었지만, 신중해야 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뻥을 쳐 놨잖아……!’
자칫 잘못 말을 꺼냈다간 이 뻥을 들킬 수도 있었다.
속으로 몰래 숨을 삼켰다.
하씨, 궁금한데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완벽한 자가당착이었다.
라일라는 이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아주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녀가 진짜 내 마음을 전혀 알 리 만무했다.
“물론 저도 이런 명은 처음이긴 합니다. 그분이 이런 명을 내리시기도 하는군요.”
“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 * *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라일라 손에 방생을 당한 뒤로 나는 마차에 올라 식은땀만 줄줄 흘렀다.
오랜 시간 뒤에 나타난 나를 보며 시종은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째서인지 말을 걸진 않았다.
나야 반가운 일이었다.
그 탓에 침묵하는 시간 내내 땀을 줄줄 흘리게 된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음…… 어떡하지. 오늘 가도 되는 건가.’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교육 기관이 끝나면 아빠가 사는 건물로 향하는 것.
그러나 발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엄, 갔더니 완전 무서운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상상해 보았다.
“……그동안 나를 속이며 잘도 재미를 본 모양이군?”
“재밌던가? 모두 내 손바닥 위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이렇게 살벌하게 지껄이는 아빠의 모습을.
어째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영영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매도 먼저 맞자는 주의였다.
‘그래 일단 대면해 봐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지!’
그리하여 피에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옷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품에 안긴 양피지를 응시했다.
‘엄, 이걸 확인했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따라 저기가 풀풀 마기를 내뿜는 마왕의 성처럼 느껴졌지만 어쩌겠나.
가야지. 에휴, 가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