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Killer Whale Baby RAW novel - Chapter (87)
흑막 범고래 아기님 (87)화(87/275)
제87화
빛이 사라졌을 때, 투스가 있던 자리에는 조그만 아이가 서 있었다.
용 공작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아이가.
“이게 무슨…….”
-투스 용 공작님에게서 파생된 존재야. 투스는 이렇게…… 몇 년을 버틸 수 있어.
투스가 손을 뻗더니 내 손을 잡았다.
주인이나 권속이나 똑같이 내가 용 공작의 손을 잡던 그 모습을 흉내 낸 채로.
-투스 공작님 오래오래 잘 배웠으면 좋겠어. 투스는 뭐든 할 수 있어.
“투스. 잠깐만, 왜 그렇게 말해? 들키지 않고 나가면…….”
-…….
투스가 용 공작의 얼굴을 한 채로 방긋 웃었다.
나는 멈칫했다.
“……둘 다 나가면 확실하게 들킨다고 생각하는구나.”
투스는 방금 전과 다름없이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다만 미소가 긍정을 뜻하는 것 같았다.
이내 맞다는 듯 끄덕여 보였다.
-칼립소, 투스 시간의 힘 알아봐. 칼립소는…… 시간의 힘 버틴 사람인데 착해.
“…….”
-칼립소, 용 공작님 도와줘.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용 공작을 이용하는 자들이 어떤 짓을 벌일지 들은 상황이었다.
확실히 투스의 말대로 대비를 세우지 않으면 금방 들킬 것이다.
그 후엔 사방으로 용 공작을 찾을 테고, 내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이 대신 희생을 자처할 정도로 강한 이 애정과 사랑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건 내가 지구에서나 받았던 애정이기에.
60여 년의 회귀 동안 잊었던 것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것.
정확히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어 이제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워진 애정이라고 할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너는 용 공작이 안전하게 배우고 자라길 바라는구나.”
-응! 투스에게 용 공작님 목숨이야. 생명이야!
“그래…….”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런 사랑, 나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부러울까.”
-칼립소 울어?
“아니, 무슨 소리야? 네 뜻은 알겠어, 투스. 그럼 여기서 억지로 널 끌고 가는 건 오히려 네 결심을 모독하는 일이겠지.”
나는 힘을 주어 투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투스를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았다.
한편으로는 투스의 말처럼 투스가 용 공작 대신이 되어 준다면, 우리는 문제 없이 범고래 영지로 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이토록 이성적인 계산과 생각이라니. 역시 나는 투스가 말하는 것처럼 선량하지 않아.
“투스, 나는 착하지 않아. 하지만 사실은…… 선량한 존재를 아주 많이 좋아해.”
조롱을 일삼는 육지 동물 사이에서, 이기적인 범고래 틈에서 3번의 인생을 살면서 생각했어.
내가 언젠가 저들만큼이나 강한 권력과 힘을 갖게 된다면.
나는 선량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거라고.
내가 이끌던 가문은 어느 미친놈의 계략과 거기 희생당해 폭주하고 만 용의 분노에 삼켜져 버렸지만.
“그렇기에 나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너를 좋아해.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투스도 칼립소 좋아해!
“응, 그래서 넌 목숨과도 같은 존재를 내게 맡긴 거지?”
나는 용 공작을 한 번 바라본 뒤에 이어 말했다.
“나는 용의 신부야. 그러니 10살이 되면 반드시 이 도시로 오게 될 거야.”
내가 가주가 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10살이 되면 널 데리러 올게.”
-…….
“7년. 7년이면 충분할까?”
-응! 공작님 그 시간이면 충분해!
아니, 난 네가 괜찮냐는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고 한들 이 아기 뱀은 헤실헤실 웃으며 괜찮다고 할 것 같았다.
-투스, 들려? 지금부터 내 말 따라 해. 따라 하지 않으면 공작님 안 데려갈 거야.
-헉, 할게, 할래!
그래서 내가 강제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범고래, 약속 지켜라. 바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버, 범고래…… 약속, 지켜라? 바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어허, 더 크게. 안 데려간다?
-앗, 바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나는 그제야 싱긋 웃었다.
“그래, 반드시 약속 지킬게. 칼립소 아콰시아델의 이름을 걸고. 바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이제 이 약속은 내게도 의미 있는 맹세가 되어 버렸다.
10살이 되면 반드시 돌아오겠다.
물론 그 이전에 올 수 있다면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용 공작님은 안전하게 잘 모실게. 걱정하지 마. 네가 준 수첩 내용도 숙지할 테니까.”
나는 처음으로, 집에 가는 목표 앞에 또 다른 목표를 새겼다.
집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조차 기회를 미뤄서라도 이룰 약속일 거라 굳게 결심했다.
-가, 칼립소!
“응, 갈게.”
용 공작의 손을 잡았다.
“용 공작님, 너는 인사하지 말아.”
“…….”
“꼭 다시 만날 테니까.”
나는 투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대체 투스가 어떻게 글씨를 쓸 수 있었고, 용 공작에게 어설프게나마 스푼 쥐는 법을 가르쳤는지 알게 되었지만 기분은 씁쓸하기만 했다.
반드시 돌아올게.
용 공작의 손을 꼬옥 붙잡고 밖에 나섰다.
“투스.”
“응. 투스를 꼭 다시 보러 오자. 내가 최대한 노력할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았어.’
용 공작의 거처에서 큰 이슈가 발생했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이건 아빠가 출발할 때 매우 빠른 속도로 도착해 준 덕분이다.
그래서 시간을 아꼈어.
나는 용 공작과 함께 이리저리 움직이며 조금 전 내가 들어왔던 창문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깨진 면이 뾰족뾰족 날카로웠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역시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없는 곳이잖아…….”
내가 살던 곳처럼.
나는 창문 앞에 서서 흘끗 밖을 보았다.
‘아빠는 내가 가까이 다가오면 기척을 알 수 있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내 앞으로 포옹 물줄기가 솟았다.
아빠의 신호다.
나는 용 공작이 멘 가방에서 로브를 꺼냈다. 이걸로 둘이 한꺼번에 감을 수 있나 싶었는데 무리였다.
다치지 않으려면 최소 두 번은 감아야 할 텐데 용 공작을 둘둘 두르니 남은 천이 애매했던 것이다.
일단 아빠의 로브로는 용 공작만 감아 놓고, 가방에서 용 공작의 망토로 보이는 것을 꺼내 내 몸을 대충 감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용 공작을 공주님 안기처럼 들어 올렸다.
어차피 아빠는 어디선가 보고 있을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창문에 난 구멍은 용 공작도 아슬아슬하지만 나갈 수 있을 크기였다.
일단 용 공작을 먼저 창문 가까이로 내밀었더니, 물줄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용 공작의 허리를 감쌌다.
탁!
용 공작이 내 손을 잡았다.
겁에 질린 듯한 표정.
아니, 조금 헷갈리는데? 겁에 질린 게 맞나?
불안해하는 느낌이어서 진정부터 시키기로 했다.
쉬이-. 나는 용 공작의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그리고 나까지 창문을 통과하자, 물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감쌌고, 그제야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나는 허공에서 용 공작을 다시 끌어안았다.
“조금만 참아, 금방 내려갈 테니까.”
일순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당연히 겁에 질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용 공작은 빠른 속도엔 멀쩡했다.
그럼 아깐 왜 겁에 질린 거야?
아, 뾰족한 것을 무서워하나?
이리저리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나무들이 보였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 나를 안아 들었다.
당연히 아빠였다.
“스승님!”
“꽤 오래 걸렸군.”
아빠는 말하면서도 한곳을 쳐다보았다.
용 공작을 볼 줄 알았는데, 저쪽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 그래도 그 용 공작인데……. 게다가 소문만 무성한 용 공작이 이렇게 어린아이인데 궁금하지도 않나?’
이렇게 세상사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사람인데 나한테만 다르다는 점이 가슴 한구석을 속절없이 툭 건드려 왔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곧 아빠가 관심을 두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쪽으로 오는군.”
“뭐? 진짜? 알고 오는 거야?”
“아마도.”
아니, 대체 어떻게? 그보다 들키면 위험한데.
용 공작은 아직 내 옆에서 아빠의 물줄기에 둘러싸여 둥실 떠 있는 상황이었다.
“용 공작이 창문을 넘을 때 크진 않지만 유리가 살짝 깨지며 소리가 났다.”
“엥? 말도 안 돼. 그 정도 소리로 알아챘다고?”
그 소리는 나도 들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긴장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 또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
아빠는 한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일단 움직이자.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정말 들키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