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00)
블랙 라벨-99화(100/299)
블랙 라벨 99화
100. 돈 벌 시간
쇼가 끝난 뒤.
재승이 런웨이 무대 뒤편 백 스테이지(Back Stage)로 내려오기 무섭게, 경영인 테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브랜드 역사를 통틀어 오늘의 쇼가 최고였던 것 같군요.”
쇼가 지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그의 입가 위로 피어올라 있는 미소가, 더할 나위 없이 환해 보이는 듯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묵례를 해 보이고는, 곧장 말을 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프리미엄 브랜드, ‘알렉산더 킹’이 그간 쌓아 올려왔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스럽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이내 테오가 자신의 등 뒤편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사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리, 우선 인사부터 나누시죠. 알렉산더 킹의 이번 시즌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아 주셨던 투자자분들이십니다.”
테오의 설명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투자자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도움을 받게 될지 모르는 이들이 아니던가? 안면을 터 두어서, 또 좋은 인상을 심어두어서 손해 볼 게 없는 이들이었다.
투자자들과의 대면이 끝나갈 무렵, 알렉산더가 재승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리, 아무래도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회견 시작하기 전에, 가족들과 인사라도 나눠야지.”
짤막하게 “네, 알겠어요” 하고 답해 보인 재승이, 곧장 대기실 벽면에 거치 된 시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잠시나마, 쇼를 마치고 나면 푹 쉴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이는 크나큰 오산이었을 뿐. 쇼를 마친 뒤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가히 살인적이라 묘사해도 과언이 아닐 엄청난 양의 스케줄이었다.
일단 30분 뒤, 쇼장 내부에 비치된 ‘포토존(Photo Zone)’에서 방송국 소속 기자들과 회견 형식의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NBN’이나, ‘FOX’를 비롯한 메이저 방송국부터 시작하여 생소한 이름의 지역 방송국에 이르기까지….
그다음?
그다음엔 사전에 협의를 마친 대로, 여러 매거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 약속된 스케줄만 하더라도 이 정도다.
쇼장에 방문한 여러 패션 블로거, 에디터, 칼럼니스트들과도 개별적인 시간을 가져야 할 게 분명했고 말이다.
모든 스케줄을 끝마치려면, 최소 대여섯 시간 이상은 걸릴 게 분명했다.
만약 지금 주어진 30분가량의 시간을 놓쳐 버리고 나면, 그 뒤로는 가족들을 비롯한 지인들에게 감사를 표할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투자자들과의 대화를 간단히 마친 뒤, 곧장 쇼장으로 이어지는 복도로 나섰다. 문을 열고 바깥에 한 걸음을 내딛던 찰나.
낭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아-!”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여동생 ‘승희’였다.
승희의 뒤편으로는 어머니와 아버지, 또 브랜드 이사회 측에서 고용해 준 통역사가 함께 서 있었고 말이다.
남매 관계가 으레 그렇듯, 가까이 지낼 때보다는 떨어져 지낼 때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게 마련이지 않던가?
이내 재승이 승희를 한 번 꼭 안아주고는, 나직이 말을 건넸다.
“승희야,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빠, 완전 대박. 진짜 멋있었어!”
승희가 엄지를 척 하고 치켜세워 보이던 찰나, 두 사람의 해후를 마냥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한마디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아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고마워요.”
“수척해진 것 좀 봐.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 거 맞지?”
이내 아버지 이강수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어머니께 한차례 핀잔을 주셨다.
“이 사람아, 여기까지 와서도 주책이야? 재승이가 애도 아니고, 끼니 정도는 알아서 잘 챙기겠지.”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얼마 만에 보는 건데 잔소리만 하다가 가려고 그래?”
무어라 항변하시려던 어머니께서 끝내 못 이기겠다는 듯, “알겠어요, 알겠어” 하고 답하시자 아버지께서 다시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하셨다.
“재승아, 준비하느라 욕봤다.”
“아니에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긴, 당연히 와야지.”
휑한 복도에, 정적이 내려앉기를 잠시.
“네가 자랑스럽다.”
아버지께서 무심한 투로 툭 던지신 한마디 말이 울렸다. 그 한마디 말이 복도에, 귓가에, 가슴에 울렸다.
백 마디 유려한 말보다, 농밀하게 축약된 한마디 말이 더욱 강렬히 다가오는 순간이 있지 않던가?
지금.
재승에겐 지금이 바로 그랬다.
본래 표현이 아주 서툰 분이시다.
여느 부자(父子)에겐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이 짤막한 말조차, 몇 번의 고민 끝에 힘겹게 꺼내셨을 게 분명했다.
이내 재승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채, 사뭇 밝은 투로 답했다.
“저도요. 아버지가 존경스러워요.”
“녀석, 말은….”
다시금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할 무렵,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께서 곧장 화제를 돌려주셨다.
“아들, 그나저나 방학 때는? 한국 들어올 수 있는 거야?”
“네. 오래는 아니더라도, 잠깐은 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불과 두 달 뒤면 여름방학을 맞이하게 된다.
비록 밀린 과제와 학업 탓에 정신없이 보내야 할 게 너무도 극명했지만, 어떻게든 짬을 내서 한국에 들를 요량이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고, 하루 정도는 영국과 카페에 앉아 종일토록 수다를 떨고 싶었다.
또 지금 이 시각에도 애쓰고 있을, 송 이사와 직원들 역시 보고 싶었고 말이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그때….”
어머니께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저 멀리 복도 반대편에서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Lee)-!”
다름 아닌, ‘애슐린’이었다. 그녀는 재승을 발견하기 무섭게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곧장 재승의 품에 와락 안겨 버렸다.
이내 재승이 가족들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애슐린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애, 애슐린.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내 애슐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재승의 가슴팍을 세게 두드려 대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정말 못됐어요.”
“예…?”
언뜻 살펴보니 가족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뭐랄까? 예상 가능한 신파극을 지켜보는 것만 같은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재승이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찰나, 뒤늦게 다가온 제랄딘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리의 퍼포먼스 덕분에 마음고생이 심했거든요.”
이번 쇼의 퍼포먼스와 관련된 정보는, ‘극비’처럼 다뤄졌다.
브랜드 측 인물들과 모델들, 또 일부 스태프들에게만 공개됐던 사항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자세한 정황은 모른다지만 잔뜩 번져 있는 그녀의 눈 화장으로 어림짐작건대, 그녀가 이번 퍼포먼스로 인해 크게 걱정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내 재승이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며, 나긋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재승의 말이 촉매가 된 것일까? 애슐린이 복받치는 설움을 어쩌지 못한 채, 다시금 눈물을 흘려 보이기 시작했다.
“리, 저는 정말 이대로 끝인 줄 알았다고요.”
“애슐린, 정말 미안한데….”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재승이, 곁눈질로 가족들을 가리켜 보이고는 나직이 덧붙여 말했다.
“제 부모님과 여동생이에요. 우선 인사부터 나누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도 모르게 “맙소사….” 하고 소리 내어 말해 보인 애슐린이, 애써 태연한 척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애슐린’이라고 합니다.”
이내 어머니께서 들뜬 목소리로 통역사에게 연신 물음을 건네기 시작하셨다.
“애인이래요?”부터 시작해서, “이름은 뭐래요?”, “나이는 몇 살이래요?”, “직업은요?”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종지에는, “외국인 며느리는, 아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하고 혼잣말을 해 보이시기까지 했다.
반면 동생 승희는 제 입꼬리를 귓가에 걸어둔 채로, 재승을 놀리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고 말이다.
“오빠, 여자를 울리면 어떻게 해?”
“뭐…?”
“신사답게 행동해야지! 신사답게!”
“쪼그만 게 뭘 안다고….”
“왜 이러셔? 나도 알 건 다 알거든?”
그때,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랄딘이 재승에게 말을 건네 왔다.
“정말 최고의 쇼였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게 퍼포먼스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엔 정말….”
“과찬이에요. 와 주셔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어쨌든, 이번 특집 칼럼은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한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이번에는 ‘미셸’, ‘카일’, ‘필립’을 비롯한 아뜰리에의 재단사 전원이 재승을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아뜰리에의 유니폼이나 마찬가지인, 흰색 가운을 차려입고 있었다.
“리, 정말 훌륭한 쇼였다고 생각해요.”
미셸을 시작으로 아뜰리에의 재단사 전원이 제 각각 한마디씩 감상평을 남겼다.
이내 미셸이 준비해 온 생화(生花)를 엮어 만든 꽃목걸이를 재승의 목에 걸어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이번 시즌을 리와 함께 함으로 인해, 모든 재단사들이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비록 짧은 시간 함께했다지만, 우린 영원히 리를 잊지 못할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금 재승을 꼭 끌어안으며, “리와의 만남은, 정말 각별한 선물이었어요” 하고 말해 보였다.
아뜰리에의 재단사들이야말로, 이번 시즌을 준비하는 동안 가장 고생했던 이들이 아니던가? 그들 역시 야근을 밥 먹듯, 밥은 안 먹듯 해가며 작업에 몰두했었으니 말이다.
이내 재승이 재단사들을 한 번 쭉 둘러본 뒤, 진심이 가득 담긴 투로 말문을 열었다.
“다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저는 이번 쇼가, 여러분의 손끝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도식은 제가 그려냈을지 몰라도, 그 도식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끔 숨을 불어넣어 주신 건 여러분이었으니까요.”
말을 마친 재승이 한차례 “그렇죠?” 하고 되물어 보인 뒤,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제가 처음 구상했던 이미지를, 정말 완벽히 재현해 주셨어요. 단언컨대, 저처럼 부족한 디자이너가 지휘하기엔 너무 과분한 아뜰리에였어요. 부족한 제게, 도통 실감 나지 않는 꿈만 같은 현재를 선물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내 미셸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한 채, 재승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함께 시즌을 준비하며 고군분투했던 기억들이, 돌연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탓이었다.
다른 재단사들 역시, 마찬가지.
물기가 잔뜩 서린 눈을 한 채, 그간의 기억을 회상하는 데 여념이 없던 것이다.
함께 인고의 시간을 거치는 것만큼, 쉽게 유대감을 쌓을 방법이 있을까?
비록 수개월 남짓한 시간을 함께한 게 전부라지만, 이별을 슬퍼하기에는 일절 부족함이 없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내 미셸이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가, 당신을 앞날을 축복할 거예요.”
“저도요.”
“언젠가 다시 함께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날만 손꼽아 기다려야겠군요.”
단, 다시 돌아올 땐 몸값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우정이란 이름으로 ‘DC’를 해주더라도, 최소 열 배 정도는 더 받는 게 올바른 처사일 테니까.
아름다운 삶의 아름다운 날. 또 아름다운 날의 아름다운 순간을 누릴 새도 없이, 곧장 스케줄의 늪에 빠져들어야 할 듯싶었다.
“리! 시간 다 됐어.”
어느새 저 멀리 복도 끝에 모습을 드러낸 알렉산더가, 연신 재촉을 해 보이고 있던 탓이었다.
* * *
쇼가 끝난 뒤의 스케줄은 강행군, 그 자체였다.
방송사들을 대상으로 한 회견을 마친 뒤, 도합 열 군데가 넘는 매거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페이’까지 받아가며 곳곳에 자신을 PR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던가?
덕분에 마냥 피곤하거나, 힘들지만은 않은 듯했다.
어쨌든, 그렇게 모든 스케줄을 마치고 나니 시곗바늘은 어느덧 저녁 11시를 훌쩍 넘어섰음을 알리고 있었다.
PM 11 : 54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브랜드 ‘알렉산더 킹’의 본사 건물 1층에 발을 들였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네.’
이제 ‘룩북(Lookbook)’ 발매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6분 남짓. 오늘 자정 룩북이 공개됨과 동시에, 이번 시즌 제품의 판매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번 시즌의 룩북이 발매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알렉산더를 비롯한 이사회 임원들과 함께 지켜보기 위해 본사 건물에 방문한 것이다.
이윽고, 재승이 본사 건물 로비 중앙에 들어섰을 무렵.
손에 쥔 스마트폰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알렉산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럼, 이번 시즌의 성공을 이끌 주역인데 직접 모셔야지.”
재승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자,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러 보이며 물음을 건넸다.
“칼럼들은 살펴봤어?”
“당연하죠.”
오늘 쇼에 참관했던 영향력 있는 방문객들의 SNS를 시작으로, 패션 웹 커뮤니티, 또 매거진들의 공식사이트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게시된 게시물을, 짬이 날 때마다 틈틈이 훑어보았다.
비록 잠깐 살펴본 게 전부라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듯 보였고 말이다.
띵-.
그때, 막 로비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반응 끝내주던데, 소감이 어때?”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요.”
덤덤한 투로 답해 보인 재승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나직이 되물었다.
“알렉산더, 원래 인생이 이렇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요?”
짧은 시간, 너무 많은 게 달라졌다.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파슨스 디자인 스쿨 진학이 최대의 목표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비록 지금의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나, 뉴욕 패션계의 스포트라이트를 온몸으로 받는 중이 아니던가?
이내 알렉산더 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확신 가득한 투로 답했다.
“응, 준비된 사람이라면.”
알렉산더의 말이 끝맺어지던 그때.
띵-.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불이 꺼진 복도가 두 사람을 반기고 있다.
이내 알렉산더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며 말했다.
“리, 아무래도 서둘러서 걷는 게 좋겠어.”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자정까지 불과 1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에디터, 평론가, 칼럼리스트들의 평가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진실된 평가를 받아 볼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다름 아닌, 매출.
매출이야말로 비즈니스에서 ‘실력’을 평가할 때 쓰이는 데이터 중, 가장 이성적이고 직관적인 데이터가 아니던가?
불과 몇 분 뒤, 브랜드의 공식 사이트를 통해 이번 시즌의 ‘룩북’이 공개됨과 동시에 판매가 시작된다.
내일 아침부터는, 미국 전역에 분포된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판매가 시작될 예정이었고 말이다.
중요하다.
계약금과 별도로, 이번 시즌 제품들이 기록한 매출의 일부를 ‘로열티(Royalty)’ 형식으로 지급받게 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두 사람이 본사 건물 2층에 자리한 널찍한 사무실의 문 앞에 다다르던 찰나.
알렉산더가 문고리를 손에 꽉 쥔 채,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리,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야.”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알렉산더가 재차 한마디를 덧붙였다.
“돈 벌 시간.”
끼이익-.
문이 열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혹시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착각이 일었다.
괜한 기대감 탓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와중에, 문득 아까 승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먹고 싶은 것이 없냐는 물음에, 승희는 삼시 세끼를 모두 치킨으로 먹고 싶다고 답했었다.
기도해라, 승희야.
매 끼니 치킨을 먹여주는 게 끝이 아니라, 치킨집을 종류별로 잔뜩 차려줄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