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05)
블랙 라벨-104화(105/299)
블랙 라벨 104화
105. 그 자리는 내 거야
꽤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번 F.I.T 대항전과 관련된 설명들이 연달아 이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대항전 준비는 이번 ‘여름방학’부터 시작하게 될 걸세. 다큐멘터리 촬영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야.”
이내 재승이 낮은 목소리로 “이런….” 하고 중얼댔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방학에 한국에 다녀와야겠다는 결정은, 일단 보류해 둬야 할 성 싶었던 탓이었다.
“그때부터는 6㎜ 카메라가 자네들의 24시간 내내 따라다닐 예정이야. 그러니 도식 드로잉, 디자인, 제봉을 비롯한 이번 대항전과 관련된 활동은 모두 파슨스 내부에서 진행해야 하네.”
하루 종일 카메라가 따라다닌다면 신경이 쓰이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려운 일은 또 아닌 듯했다.
파슨스가 소속된 ‘뉴 스쿨’은 맨해튼 일대에 수십 개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강의실 내지는 기숙사 용도로 쓰이는 건물 외에도, 자유롭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 및 전시 공간, 또 ‘메이킹 센터(Making Center)’라 불리는 공방들에 이르기까지….
파슨스의 재학생들이라면 모두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개방 공간들이다.
물론 설비 역시, 부족함 없이 잘 갖춰져 있는 상태이고 말이다.
고개를 주억거려가며 에딘 토마스 교수의 설명을 경청하던 재승이, 이내 제 손을 살짝 들어 올려 보이며 되물었다.
“교수님, 그럼 저희가 현역 디자이너들의 ‘피드백(Feedback)’을 받게 되는 시점은 언제인가요?”
이내 에딘 토마스 교수가 제 안경을 안경닦이로 문질러 닦으며, 아주 “좋은 질문이야” 하고 말해 보인 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 알고 있듯, 대항전은 ‘개인전’ 형식으로 진행되네.”
대항전 당일 현장에서 투표가 진행되고, 투표 결과에 따라 순위를 매기게 된다.
당연히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참가자가 1위가 되며, 어느 학교 소속의 참가자가 1위를 거머쥐었는지가 대항전의 승·패 여부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자네들에게 각 한 명씩, 현역 디자이너가 붙을 거야. 제품 컨셉, 패브릭 및 텍스처 선정, 샘플 가봉 및 제봉, 또 쇼장 디스플레이 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현역 디자이너와 협업 형식으로 진행하게 될 걸세.”
고개를 두리번거려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다들 기쁜 마음을 좀처럼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기야, 기쁠 것이다. 동경하던 이들과의 공동 작업을 추진해 볼 기회다.
취업 및 브랜드 런칭에 엄청난 도움이 될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반면, 재승은 마냥 기뻐하고 있는 재학생들과 달리 걱정이 더 앞서는 듯했다.
‘어떤 현역과 팀을 이루게 되는지도, 꽤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겠는데?’
물론 모두의 시간이 금이라지만, 현역 디자이너들의 시간은 진짜배기 ‘순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이 가뜩이나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가며, 이번 대항전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번 대항전이 두 학교의 ‘역사’를 건 싸움으로 변형되며, 졸업생들 역시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리란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만약 독선적인 성향의 현역 디자이너와 한 팀을 이루게 된다면?
사소한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번번이 ‘대립’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재승이 그렇게 한창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찰나, 에딘 토마스 교수가 제 손목시게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 이번 대항전 일정과 관련된 내용은, 여름방학 이전에 다시 한번 통보를 해주도록 하지. 자, 그럼 오늘은 다들 이만 돌아가 봐도 좋네.”
이내 이번 대항전에 참여하게 된 학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고는, 회의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재승이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던 교본을 챙겨 들기 시작하던 찰나.
“자네는 잠깐 앉게.”
“네, 교수님.”
에딘 토마스 교수가 다시금 입을 뗀 것은, 재승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회의실 밖으로 나선 뒤의 일이었다.
“곳곳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더군. 몇 달 만에 몸값이 잔뜩 격상한 소감이 어떤가?”
“글쎄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브랜드 알렉산더 킹의 본사 측에서, 머지않아 수령하게 될 로열티(Royalty)의 액수에 대해 보고해 주는 중이다.
지금까지 쌓인 로열티만 하더라도, 외부자금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한국에 오프라인 매장 몇 군데를 동시 오픈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고 말이다.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쇼였어. 특히 쇼 후반부의 ‘알렉산더 스트릿(Alexander Street)’ 퍼포먼스가 정말 인상적이더군. 자네의 쇼가 끝나던 때, 쇼에 참관한 교수진 전원이 이번 대항전에서 만큼은 우리 파슨스가 승리하게 될 것이란 확신을 얻을 지경이었으니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하핫, 과찬? 아니. 정말 흠잡을 데 하나 없는, 훌륭한 쇼였네. 제품도 완벽했고, 쇼장의 디피, 퍼포먼스까지 말이야. 눈 높은 평론가들도 입이 닳도록 자네의 쇼를 칭찬하고 있는 게, 그 증거이지 않겠나?”
재승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여 대자, 에딘 토마스 교수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 이번 쇼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칭찬도 많이 듣다 보면 물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다름 아니라, 자네 아까 ‘크리스찬 디옴(Chrischan Diom)’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었지?”
“아, 네. 그랬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잠깐 남으라고 했던 걸세. 많고 많은 프리미엄 브랜드 중, 크리스찬 디옴을 선택한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말이야.”
이내 재승이 한차례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고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창립자인 디옴이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의 의지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만 느껴지더군요.”
“그래, 그건 정말 낭만적인 일이지.”
심지어 디옴의 직원들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매일 퇴근하기 적전마다 허공에 “무슈 디옴,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요”라고 인사를 하곤 한다.
직원 모두가, 세상을 떠난 무슈 디옴이 ‘유령’이 되어 본사 건물을 떠돌며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대부분의 직원들이 스스로를, ‘디옴의 아이(Diom’s Child)‘라고 칭하곤 한다.
디옴의 재단실이 그들의 첫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디옴에서 일하며 성장했고, 또 디옴에서 일하던 중 가정을 꾸렸다.
또 디옴에서 번 돈으로 생활을 이어나갔으며, 디옴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명장’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들 모두가 스스로가 디옴에 소속되어 있단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디옴이란 브랜드를 제 삶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찬 디옴.
무려 반세기 전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인 만큼, 그와 관련된 자료는 모두 흑백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여전히 재승의 가슴을 두근거리게끔 만든다.
“사실 솔직한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크리스찬 디옴이 제 ‘롤 모델’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유는?”
“세상을 떠나서도, 자신의 브랜드를 훌륭하게 이끌어 가고 있는 디자이너는 그가 유일하니까요.”
말을 마친 재승이, “사실 ‘오뜨 꾸뛰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욕심 역시 다분하고요” 하고 덧붙여 말했다.
이내 몇 번 연달아 고개를 끄덕여 보인 에딘 토마스 교수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그래, 자네의 오뜨 꾸뛰르는 어떤 느낌일지 정말 궁금하군.”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자네의 디옴행 말인데, 이젠 더 이상 멀리 있는 꿈이 아니야.”
“예…?”
“현재 디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네, 그와는 개인적으로도 알고 지내는 사이라서요.”
재승은 단연 그의 이름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개인 연락처’까지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존 갈리아도(Jone Galiado)’.
파슨스의 입학하기 전, 파리 포그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었다.
애슐린과의 인연은 물론, 알렉산더의 인연 역시 그곳에서 시작되었고 말이다.
프랑스에서 머무르던 그때 디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존 갈리아도’와도, 하루 밤새도록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다.
“그래?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프랑스에 있던 때, 알렉산더의 소개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흠, 그랬군.”
사실 단순한 소개로 인해 맺어진 인연은 아니었다.
알렉산더의 부탁으로 인해 크리스찬 디옴의 이미테이션 제품을 만들었고, 자신의 이미테이션 제품을 본 존 갈리아도가 먼저 만남을 요구했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내막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니, 짤막하게 축약하여 말한 것뿐.
“어쨌든, 정말 유감이야. 얼마 전 존 갈리아도가, 인종 차별 발언으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었네.”
“그럼 설마…?”
“그래. 결국 디옴의 이사회 측은, 그를 해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더군.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고, 업계 일부에만 은밀하게 퍼져 있는 비밀스러운 소식일세.”
“아…?”
“그 말인 즉, 현재 크리스찬 디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가 공석이란 뜻이겠지? 어쨌든, 소문이 파다해. 디옴의 이사회가 현재, ‘차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문이 말이야.”
그런 디옴의 브랜드 이사회가, 이번 F.I.T 대항전에 참관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
이번 대항전 역시, 그들이 차기 크리에이티브를 발굴하기 위해 둘러보게 될 여러 장소들 중 한 곳으로 당첨된 듯 보였다.
만약 자신이 그들의 정서와 가치관에 부합하는 옷을 선보인다면, 디옴의 차기 디렉터로 발탁될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답해 보인 재승이, 한차례 상념에 젖어들었다. 전생에서부터 목표로 했던 곳이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할 수 있는, 은근한 기회가 찾아왔다.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최대한 영리하게 기틀을 다져 나가야 한다. 단순히 좋은 옷을 만들어서, 1등을 거머쥐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디옴’이란 브랜드의 마음을 훔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에딘 토마스 교수와의 면담을 마친 뒤, 약속했던 대로 ‘알렉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알렉스가 선택한 식사 장소는, 다름 아닌 파슨스 디자인 스쿨 기숙사 건물 내에 자리한 기숙사 식당이었다.
본래 음식이 훌륭한 것으로 소문이 난지라, 기숙사에 기거하지 않는 학생들도 종종 이용하곤 하는 곳이라지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덕에 삼시 세 끼를 모두 이곳에서 해결하는 중일 알렉스가, 기숙사 식당을 고른 것은 의외였다. 아마 자신을 배려해 준 것이리라.
말을 튼 지 고작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라지만, 이제 꽤나 친해진 것일까? 두 사람은 식사를 하는 내내, 이런저런 대화를 자연스레 주고받았다.
이윽고.
“알렉스,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재승이 나직이 꺼낸 말에, 알렉스가 냅킨으로 제 입가를 문질러 닦아대며 답했다.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음, 그래도 리와 함께 기숙사 식당에 오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네요….”
말을 마친 알렉스가, 주변을 한 번 살피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첨언했다.
“이런 뜨거운 시선은, 영 익숙치가 않아서요.”
두 사람이 기숙사 식당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장내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졌던 탓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재승이 디자인한 알렉산더 킹의 이번 시즌 신제품 의류를 입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재승이 한차례 “미안해요” 하고 말해 보이자, 알렉스가 거세게 손사래를 쳐 보이며 답했다.
“아뇨, 리가 사과할 일은 아니죠. 뭐,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어쨌든, 덕분에 정말 잘 먹었어요.”
“그래요, 알렉스. 그럼 내일 또 봬요.”
그 말을 끝으로 재승이 곧장 기숙사 건물을 나섰다. 급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알렉스와 함께 찍은 사진을 송 이사에게 보내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 이사님, 저 친구 많습니다. ]우선 맨해튼에 자리한 개인 작업실로 향할 요량이었다.
오늘 회의실에서 함께 설명을 들었던 참가 학생들 중 태반이, 이미 준비를 시작했을 게 분명했다.
다큐멘터리 촬영 및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는 것은 여름부터라지만, 참가자들 중 그 누구도 여름부터 준비를 시작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후우-.”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지하철역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우승은 절대 빼앗길 수 없다.
파슨스와 F.I.T의 재학생 수준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자신은 뉴욕 패션계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현역이 아니던가?
우승 미만의 성적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또 이번 기회에, 무조건 디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격을 얻고야 말 것이다.
무슈 디옴의 의지를 맛보는 것은 물론, 브랜드의 분위기를 엿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옴의 주력 분야인, ‘*오뜨 꾸뛰르(*연회 및 시상식용 드레스를 비롯한 고급 여성복)’에 도전해야 한다.
가방을 비롯한 여타 의류 제품들과 달리 카피해 본 적조차 없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으레 그렇다.
옅은 두려움과 함께, 은근한 기대, 미묘한 떨림이 수반된다.
한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오뜨 꾸뛰르 디자인이 떠오르는 듯했으니 말이다.
확신한다.
이번 대항전은 좋은 기회임과 동시에, 훌륭한 무대가 되어줄 것이다.
‘리(Lee)’의 오뜨 꾸뛰르가 무엇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무대 말이다.
디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는, 내 것이다.
무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