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08)
블랙 라벨-107화(108/299)
블랙 라벨 107화
108. Lee X Mark Jacob
“…잘 먹겠습니다.”
작게 중얼거려 보인 재승이, 손에 쥔 필리 치즈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여럿이서 함께 작업을 할 때라면 모를까, 혼자 작업에 임할 때는 지금처럼 간단히 허기만 달래기 일쑤였다.
오늘의 저녁 메뉴로 발탁된 음식은, 메이킹 센터 인근 노점에서 구입한, 5달러짜리 샌드위치.
이내 재승이 입안 가득 머금은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어대며, 벽면에 거치 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점심 무렵에 시작된 촬영이, 자정이 다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항전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한두 달 남짓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다른 대항전 참가자들과 다르게, 혼자 대항전 준비를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 아니던가?
덕분에 재승은 강행군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재승을 24시간 내내 따라다니며 밀착 취재해야 하는 CNN STYLE 측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승이 다시금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려던 찰나.
끼이이익-.
돌연 메이킹 센터의 출입문이 열림과 동시에,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철가루가 자석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고 빠르게 문가로 향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토미 역시 마찬가지.
토미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막 메이킹 센터 안에 발을 들인 의문의 손님의 정체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어라…?”
한차례 낮게 중얼대 보인 토미가,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애꿎은 제 두 눈을 벅벅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다른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 다들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작은 소리로 연신 수군대고 있을 뿐이었다.
마크 제이콥.
갑작스레 메이킹 센터에 방문한 의문의 손님은, 다름 아닌 마크 제이콥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득할 수 없던 그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메이킹 센터에 돌아온 것이다.
넋을 놓은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 스태프들과 달리, 재승은 마냥 태연하게 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녁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마크 제이콥이 짤막하게 답해 보이기 무섭게, 재승이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던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샌드위치라도 한 개 드실래요?”
“좋지.”
“아침에 먹으려고 사둔 여분이에요.”
“그럼 아침은 내가 사야겠군.”
일전의 대립이 무색해질 정도로, 일상적인 대화였다. 이내 마크 제이콥이, 건네받은 샌드위치의 포장 비닐을 벗겨내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디자인한 오뜨 꾸뛰르 의상들의 도식을 보고 왔다.”
재승은 ‘에딘 토마스’ 교수가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완성 단계에 이르지도 못한 자신의 도식 파일을 가지고 있는 것은, 며칠 전 파일을 넘겨달라고 요청했던 에딘 토마스 교수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어땠어요? 괜찮던가요?”
“만약 별로였더라면, 다시 찾아오지 않았겠지.”
“음, 다행히 마크의 발걸음을 돌릴 정도는 됐나 보네요.”
“그래….”
나직이 답해 보인 마크가, 곧장 고개를 돌려서는 재승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끝내주더군.”
“예?”
“사과를 하려고 왔다.”
“샌드위치부터 먹는 게 어떨까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더 식기 전에” 하고 나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는 곧장 제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마크 제이콥 역시 마찬가지. 잠시간 그런 재승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건네받은 샌드위치를 먹는 데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니,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면 어떤 말로 사과의 뜻을 전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샌드위치를 다 먹어 치운 마크 제이콥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냅킨으로 제 입가를 닦아내며 물음을 건넸다.
“리, 혹시 내가 다시 올 거라고 예상했나?”
“아뇨.”
“그렇군. 반응이 꽤 덤덤해서 말이야.”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를 잠시. 마크 제이콥이 “큼, 흠….” 하고 헛기침을 몇 번 해보인 뒤,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대로 사과를 하려 왔다.”
“그렇군요.”
“미안하군.”
말을 마친 마크 제이콥이 괜히 제 콧잔등을 살살 문질러 가며, 덤덤한 투로 덧붙여 말했다.
“단언컨대,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들 중 하나야.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나’와, ‘너’ 같은 부류에겐 더욱 괴롭게만 느껴지는 일이지.”
“그런데요?”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은, 스스로가 틀렸음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든, 속으로든, 그 어떤 합리화도 하지 않고 나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일 말이야.”
한차례 숨을 걸러 보인 마크 제이콥이, 어깨를 들썩거려 보이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렵지만, 훨씬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남아 있지. 내 독선으로 인해 고민했을 상대에게 사과를 전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
이내 마크 제이콥이, 재승에게 한쪽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도식 한 장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반대했던 건, 명백한 내 실수고 잘못이었다.”
자신의 도식이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고 한들, 새파랗게 어린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사과하는 일은 더없이 어려운 일이었을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마크 제이콥처럼, 명성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디자이너라면 더더욱.
만약 다른 디자이너였더라면, 자존심을 굽혀가며 사과의 뜻을 전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내 재승이 마크의 손을 꽉 붙잡으며, 나직이 답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땐 저도 죄송했어요. 저도 많이 흥분했던 상태였거든요.”
말을 마친 재승이 제 눈썹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장난기 서린 투로 되물었다.
“마크, 다시 돌아오신 것 맞죠?”
“당연하지.”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그래도 모든 결정권은 제게 있는 겁니다.”
“제기랄, 맘대로 한 번 해보라고.”
그제야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한차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예 와해되었던, ‘리 & 마크’ 팀이 재결합하게 된 영광스러운 순간의 일이었다.
* * *
“마크, 그런데 마음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뭔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토미가 6㎜ 카메라를 어깨에 들쳐 맨 채로 건넨 물음에, 마크 제이콥이 인상을 팍 찡그려 보이며 다분히 신경질적인 어투로 되받아쳤다.
“그딴 식상하고 쓰레기 같은 질문 말고, 조금 더 실용적인 질문을 해볼 생각은 없는 겁니까?”
“짤막하게나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분명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거라고요.”
이내 마크 제이콥이 제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네모반듯하게 접힌 A4용지 몇 장을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이런, 제기랄. 리가 그린 ‘오뜨 꾸뛰르’ 도식들 때문이었다니까요? 제가 리에게 사과하던 날, 당신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하지만 상황이 뭔가 애매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단순히 리의 디자인이 훌륭했기 때문이란 건가요?”
“디자이너가 훌륭한 디자인을 그려내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발걸음을 돌린 건, 리의 도식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내 토미가 “마크,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조심스레 되물었다.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마크가,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날 제가 봤던 리의 도식은, 미처 마침표를 찍어내지 못한 미완성 상태의 도식이었어요. 새하얀 종이 위로 그어진 선 몇 줄기가, 우아하기 그지없는 드레스의 형태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고요. 재질도, 감촉도, 부자재도, 심지어는 제품의 색상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네, 그런데요?”
“역설적인 말이라지만, 오히려 미완성 상태였기에 더욱 빛이 나는 듯 보였던 것 같군요. 음, 리의 도식은 뭐랄까? 상상을 자극하는 도식이었던 것 같네요. 이를 테면, ‘과연 이 디자인의 주인인 ‘리’는, 이 디자인 위로 어떤 색을 입힐까?’, 혹은 ‘어떤 느낌의 패브릭(Fabric)을 이용하여, 어떤 느낌의 텍스처(Texture)를 구현하고자 계획하고 있을까?’ 등등….”
말을 마친 마크 제이콥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비록 저는 오뜨 꾸뛰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조화’를 맞추는 방법만큼은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조화를 맞추는 데, 일련의 도움이나마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말을 마친 마크 제이콥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니까… 다시 함께 일을 해보고 싶단 생각이요” 하고 덧붙여 말했다.
“그렇군요.”
이내 마크 제이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덤덤한 투로 말을 이었다.
“금 같은 시간을 이딴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데 사용하고 계신 시청자분들 중 일부는, 분명 이쪽 업계를 동경하고 있거나, 혹은 이쪽 업계에 발을 들이고자 하는 열망을 조금이나마 품고 계신 분이리라 생각합니다.”
“음, 아마도 그렇겠죠?”
“저는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았어요. 현재 협업 중인 리가 태어나기 전에 뉴욕 패션계에 발을 들였고, 지금까지 잘 해먹고 있는 중이죠. 심지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생존법’을 자세히 다룬 책도 몇 권 썼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자서전이라는 포장지를 두른 다음, 정말 원 없이 팔아먹기도 했고요” 하고 덧붙였다.
“그런 제가 여러분들께 감히 한 가지 충고를 드리자면… 그 어떤 디자이너든 시대정신에 뒤처지는 순간, 그대로 도태된다는 사실을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의 아집과 고집, 독선을 경계해야 하죠. 제가 리에게 힘겹게 사과를 건넸던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아….”
“리와 저의 대립은 제 독선이 발단이 되어 빚어진 사태였으니까요. 그리고 만약 본인이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는 머저리인 것처럼만 느껴진다면, ‘사과라도 잘하는 머저리’가 되고자 노력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잘못이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한차례 유려하게 말해 보인 마크 제이콥이, 이내 메이킹 센터의 문고리를 손으로 꽉 쥐어 보이며 재차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그가, 메이킹 센터의 문을 열어 재끼며 확신 어린 투로 말했다.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지금,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 리 & 마크 팀이 출품하게 될 옷은 극도로 상업적이면서, 또 예술적일 겁니다.”
“자신 있으신가 보군요.”
“그야 당연하죠. 두 명의 천재가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장점을 끌어모아 만든 옷들이니까요. 대항전이 끝나자마자, ‘리 X 마크 제이콥(Lee X Mark Jacob)’이란 택을 달고 출시하기로 약속까지 해뒀죠. 이번 일정이 모두 끝난 다음, 우리는 분명 큰돈을 벌 수 있을 거고….”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마크 제이콥이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인 채 말했다.
“…리는 디옴으로 가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