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09)
블랙 라벨-108화(109/299)
블랙 라벨 108화
109. 영광을 챙겨 올 시간이야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한차례 와해의 위기를 맞았던 리 & 마크 팀은, 그 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케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선 제품 디자인은 전적으로 재승의 몫이었고, 마크는 재승이 디자인한 오뜨 꾸뛰르 의상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컬러(Color)’, ‘패브릭(Fabric)’, ‘텍스처(Texture)’를 선정하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
리 & 마크 팀이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메이킹 센터 내부로 마크 제이콥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제기랄! 우리가 원하는 건 이런 느낌이 아니라고! 분명 직물을 날염하지 말고, 실올 자체를 날염해 달라고 요청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뇨, 마크. 일단 진정하시고….”
“지금 뭐라고 했나? 진정하라고? 쇼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상황에, 이딴 쓰레기를 원단이랍시고 가져왔는데 진정? 정말 가당치도 않군.”
이내 원단 제작 의뢰 및 운반을 담당하게 된 브랜드 ‘마크 제이콥’ 소속 직원이,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한차례 정중히 사과를 해 보였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선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재승이, 이내 원단을 감싸고 있는 비닐을 뜯고 그 표면을 어루만져 보기 시작했다.
‘흠, 이 정도면 충분히 쓸 만한 것 같은데….’
재승의 눈에는 ‘꽤 괜찮은 수준’의 원단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비록 특출하게 좋은 것까지는 아니라지만, 결점이 딱히 눈에 띄는 원단도 아니었고, 당장 오뜨 꾸뛰르 제작에 사용하기에도 일절 손색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크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듯 보였다.
“딱 하루만 더 주도록 하지. 뉴욕, 파리, 밀라노, 런던, 도쿄. 전부 다 뒤져서라도, 일정내로 원단을 완벽히 제작해 줄 수 있는 업체를 물색하도록.”
“마크, 조금 더 명확히 해주실 필요가 있어요. 깊이를 원하는 겁니까? 아니면, 느낌을 원하는 겁니까?”
“얼간이 같으니라고… 당연히 둘 모두를 원한다. 네가 원단이랍시고 사온 이 쓰레기들을, 다시 한번 똑똑히 봐두라고.”
말을 마친 마크 제이콥이, 손가락으로 재승을, 아니, 재승의 곁에 쌓여 있는 원단을 가리켜 보이며 으르렁대듯 물음을 건넸다.
“네 눈엔 이 쓰레기 천 더미가,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의 예술작품처럼 보이나?”
“아뇨, 그건….”
“좋아, 좋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세히 알려주도록 하지. 일단 이 쓰레기 같은 원단은 도로 들고 간 다음,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마크, 하지만….”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담당 직원이, “이 원단이 얼마짜리 원단인 줄 아시잖아요?” 하고 물으려다가 도로 삼켜냈다.
흥분한 마크 제이콥의 성질을 건드려 봐야,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다 태워 버리고 난 다음에는, 잿더미가 되어 버린 원단의 사진을 내게 보내도록. 그럼 나는 그 사진을 다시, 이딴 쓰레기 같은 원단을 납품한 업체 담당자에게 보내줄 거다.”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담당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Yes, Sir.” 하고 답해 보였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제대로 제작해 낼 수 있는 업체를 물색한다. 얼마를 써도 좋아. 웃돈을 줘도, 아니, 두 배, 세 배를 지불하더라도 상관없다. ‘리’가 원하는 대로, 스털링 루비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최고 퀄리티의 원단을 제작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내 재승이 한차례 길게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자신의 무리한 요구가 발단이 된 것처럼 느껴졌던 탓이었다.
얼마 전 재승은 마크 제이콥스와 식사를 하던 도중, 구글링을 하다가 발견한 시각 예술가 ‘스털링 루비’의 회화(繪畫) 작품 몇 점을 보여주며 조심스레 물었었다.
‘마크, 혹시 이 예술작품을 원단 위에 고스란히 프린팅시켜 낼 수 있을까요?’
불현듯 떠올라 건넸던 물음이었을 뿐이었다.
한데, 덕분에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그다음 날, 마크 제이콥은 곧장 프랑스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당시, 스털링 루비의 회화 작품이 프랑스에서 전시 중이었던 탓이었다.
그는 모니터 화면이 아닌, 제 두 눈으로 직접 스털링 루비의 회화 작품을 확인한 뒤에야 확답을 주었다.
‘비록 힘들겠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업일 것 같군. 리의 뜻대로 한 번 진행해 보자고.’
단연 재승뿐 아니라, 마크 제이콥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태도로 이번 대항전 준비에 임하고 있음을 면밀히 확인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때, 마크 제이콥이 재승의 어깨 위에 팔을 둘러보이며 나긋한 투로 말을 이었다.
“리,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든 리의 급에 맞는, 그리고 리의 오뜨 꾸뛰르를 구매할 고객들의 급에 맞는 원단을 공수해 줄 테니 말이야.”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해 대항전 준비에 임하는 모습들은, CNN STYLE 측 카메라에 모두 낱낱이 담기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토미가, 어느새 입안 가득 고여 버린 침을 한 번 삼켜냈다.
꿀꺽-.
눈을 빛내가며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토미는, 이번 대항전 시작에 앞서 상영하게 될 인트로(Intro) 영상에 지금 이 장면을 꼭 넣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 * *
D–14.
그 뒤로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이제 대항전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주 남짓한 시간뿐.
그사이, ‘리 & 마크’ 팀은 벌써 열 점가량의 오뜨 꾸뛰르 의상 제작을 마칠 수 있었다.
모든 의복을 통틀어, 최고 난이도에 이르는 것이 바로 오뜨 꾸뛰르 의상의 재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열 점가량이나 완성시킬 수 있던 것은, 재승이 내린 한 가지 결단 덕분이었다.
“카일,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재승이 나직이 건네 보인 말에, 흰색 가운을 차려입은 채 재봉틀 앞에 앉아 있던 ‘카일’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아녜요, 지난 수년간 매일 해왔던 일일 뿐이잖아요?”
이미 한국으로 향했어야 할 카일을,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메이킹 센터로 불러들였다.
카일은 프리미엄 브랜드 아뜰리에 출신답게, 평범한 재단사 몇 명 몫의 업무를 소화해 주었고 말이다.
단연 재승과 마크 제이콥뿐 아니라, 메이킹 센터 내에 상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CNN STYLE 측 스태프들까지 카일의 제봉 실력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또 카일은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한결같은 답을 내놓았다.
‘제 실력은, 리의 실력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다들 리의 재봉 실력을 보지 못하셔서 그래요.’
덕분에 재승의 제봉 실력에 관한 호기심은, 나날이 높아져만 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들 재승이 디자인 관련 업무를 모두 마치고, 제봉 업무에 착수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 * *
D–9.
다시금 며칠이란 시간이 더 흘렀고, 그사이 이번 대항전이 진행될 장소가 정해졌다.
본래는 해마다 번갈아 가며, 각 학교의 건물해서 진행되는 것이 관례이다.
쉽게 말하자면, 전년도 대항전은 파슨스 건물에서 진행됐으니 올해에는 F.I.T 건물에서 진행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에는 훨씬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했던 탓일까? 올해 대항전은 세계 4대 패션위크 중 하나인 ‘뉴욕 패션위크’의 쇼장, ‘HQ 센터’에서 진행되리란 내용이 발표되었다.
양측 학부의 과감한 결정은 단연 이뿐만이 아니었다.
두 학교간의 대항전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티켓을 판매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 것이다.
“뭐, 티켓값이라고 해봐야 애들 용돈 수준이잖아? 그냥 대관료나 때울 목적이겠지.”
“흠, 그렇군요.”
“어쨌든, 대항전 역사상 최고 규모의 쇼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진 것 같군.”
이내 재승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고는, 제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마크, 오늘 네 시부터 모델 오디션 맞죠?”
“응. 맞아.”
짤막하게 답해 보인 마크 제이콥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려 보임과 동시에 물음을 건넸다.
“리, 그나저나 갑자기 웬 안경이야?”
“뭐, 그냥….”
재승이 대강 얼버무려 보이자, 마크 제이콥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안경도 꽤 잘 어울리는군.”
“고마워요.”
지금 재승이 착용하고 있는 안경테의 옆면에는, ‘월 플라워(Wall Flower)’라는 글귀가 정갈하게 각인되어 있는 상태였다.
* * *
D-2.
리 & 마크 팀은 대항전을 딱 이틀 남겨놓은 시점이 되어서야, 이번 대항전에서 선보이게 될 모든 오뜨 꾸뛰르 의상 제작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재승이 가세한 덕분이었다. 만약 재승이 가세하지 않았더라면, 당일이 되어서도 모든 제품을 완성시키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재승의 오뜨 꾸뛰르 의상 제봉 과정을 지켜본 모든 이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기적인 재능이로군.”
마크 제이콥이 나직이 건네 보인 말에, 재단사 카일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제 의견을 늘어놓았다.
“평범한 재능은 타인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죠.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겠다는 그런 동기부여 말이에요.”
“그런데?”
“리(Lee)의 재능은 그 이상이에요. 타인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선사해 주는 압도적인 재능이죠. 이따금씩 ‘나는 아무리 저렇게 노력해도, 저렇게 될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니까요.”
두 사람이 현재 나누고 있는 진심 어린 대화 역시, 토미의 6㎜카메라에 오롯이 담기고 있는 중이었다.
이쯤 되니 지난 준비 기간 동안 리 & 마크 팀과 동고동락했던 리포터 ‘토미’는, 이번 대항전 다큐멘터리의 성공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항전 관련 다큐멘터리야말로 여태껏 CNN STYLE사가 방영했던 패션 다큐멘터리 중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 * *
D–Day.
대항전 당일 아침이 밝았다.
쇼의 시작까지 아직 두 시간이나 남겨두고 있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항전의 쇼장으로 선정된 HQ센터 앞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포진해 있었고, 쇼를 참관하기 위해 방문한 셀럽들은 입구 인근에 비치된 포토존(Photozone)을 거친 후에야 HQ센터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윽고.
끼이이익-.
검정색 세단 차량 한 대가, HQ센터 앞 도로에 멈춰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이번 대항전의 규모를 키운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디자이너 ‘리(Lee)’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파트너인 ‘마크 제이콥’과 함께 말이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곳곳에 포진하고 있던 기자들이 연신 바삐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HQ센터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1분 사이, 셀 수 없이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리 & 마크 팀 같은 경우, 초반에 대립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원만히 해결된 건가요?”
“이번 대항전에 참여하게 된 재학생·현역 디자이너 팀들 중 유일하게 오뜨 꾸뛰르 의상을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째서 오뜨 꾸뛰르를 준비한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리 & 마크 팀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고 있습니다. 두 분께서도, 본인들이 우승을 거머쥐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이런저런 질문이 연신 쇄도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HQ센터의 정문 앞에 다다르던 찰나.
마크 제이콥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선 뒤, 나직이 말을 건넸다.
“제발 식상한 질문들 좀 그만해 줬으면 좋겠군요.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은, 쇼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리 & 마크’ 팀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항전의 우승 따위가 아닙니다.”
이내 잠시 멎어들었던 셔터 소리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다시금 곳곳에서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나, 마크 제이콥은 한없이 거만한 표정을 한 채 제 할 말을 꿋꿋이 이어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리 & 마크 팀의 대항전 우승은 당연한 수순이자,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 팀의 궁극적인 목표는, 근대 오뜨 꾸뛰르 역사에 ‘파슨스’라는 이름과 더불어 ‘두 천재’의 이름을 끼워넣는 겁니다.”
말을 마친 그가, “그럼 이만” 하고 짤막하게 말해 보인 뒤 HQ센터를 향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자신감 가득한 태도 탓일까? 급기야 곳곳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이내 재승이 마크 제이콥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나직이 말을 건넸다.
“마크, 오래 기다렸어요. 이제야 드디어….”
말끝을 흐려 보이기를 잠시.
“모든 영광을 우리 몫으로 챙겨 올 시간이네요.”
“동감하는 바야.”
이내 두 사람이 HQ센터 내부에 발을 들였다.
그런 두 사람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고 당당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본래 ‘평가’란 것이 으레 그렇지 않던가?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겐 고역이나 마찬가지라지만, 확실히 준비된 자에게는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가슴 설레는 일일 뿐이다.
이들 두 사람은 한없이 기분 좋은 떨림을 만끽한 채,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