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12)
블랙 라벨-111화(112/299)
블랙 라벨 111화
112.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날이 바짝 선 날카로운 목소리로 재차 덧붙여 말했다.
“빨리 움직이게. 승냥이 떼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내 아르도 회장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던 중년 임원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답해 보인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선 쇼장 바깥으로 나선 뒤, LVMH 그룹 측에 연락을 취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아르도 회장의 결정이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던 터라 한 번쯤은 ‘진심일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으나, 중년 임원은 단 한 번의 반문조차 없이 곧장 회장의 지시를 실천으로 옮길 따름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덕에, 아르도 회장의 성미에 대해 꽤나 낱낱이 알고 있던 덕이었다.
철회할 말이었다면, 애초에 절대 뱉지 않는 게 아르도 회장이란 사람이다.
만약 쓸데없는 반문을 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1초라도 더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회장의 총애를 살 수 있는 효율적인 선택이리라.
그룹 임원이 쇼장 바깥을 향해 황급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지금도, 아르도 회장은 여전히 런웨이 무대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런웨이 무대 위를 거닐고 있는 모델의 눈빛은 농염하기 그지없었다.
또 그런 그녀의 걸음걸이는 ‘현재’야말로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시기임을 알고 있다는 듯 당당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훤히 드러나 있는 앙상한 쇄골은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지경이었고, 둥근 곡선을 그려 보이고 있는 어깨선은 가히 뇌쇄적이라 말하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었다.
아르도 회장이 그런 모델을 보며 느끼게 된 감정은, 다름 아닌 ‘시기’와 ‘질투’였다.
일순간, 아르도 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젊음을 바친 대가로, 410억 달러가 넘는 순자산을 축척할 수 있었다.
심지어 지난 2012년에는, 포브스 사에서 집계한 ‘유럽 최고의 부자 순위’ 4위로 꼽히기까지 했던 그였다.
한데, 왜일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마냥 보잘것없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젊음이다.
런웨이 위를 당당히 거닐고 있는 모델이 지니고 있는 싱그러운 젊음에 비하면, 또 그런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에 비하면…자신이 지니고 있는 막대한 부(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만 느껴질 지경이었던 것이다.
“후우-.”
한차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차게 뛰기 시작한 가슴이,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던 탓이었다.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조잡한 감정들이, 마냥 곤혹스럽게만 여겨졌다.
70대의 초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와중에, 젊은 모델의 아름다움 탓에.
그것도 심지어 여성 모델의 아름다움 탓에, 질투와 시기심을 품게 되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이내 정신을 다잡고자 제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꾹’ 몇 번 눌러대던 아도르 회장이 한차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런 감정들이야….’
오뜨 꾸뛰르 의상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아내야 하는 감정이 바로 이런 감정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이, 리(Lee)라는 젊은 디자이너를 LVMH 그룹으로 영입하고자 마음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질투와 시기,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과, 가장 싱그럽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덧없기 그지없는 욕망에 이르기까지….
오뜨 꾸뛰르 의상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이층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40대 이상의 고객들이다.
물론 한 벌에 최소 수백만 원, 평균적으로 수천만 원 선을 이루고 있는 가격대도 한몫을 거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젊은 소비자들은, 오뜨 꾸뛰르 의상 한 벌에 수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하지 않아도 얼마든 아름다움을 표출할 수 있다.
한층 낮은 가격대의 프리미엄 브랜드 의류만으로도, 심지어는 노브랜드(Nobrand)의 의류만으로도 얼마든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늦은 밤, 나이 든 여자를 잠 못 이루게끔 만드는 것은 관절염 따위가 아니다.
미처 따라 늙지 못한 마음이다. 시대가 변하고, 트렌드는 바뀌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리의 오뜨 꾸뛰르는,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대듯 말을 이었다.
“그래. 크리스찬 디옴의 마에스트로를 꿈꾸려거든, 이 정도는 보여줘야지….”
이내 첫 번째 모델이 런웨이 워킹을 마치고, 백 스테이지(Back Stage)로 모습을 감췄다.
한데, 우습게도 아르도 회장은 첫 번째 모델이 차려입고 있던 드레스의 디테일은 전혀 살펴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유는?
모델의 아름다움이 디자인을 잡아먹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내 아르도 회장이 제 고개를 한 번 가로저어 보였다.
아니다. 그 때문이 아니다.
그저 리의 오뜨 꾸뛰르가, 젊은 디자이너의 오뜨 꾸뛰르답지 않게 지극히 절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디자이너는 영리하게도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기교를 삽입하는 대신, ‘절제미’(節制美)를 담아냈다.
드레스는 딱 모델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킬 수 있을 정도로만 화려했고, 덕분에 모델의 신체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일말의 이질감조차 없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아름다움에 홀려 욕심을 품게 되었다.
본래 욕심이란 게 그렇다.
욕심만큼, 사람의 시야를 좁아지게끔 만드는 것이 또 없다.
그것이 드레스의 세부적인 디테일을 확인하지 못한 이유이리라.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다.
아르도 회장은 확신했다. 리의 오뜨 꾸뛰르는 날개 돋친 것처럼 팔려 나갈 것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왜 리의 오뜨 꾸뛰르를 갖고 싶어 하고 있는지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거금을 들여 리의 옷을 사들이게 될 것이다.
리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건드릴 줄 아는 디자이너다.
의도에 의한 것인지, 감각에 의한 것인지는 모른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큰 상관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원초적 욕구를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일 테니까.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리의 쇼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던 에딘 토마스 교수가 저도 모르게 짤막한 침음을 뱉어내 보였다.
“아….”
마크 제이콥과, 리의 만남이 일궈낼 파급효과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그였다.
한데, 설마 이 정도로 견고한 예술 작품이 탄생하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본래 오뜨 꾸뛰르라는 분야가, 의복의 본질을 넘어선 극도의 ‘미’(美)를 추구하고자 탄생하게 된 장르이지 않던가?
그 어떤 디자이너든 오뜨 꾸뛰르 의상을 디자인할 때만큼은, 절대 효율이나 가성비 따위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하면, 더욱 뛰어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할 뿐.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드레스가 ‘결과’다.
두 명의 천재가 머리를 맞댄 채, 오직 더 나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고민하여 일궈낼 수 있었던 결과. 정신이 절로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설치 예술가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의 작품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만 같은 화려한 색감의 원단과, 그 원단을 이용해 제작해 낸 드레스의 실루엣.
수천 개의 재봉선 중, 아무런 의미 없이 낭비된 재봉선은 단 한 개도 엿보이지 않았다.
꽉 조여진 허리 라인은 그녀들의 허리가 더욱 잘록해 보이게끔 만들어주었으며, 한껏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어깨라인은 그녀들을 더욱 가녀려 보이게끔 만들어주었다.
‘하이 웨스트(High Waist)’ 기법을 차용한 덕에 그녀들의 가슴은 더욱 풍만해 보였으며, 드레스 제작에 사용된 원단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색감은 그녀들을 더욱 빛나게끔 만들어주었다.
‘뉴룩(New Look)’.
살아생전의 크리스찬 디옴이 1947년에 불러일으켰던, 센세이션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단어.
이젠 역사로 기록되어 버린 크리스찬 디옴의 뉴룩을, 2013년의 형태로 완벽히 재해석해 낸 듯 보일 따름이었다.
그때 에딘 토마스 교수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크리스토퍼 조 교수가 나직이 중얼댔다.
“디옴의 재림을 보는 것만 같군.”
“동감하는 바야.”
“정말 세련된 답습이야.”
말을 마친 크리스토퍼 조 교수가, 승부는 아예 잊은 채 ‘리 & 마크’ 듀오의 런웨이 무대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에딘 토마스 교수 역시 마찬가지. 극도로 집중한 채, 런웨이를 거닐고 있는 모델들을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마지막 모델의 워킹이 끝나던 순간.
또 황홀한 쇼를 선보인 두 명의 천재 디자이너, 리 & 마크 듀오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런웨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짝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
객석에 자리해 있던 관객들 중 태반이 자리에서 기립한 채,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여성관객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 탓에 터져 나온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소리 죽여 흐느끼기까지 했다.
바람에 흩날리듯 떠나가 버린 자신들의 젊음에 대한 그리움 탓에 새어 나온 눈물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앞으로도 영원히 아름다움을 동경하며 살아가리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 * *
쇼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대항전의 진행을 맡게 된 ‘웨인’이 다시금 런웨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2013 파슨스·F.I.T 대항전의 승패 여부를 결정짓게 될 대망의 7번 시드 경기가 종료되었군요. 자! 그럼, 곧장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내 런웨이 뒤편에 자리한 스크린 위로, 남은 관객 투표 시간을 나타내 주는 ‘타이머’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 0m : 59s ] [ 0m : 58s ] [ 0m : 57s ]타이머 위로 표기된 숫자는 “째깍. 째깍” 하고 들려오는 초침 소리에 맞춰 차츰 줄어들고 있을 따름이었고, 관객들은 다들 진중한 표정을 한 채 손에 쥔 무선 투표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지금.
재승과 마크 제이콥은 런웨이 뒤편에 마련된 백 스테이지에서 투표 결과가 발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곁으로는, 팀 파슨스 소속 출전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이번 대항전에 출전하게 된 재학생 몇몇이 눈을 꼭 감은 채, 연신 “제발, 제발….” 하고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역 디자이너들 역시 마찬가지.
하나같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으나, 날숨 한 번, 몸짓 하나에서 그들이 느끼고 있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내 알렉산더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여 서 있는 F.I.T 측 출전자들을 곁눈질로 살펴본 뒤, 낮은 목소리로 격려의 말을 꺼내 들었다.
“리. 분명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빈말이 아냐. 오늘 대항전을 통틀어 최고였다고.”
팀 파슨스 소속으로 대항전에 출전한 다른 현역 디자이너들 역시 마찬가지.
저마다 한마디씩 재승과, 마크 제이콥이 준비한 오뜨 꾸뛰르 테마의 쇼에 대한 호평을 남겼다.
훌륭한 반응을 이끌어냈던 것은 사실이라지만, 아직 승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내 마크 제이콥이 재승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마크, 왜요?”
재승이 그의 곁에 다가서던 찰나, 마크 제이콥이 돌연 재승을 꽉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리, 내 얘기 잘 들어. 만약 이번 경기에서 우리 듀오가 패배한다더라도, 그건 장르에 의한 패배일 뿐이야. 합리화가 아니야. 진심이다.”
리 & 마크 듀오가 선보인 ‘오뜨 꾸뛰르’ 테마의 쇼는, 절대 대중적인 분야가 아니다.
애초에 이해할 수 있는 대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게 예술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대중이 일련의 예술작품을 보고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아티스트의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 쇼장에 방문한 관객들 중, 리 & 마크 듀오가 오뜨 꾸뛰르 의상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이들의 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반면, 같은 7번 시드에서 맞붙게 된 F.I.T 측의 ‘와타나베 & 켈빈 크라인’ 듀오가 선보인 미니멀리즘 의류는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
대중성과 상업성에 완벽히 초점을 맞춘 채, 미니멀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시각적으로 더욱 쉽게 다가오는 것은, 확실히 그들의 쇼였을 것이다.
충분히 염두에 두었던 사항이라지만, 괜히 속이 쓰리다.
분명 장르의 불리함을 딛고도 어떻게든 승리를 거머쥘 자신이 있었는데, 학수고대하던 평가의 시간이 가까워지니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쾅쿵쾅 빠르게도 뛰어댄다.
아무래도 예측해 볼 수 있는 결과는 딱 두 가지뿐인 듯했다.
우선 첫 번째는 패배. 그리고 두 번째는 상당히 아슬아슬한 승리.
이내 한차례 심호흡을 해 보인 재승이, 애써 무던한 척 답했다.
“이기면 좋겠지만, 설령 패배한다더라도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이군.”
“어차피 마크가 어떻게든 디옴으로 보내준다면서요? 그리고 우리 둘 다, 끝내주게 멋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동감” 하고 짤막하게 말해 보인 마크 제이콥이 재차 뒷말을 덧붙였다.
“넌 정말 대단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마크도 정말 수고 많았어요.”
그때, 벽 너머에 자리한 런웨이 무대 쪽에서 진행자 웨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관객 투표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럼 곧장, 대망의 7번 시드 경기 결과를 공개하겠습니다. 마지막 7번 시드의 승리 팀이 밝혀지는 동시에, 대항전에서의 승리를 거머쥐게 될 학교가 함께 공개되겠군요.”
유려하게 말해 보인 웨인이, 한차례 숨을 걸러 보이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7번 시드의 승리 팀은….”
귀가 절로 쫑긋 서는 듯했다. 단연 재승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백 스테이지 내부에 자리한 모두가.
아니, 객석을 통틀어 장내에 자리한 모두가 그랬다.
이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