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14)
블랙 라벨-113화(114/299)
블랙 라벨 113화
114. 심시티(Simcity)
며칠 뒤, 한국에 자리한 월 플라워 사무실.
한창 업무에 열중해야 할 시간이었으나, 사무실 내부 분위기는 마냥 들떠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사님, 혹시 깐풍기 시켜도 될까요?”
추지훈이 조심스레 건넨 물음에, 송 이사가 눈을 살짝 흘기며 되물었다.
“뭐, 인마? 이 자식이 진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이내 송 이사가 피식 미소를 흘려 보이고는, 장난기가 가득 서린 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 같은 날 그거 가지고 되겠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다 시켜!”
말을 마친 송 이사가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보인 뒤 “오늘은 내가 다 쏜다-!” 하고 외쳐 보이기 무섭게, 사무실 내에 한차례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오늘, 재승이 출연한 CNN STYLE사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었다.
덕분에 송 이사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은 본방을 사수하고자, 업무는 잠시 뒤로 미뤄놓은 채 사무실 중앙에 비치된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심지어 사전에 사무실 TV의 케이블 업체를 교체하기까지 해야 했다. 기존 케이블 업체의 채널리스트에, CNN STYLE 채널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문한 음식들이 모두 도착했을 무렵, TV위에 시선을 고정해 두고 있던 송 이사가 사뭇 격양된 투로 입을 뗐다.
“어? 이제 시작하나 본데…?”
이내 배달 음식 위로 씌워진 랩을 벗겨내고 있던 디자인 팀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던 찰나.
TV 화면 위로, 한 줄 짤막한 글귀가 나타났다.
[ Dream Come True ]다름 아니라, 이번 CNN STYLE사에서 제작한 2013 파슨스·F.I.T 대항전 다큐멘터리의 제목이었다.
이내 장내에 자리해 있던 모든 직원들이, 한껏 집중한 채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출연진은 무려 스물여덟 명에 육박한다.
파슨스 측에서 열네 명의 재학생과 현역 디자이너가, 또 F.I.T 측에서 열네 명의 재학생과 디자이너가 이번 대항전에 참여했으니 말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재승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거 너무 사장님 위주로 찍은 거 아닌가 싶은데요…?”
이강준이 조심스레 꺼내 보인 말에, 다들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 대기 시작했다.
재승과 마크 제이콥의 분량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확실히 재승이 소속된 ‘리 & 마크’ 듀오의 준비 과정이, 가장 자극적인 내용을 띠고 있기는 했다.
첫 만남과 동시에 대립이 시작되었고, 팀이 와해 직전의 위기에 놓였다.
팀워크를 회복한 뒤에는, 그 어느 팀보다도 훌륭한 협동을 보여주었고 말이다.
준비 과정이 어찌나 드라마틱한 것인지, 한편으로는 ‘혹시 연출된 상황이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 지경이었던 것이다.
대항전이 시작된 이후에는, 다들 훨씬 더 몰입한 채로 다큐멘터리를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각 학교 출신의 현역 디자이너들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인지, 어느 한 팀 수준이 떨어지는 곳이 없었던 탓이었다.
이윽고 리 & 마크 듀오가 준비한 쇼 장면이 재생되던 순간, 모든 직원들이 감탄을 금치 못한 채 쇼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비록 디자인 팀 직원들 중 그 누구도 오뜨 꾸뛰르에 대한 깊은 배경 지식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으나, 대항전이 끝난 뒤 며칠간 곳곳에서 재승의 쇼를 극찬하는 내용의 호평들이 쏟아졌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던 덕이었다.
중간중간, 리 & 마크 듀오가 준비한 쇼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의 반응을 클로즈업시켜서 보여주기도 했다.
낮은 목소리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바이어들과, 충격을 받은 듯 보이는 셀럽들과 디자이너들, 급기야 눈물까지 흘려 보이고 있는 관객들에 이르기까지….
런타임(Runtime)이 장장 120분에 육박하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다름 아닌 시상식 무대였다.
진행자가 팀 파슨스의 승리로 이번 대항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음을 공표했고, 최다 득표를 기록한 ‘리 & 마크’ 듀오가 MVP 트로피와 상패를 거머쥐며 끝이 난 것이다.
그렇게 화면 위로 엔딩 크레딧 영상이 재생되고 있던 찰나,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디자인 팀 직원 남광민이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사장님 말인데, 이제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살고 계신 것 같네요.”
이내 송 이사가 심드렁한 투로 “이 양반아, 그걸 이제 알았어?” 하고 한차례 핀잔을 주듯 되묻자, 남광민이 고개를 몇 번 가로저어 보이고는 답했다.
“아뇨, 그 전부터 알고야 있었죠. 그러니까,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이젠 정말 월드 클래스(World Class) 디자이너들 사이에 껴 있어도, 이질감이 아예 안 드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몇몇 직원들이 남광민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대자, 이내 송 이사가 피식 미소를 흘려 보였다.
송 이사 역시, 직원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위화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재승은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 사무실에서 동고동락하던 사이이지 않았던가? 그랬던 재승이 성공가도를 쾌속으로 내달리는 모습은, 당연히 직원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뜻 살펴보니 직원들의 눈 위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 보였다.
존경과 선망, 부러움을 비롯하여, 약간의 시기와 질투에 이르기까지….
다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둘을 알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다.
이와 같은 재승의 발전 척도는, 분명 모두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내 송 이사가 손뼉을 한 번 쳐 보이고는, ‘그럼 다 봤으니, 일단 일부터 하자’ 하고 말하려던 찰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TV 화면 위로, 쿠키 영상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 리, 잠시만요. 혹시 지금 어디 가시는 길인지, 짤막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리포터의 물음에, 영상 속 반듯한 커스텀 테일러 차림의 재승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 LVMH 그룹의 뉴욕지부 건물로 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서요.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크리스찬 디옴 오뜨 꾸뛰르의 디렉터 직을 맡게 되었거든요.
이내 멍하니 TV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송 이사가, 엷게 떨리는 투로 되물었다.
“쟤, 지금 뭐라는 거냐?”
이윽고. 재승이 카메라 렌즈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확신 가득한 어투로 다시금 덧붙여 말했다.
– Dream Come True, 제 꿈은 늘 현실이 됩니다. 여태껏 쭉 그래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예정이죠.
이내 끈적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뉴욕 월가를 거니는 재승의 뒷모습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본래 쿠키 영상이란, 후속편을 예고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이내 화면 아래로 후속편을 예고하는 짤막한 글귀 한 줄이 송출되었다.
[ ‘Dream Come True 2: Chrischan Diom’s Maestro‘-Co㎜ing Soon. ]다들 넋을 놓은 채 앉아 있던 찰나,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송 이사가 곧장 제 스마트폰을 꺼내 들며 나직이 입을 뗐다.
“…일단 사무실 전화선부터 다 뽑아.”
머지않아 사무실 전화기가 불붙을 기세로 울려댈 게 분명했다.
직원들이 한없이 분주한 손길로 사무실 전화선을 뽑아대고 있던 찰나, 통화 연결음만 들려주고 있던 송 이사의 스마트폰에서 재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보셨어요?
한없이 명랑하기만 한 목소리가.
* * *
– 야, 사장! 너 진짜 이러기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미리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수화기 너머에서 연신 들려오고 있는 송 이사의 우렁찬 목소리 탓에, 재승이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떨어트려 보였다.
“뭐,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그랬던 거죠. 다큐멘터리 방영되고서도 별말씀 없으면, 직접 말씀해 드리려고 했었어요. 그나저나 어떻게 본방으로 챙겨보셨네요?”
– 당연하지, 다른 게 사회생활이야? 이런 게 사회생활이지. 다큐멘터리 보려고 사무실 TV케이블 업체까지 바꿨다니까? 일단 어떻게 된 건지부터 설명 좀 해봐.
이내 재승이 한없이 덤덤한 투로, 이번 계약 건과 관련된 자초지종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쓰잘머리 없는 사족들은 모두 제하고, 계약조건들에 관한 설명들을 명료하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LVMH 그룹과의 계약 체결은, 당연히 크게 다뤄질 수밖에 없는 뗄감이었다.
디옴하우스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아니, 동양인이 지휘권을 잡게 된 기록적인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송 이사의 이목을 잡아끄는 데 성공한 것은, 그런 기록 따위가 아닌 ‘숫자’인 듯 보일 따름이었다.
–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선지급 받은 계약금만 180만 달러라는 거잖아? 그럼 로열티는…?
“계약금이 강력한 대신 로열티는 조금 낮은 편이에요. 딱 0.8%거든요.”
알렉산더 킹 측에서 지급받았던 로열티가 1%였으니, 오히려 0.2%가 줄어든 셈이었다.
하지만 소량생산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오뜨 꾸뛰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오뜨 꾸뛰르 의상이 한 벌에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호가한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 역시 절대 적지 않은 금액임이 분명했고 말이다.
이내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인 송 이사가,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야, 사장. 깜짝 놀라게 하는 것도 좋다만, 이런 일은 미리 말을 해줘야 대비를 해놓든, 마음의 준비를 해두든 할 거 아냐? 일단 지금은 사무실 전화선 전부 다 뽑아뒀는데, 다시 꽂는 순간 분명 난리 날 거라고.
이내 재승이 제 트렁크 백에 여권을 담아 넣으며, 여유롭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직접 처리할 생각이거든요.”
– 직접? 어떻게?
“지금 짐 챙기고 있어요. 한국으로 갈 거예요.”
– ……?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일단 끊고 도착한 다음 다시 전화드릴게요.”
곧장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재승이, 잠시 손가락을 멈칫하며 덧붙여 말했다.
“이번엔 오랜만에 술 한잔해요.”
– 응? 오랜만에?
“아뇨, 아녜요. 일단 끊을게요.”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못다 한 이야기들이라면 한국에서 얼굴을 보며, 또 술잔을 기울이며 하더라도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차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트렁크 백을 챙겨 든 채 맨해튼의 아파트를 나섰다.
이건 계약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기회다.
디옴 하우스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선지급 받은 180만 달러보다 훨씬 더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를 절호의 기회 말이다.
불과 몇 시간 안에 LVMH 그룹 측의 공식 입장이 표명될 것이고, 한국 언론 역시 입이 닳도록 이 건에 대해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이런 무료 마케팅 기회를,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 있겠는가?
우선 한국으로 돌아가, 월 플라워의 이번 S/S시즌 제품 제작에 직접 합류할 요량이었다.
디자인보다, 디자이너의 명성과 커리어를 훨씬 신경 쓰는 곳이 바로 한국이니까.
또,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돈을 마음껏 써볼 생각이기도 했다.
이번에 LVMH 그룹 측으로부터 180만 달러를 지급받았고, 알렉산더 킹의 지난 시즌을 통해 9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도합 270만 달러, 한화로 환산해 보자면 약 30억이 조금 넘는 금액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이 많은 돈을, 다 어디에 쓸 거냐고?
지금 수중에 들린 30억과, 앞으로 끌어모으게 될 투자금을 합쳐 ‘*심시티(*Sim-City: 도시건설게임)’를 한번 해볼 생각이었다.
앞으로 불과 수개월 뒤면, 홍대, 이태원, 명동을 비롯한 대한민국 곳곳의 패션 명소에 월 플라워의 매장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말하면 이루어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