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21)
블랙 라벨-120화(121/299)
블랙 라벨 120화
121. 리셀러들의 수다
이례적이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재승은 곧장 서버 증설 작업을 명령하는 동시에, 임기응변으로 쿠바쿠바 매거진을 비롯한 *웹진(*Webzine: 웹매거진) 측에 룩북 공개를 요청했다.
그렇게 웹진을 통해 공개된 룩북 사진들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그 반응은 상당히 선풍적이었다.
* * *
한편, 콜라보레이션 제품이 공개된 뒤에도 월 플라워 디자인 팀 직원들은 야근을 반복했다.
콜라보레이션 제품과는 별도로, 월 플라워의 S/S제품 역시 선보여야 했던 탓이었다.
이미 몇몇 제품들은 이미 샘플 가봉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고, 재승을 비롯한 직원들이 추가 디자인의 도식을 부지런히 그려내는 중이었다.
“콜록-.”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기침을 해 보인 재승이 한차례 기침을 해 보이자 이강준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음을 건네왔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며칠 새 감기가 더 심해지신 것 같은데, 하루쯤은 푹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요 근래 과로를 밥 먹듯 해왔던 탓일까? 아니면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환절기 날씨 탓일까?
수년 만에 감기에 걸렸다.
며칠이면 떨어져 나갈 것이라 예상했건만, 크나큰 오산인 듯 보였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증세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우선 한차례 손사래를 쳐 보이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휴식이야 시즌 마친 다음에도, 얼마든 취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몸 쓰는 일 하는 것도 아니고, 앉아서 도식 그리는 것뿐인데 감기랑 무슨 상관이겠어요?”
이강준이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재승의 곁을 지켜 서고 있던 찰나.
“다들 식사하세요!”
디자인실 문이 활짝 열리며, 류승호가 양손 가득 치킨 봉투를 손에 쥔 채 모습을 드러냈다.
콜라보레이션 제품 관련 업무는 끝났으나, 스케줄을 마친 뒤면 종종 오늘처럼 먹을거리를 싸들고 사무실에 찾아오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내 다들 협탁 앞에 모여 앉은 채, 저마다 한 조각씩 집어든 치킨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이번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함께하며, 동고동락했던 탓일까? 직원들 역시 류승호와 꽤나 친밀해진 듯 보일 따름이었다.
감기 탓에 식욕이 감퇴한 것인지, 한두 조각을 집어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해진 듯했다.
물티슈로 손을 대충 닦아낸 뒤, 직원들과 류승호 간의 대화를 묵묵히 경청하기를 잠시.
“와, 벌써 다섯 시네요? 오늘 출근하려면, 먹고 나서 슬슬 들어가 봐야겠네요.”
이강준이 제 손에 묻은 기름을 대충 문질러 닦아대며, 건네 보인 말이었다.
이내 추지훈이 벽면에 거치된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답했다.
“저도 강준이 형 들어갈 때, 같이 가봐야겠네요. 사장님은 언제 들어가시려고요?”
“저는 조금 더 하다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하던 건 마무리 짓고 들어가고 싶어서요.”
행여나 직원들이 불편해할까 싶은 마음에, 다시금 몇 마디 말을 추가로 덧붙여주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다 드시고 나면 다들 퇴근하세요. 저는 아침마다 시간 맞춰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한차례 말을 마쳐 보이기 무섭게, 이강준이 제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되물었다.
“말씀만 그렇게 하실 뿐이지, 매일 아침에 시간 맞춰서 출근하고 계시잖아요?”
딱히 꺼내 들 반론의 말이 없어 멍하니 앉아 있던 찰나, 류승호가 자연스레 어깨 위에 팔을 둘러 보이며 설득조로 조심스레 말을 건네왔다.
“재승 씨,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드시고 이만 들어가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며칠 전에 뵀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일을 못 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요. 정말 괜찮아요.”
“에이, 그래도요. 직원 분들도 다 퇴근했는데, 사장님이 혼자 사무실에 남으셔서 일하고 계시면 그림이 영 이상하지 않겠어요?”
잠시간 고민하다가, 덤덤한 투로 답했다.
“아뇨, 사장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이내 류승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쨕 갸웃대며, “네?” 하고 되물었다.
“제 월급이, 직원들 월급에 몇 배인데요? 아무리 못해도 더 가져가는 금액만큼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게 맞지 않겠어요?”
“음, 그것도 일리 있는 말씀이긴 한데….”
“걱정하는 마음에 해주신 말씀인 거 다 알아요. 어쨌든,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 않으셔도 돼요.”
행여나 직원들이 먼저 퇴근하며 눈치를 보거나, 마음 불편해할까 싶은 염려가 들어 꺼내 든 말이었다.
이내 이강준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류승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승호 씨, 장담하는데 사장님 고집은 절대 못 꺾으실걸요?”
그 말에 류승호가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고는,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재승 씨, 그럼 꼭 하시던 작업만 마무리 짓고 얼른 들어가세요. 오늘은 안색이 정말 안 좋아 보이셔서 그래요.”
“네, 알겠어요. 걱정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문득 동대문의 지하 작업실에서, 매일같이 석면 가루를 흡입해 가며 쓸쓸히 죽어가던 전생의 나날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기억의 수면 저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그 암담하기 그지없는 시절의 기억들이 말이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건강에 대해 염려해 주던 것은, 송 이사 한 명이 고작이었다.
한데, 지금은? 고작 감기몸살 하나로도, 이렇게 큰 걱정과 염려를 받는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동이 트려는 듯, 하늘이 미묘한 빛깔을 띠고 있다.
또 한 번의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아침이 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제 “좋은 아침”이란 인사가, 더 이상 평범한 인사말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이제 좋은 아침이란 말은, 명백한 진심이 담긴 말일 뿐이다. 그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아침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침이다.
“읏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다시금 빈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곧장 A4용지 옆에 놓여 있는, ‘월 플라워 연필’을 손에 꽉 쥐었다.
* * *
어둠이 잔뜩 내려앉아, 마냥 어두컴컴하기만 한 좁은 방 안. 모니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이, 앞에 앉은 마른 사내의 얼굴을 여과 없이 비춰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와삭.
사내는 감자 칩을 집어 먹어가며,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차례 손에 묻은 과자 가루를 ‘쪽’ 하고 빨아젖혀 보인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흠, 월 플라워라….”
이경훈.
올해 딱 서른에 접어든 그는, ‘리셀러 X의 헌신’이란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 중인 전문 리셀러였다.
처음에는 ‘리셀러-X’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어렵사리 구매한 리미티드 에디션 제품들을, 온라인 중고장터에서 웃돈을 받고 되파는 식으로 용돈벌이를 했던 게 전부였으나 지금은 그 상황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진 상태였다.
리셀을 통해 번 돈으로 마련한 차를 몰며, 리셀을 통해 번 돈으로 마련한 전셋집에 살고 있다.
차츰 매출이 늘어나고, 인지도가 높아짐에 따라 개인 사이트까지 운영하게 되었고 동년배 직장인들보다 아득히 높은 수익을 기록 중이었던 것이다.
짙은 상념에 젖어든 채, 제 턱을 어루만져 대던 이경훈이 이내 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리셀러들만 발을 들일 수 있는, ‘단톡방’ 형식의 비밀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유명 리셀러들 중 태반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자, 서로의 의견과 정보를 교류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다른 리셀러들은 이번 월 플라워의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 리셀러 X: 다들 이번 ‘월 플라워x류승호’ 콜라보레이션 제품 룩북 확인하셨나요?
이경훈의 채팅이 화면 위에 나타나기 무섭게, 곧장 답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마 다들 컴퓨터 앞에 앉은 채, 월 플라워의 이번 콜라보레이션 제품 룩북을 낱낱이 살펴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 리셀러 마크: 네, 봤는데 저는 그냥 손 떼려고요. 일단 가격이 그렇게 뛸 것 같지도 않고, 재질부터가 너무 불안하네요. 프린트 벗겨지거나 번질 가능성도 있어 보이고,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오염 가능성 농후한 제품을 주 소재로 삼은건지 궁금하네요;;
– 리셀러 마크: 그리고 다들 입수하셨을 정보겠지만… 이번 콜라보레이션 제품에 주력한 거면 또 모를까, S/S시즌 상품들도 별도로 제작했다는 기사 떴잖아요? 제 눈에는 그냥 완전히 돈독 오른 걸로밖에 안 보이네요.
– 리셀러 마크: 이걸로 크리스찬 디옴 건 때문에, 제대로 된 옷을 내놓지는 못 할 거라던 가설이 확실해진 듯. 그냥 딱 겉보기에만 좋은, 그런 옷이네요. ^^;
톡방에 소속되어 있는 리셀러들 중, 상당히 입지가 굳건한 편에 속하는 ‘마크’의 발언이었기 때문일까?
몇몇 리셀러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 리셀러 티모: 헐? 총알 두둑하게 장전해 뒀는데, 마크 님 말씀 들으니 불안해지네요. 저도 손 떼는 게 나을까요?
– 리셀러 리치: 흠; 곧 조던 신상 나온다는 찌라시도 돌고 있긴 하던데, 차라리 그쪽에 올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 리셀러 로이: 아직 몇 년 안 된 신생 브랜드라 불안하긴 했었는데, 마크 님 말씀 들으니 확신이 서네요. 저도 빠져야 할 듯;
갱신되고 있는 채팅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경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이 새끼는, 또 이러네.”
지금 리셀러 마크의 말에 동요하고 있는 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초보들뿐이다.
자신을 비롯하여, 수년 이상 리셀을 본업으로 삼아 왔던 이들은 하나같이 말을 아끼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마크의 채팅이, 경쟁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기 위한 밑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타닥. 타다닥.
이내 이경훈이 다시금 스마트폰 키패드를 부지런히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 리셀러 X: 야, 너는 무슨 단톡방에서까지 작업을 치고 그러냐? 진짜 사람 되려면 멀었네.
– 리셀러 마크: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정말 아예 손 안 댈 생각인데요?
– 리셀러 X: 우리 알고 지낸 지가 10년인데, 내가 네 속을 모르겠냐? 선동은 패션 커뮤니티에서나 하시고요, 총알 얼마나 장전해 두셨는지만 말씀하시죠? ^.^;
메시지를 보내놓은 뒤, 곧장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셀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딱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넉넉한 총알, 두 번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확신에서 비롯되는 인내심,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철저한 준비성.
이제 월 플라워의 콜라보레이션 제품 및 S/S시즌 제품 판매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이틀 남짓한 시간뿐. 미리 만반의 준비를 갖춰둘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트렁크 백 안으로, 필요한 짐을 챙겨 담기 시작했다. 코펠 버너, 컵라면 몇 개, 침낭, 낚시터에서나 쓰일 법한 접이식 의자에 이르기까지.
야영을 위한 준비물을 거의 다 챙겨놓은 뒤, 다시금 스마트폰을 들어 단톡방을 확인해 보았다.
리셀러 마크로부터 답장이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답장을 확인한 이경훈이 한차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리셀러 마크: 들킴. ㅋㅋㅋㅋㅋㅋㅋㅋ
– 리셀러 마크: 큰 걸로 한 장.
– 리셀러 마크: 적금까지 깼다. 넌?
‘월 플라워x류승호’ 콜라보레이션 제품 발매일까지, 또 S/S시즌 신상 발매일까지 딱 이틀만을 남겨놓고 있던 시점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