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22)
블랙 라벨-121화(122/299)
블랙 라벨 121화
122. 노숙대란
D-1
이제 류승호와의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비롯한, 월 플라워의 S/S시즌 제품 판매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4시간 남짓뿐.
우선 재승은 ‘월 플라워의 첫 번째 매장’이란, 거룩한 타이틀을 얻게 될 연남동 상가 건물을 찾았다.
인테리어 공사 시공 후의 매장 내부 전경이라면, 스케치 업(Sketch Up)을 비롯한 3D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몇 번이고 확인했던 바 있었다.
연남동 매장을 비롯한 오프라인 매장의 전반적인 디스플레이를 책임졌던 직원 남광민이, 지속적으로 검토를 요구해 왔던 덕에 말이다.
하지만 본래 시뮬레이션을 비롯한 시각적 자료를 통해 접하는 것과, 제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하게 마련이지 않은가?
“와….”
재승이 가오픈 준비를 마친 연남동 매장 안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한차례 감탄을 해 보이자 곁에 서 있던 VMD 직원 남광민이 한껏 의기양양해진 투로 물음을 건네왔다.
“사장님,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한차례 “네” 하고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곧장 고개를 두리번거려 가며 다시금 매장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화이트 투톤 컬러로 채색되어 있는 매장의 한쪽 벽면 위로, 그동안 자신이 올렸던 쇼의 하이라이트 장면만 편집된 영상이 송출되고 있는 중이었다.
미니멀리즘을 주제로 선보였던 월 플라워의 첫 번째 쇼를 시작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신분으로 참여했던 알렉산더 킹의 쇼, 또 마지막으로 지난 파슨스·F.I.T 대항전 당시 선보였던 오뜨 꾸뛰르 쇼에 이르기까지….
벽면에 별도로 스크린을 설치해 두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빔 프로젝트로 영상을 송출시키는 간단한 원리였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스크린을 설치해두는 것보다, 훨씬 더 보기 좋은 느낌이기도 했고 말이다.
더군다나 반짝반짝 광이 나는 대리석 소재의 바닥은 왠지 신발을 벗고 올라서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고, 유리로 된 천장은 몽환적인 느낌을 배가시켜 주는 듯했다.
기다란 행거들이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었으며, 행거에는 월 플라워의 택(Tag)을 달고 출시되었던 모든 제품들이 출시년도 순으로 깔끔하게 걸려 있는 상태였다.
이곳이 바로, 월 플라워의 첫 번째 오프라인 매장이다.
브랜드 월 플라워의 역사와 미래가 동시에 담겨 있는 곳이자, 자신의 역사와 미래가, 더 나아가 월 플라워를 위해 백방으로 힘 써온 직원들의 역사와 미래까지도 담겨 있는 곳이다.
그 전경을 낱낱이 살펴보고 있노라니, 다시 한번 감상에 젖어든다.
가슴속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이기 시작하더니, 종지에는 마치 불에 뜨겁게 달군 자갈을 잔뜩 삼켜내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다.
이제 더 이상 타인의 디자인을 도둑질해 가며, 하루하루 힘겹게 삶을 연명해 나가는 비루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손으로 직접 일궈낸 브랜드 월 플라워의 매장이 생겼다.
전생에서는 노트에 담겨 있던 게 전부였던 꿈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마냥 아득하게 느껴진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덧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장님?”
남광민의 부름 덕에,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한차례 “네?” 하고 되묻기 무섭게, 남광민이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우선 컨설팅 업체 쪽 담당자하고 짤막하게 대화 나눠봤는데, 직원 교육은 완벽히 끝났다고 하네요. 이미 이 주 전부터, 실무에 투입되어도 손색 없을 만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손에 쥐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 홀짝이고는 되물었다.
“사은품은요?”
일정 금액 이상을 구매한 고객들에게 지급될 사은품을 몇 개 준비해 둔 상태였다.
가령 예를 들자면 월 플라워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는 스티커라든지, 수건, 쿠션커버 등을 말이다.
그런 잡동사니들을 누가 좋아하겠냐고 생각한다면, 정말 크나큰 오산이라고 일러주고 싶다.
대표적인 예로 ‘슈펄미(Superme)’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슈펄미사에서 구매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나눠줬던 성냥, 장갑, 칫솔, 축구공들의 잡동사니들 같은 경우 현재 최소 십만 원대의 중고가격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남광민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핥으며 답했다.
“이사님께서는 넉넉하게 준비한답시고 주문 넣으신 것 같은데, 손이 워낙 크셔야 말이죠. 덕분에 안쪽 창고에 쌓여 있는 박스들 중, 절반이 사은품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하여튼, 송 이사님 본인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아니라고 또 막 쓰시고….”
괜히 이죽거리는 투로 말해 보이자,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 남광민이 제 의견을 늘어놓았다.
“괜히 남겨봐야 짐만 될 것 같아서 최대한 넉넉하게 뿌리고, 계산대 옆에 진열해놓고 판매도 해볼까 해요. 사장님 생각은 어떤 것 같으세요?”
“네.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덤덤한 투로 답해 보인 뒤, 다시금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던 순간.
“푸흡-!”
아직 새거나 다름없는 대리석 바닥 위로, 머금고 있던 아메리카노 커피를 잔뜩 내뿜고야 말았다.
다름 아니라, 쇼윈도 너머에서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던 의문의 남성과 눈이 마주쳤던 탓이었다.
다소 펑퍼짐한 후드 티 차림의 남성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연신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침을 해대며, 티셔츠 소매로 입가에 묻은 커피를 훔쳐내고 있는 지금도 시종일관 촬영 중이었고 말이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남광민이 걱정스러운 듯 건네 보인 물음에, 차마 대답할 겨를이 없어 쇼윈도 너머를 손끝으로 가리켜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보였다.
이윽고 남광민의 시선이 손끝이 향하고 있는 방향에 닿던 찰나, 남광민 역시 화들짝 놀란 듯 뒷걸음질을 쳐가며 “뭐, 뭐야?” 하고 소리 내어 말했다.
이내 남광민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매장 출입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장 문을 열어젖히며, 후드 티 차림의 남성에게 물음을 건넸다.
“죄송합니다만, 방금 사진 촬영하신 거 맞죠?”
깜짝 놀랐던 감정을 미처 추스르지 못한 탓인지, 그렇게 물어 보인 남광민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마냥 날카롭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내 후드 티 차림의 사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다급하게 손사래를 쳐 보이며 기어들어가는 투로 답했다.
“아, 그게 제가 이재승 디자이너님 팬이어서….”
걸 그룹 멤버도 아닌데, 수염 덥수룩한 삼촌 팬에게 ‘도촬’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액면가도 딱 삼촌뻘은 되어 보이는 듯했다.
어쨌든,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 남광민의 목소리가 사뭇 나긋해진 듯 보였다.
“기념사진이라면 제가 제대로 찍어드릴 테니까, 앞서 촬영한 사진들은 지워주시겠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광민이 정중한 투로 말을 건네자 한차례 “아, 예. 죄송합니다….” 하고 답해 보인 후드 티 차림의 남성이, 앞서 촬영한 사진들을 삭제하려는 듯 제 스마트폰을 매만져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던 찰나.
어느새 매장 바깥으로 나온 재승이, 후드 티 차림의 남성에게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어떻게 오신 거예요?”
“네?”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촬영하신 건가요?”
말을 마친 재승이, “아니면….” 하고 재차 덧붙여 물었다.
다름 아니라, 후드 티 남성의 곁에 세워져 있는 ‘트렁크 백’을 보고 건넨 물음이었다.
이내 멋쩍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여 보인 남성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줄 선 건데요?”
재승과 남광민이 멍한 얼굴로 남성을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이내 그가 다시금 물음을 건네왔다.
“혹시 1인당 구입 가능 금액 제한이나, 개수 제한도 있나요?”
이내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남광민이 “네, 제한이 있긴 한데….” 하고 말해 보인 뒤,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힐끔 쳐다보고는 재차 되물었다.
“지금 아직 24시간이나 남았는데요? 설마 여기서 꼬박 하루를 기다리시겠다는 거예요?”
한차례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인 남성이, 어깨를 한 번 으쓱대 보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24시간 대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 * *
첫 번째 웨이팅 고객을 시작으로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줄이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저녁 여섯 시 무렵이 되자 족히 수십 명은 될 법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성별도, 연령층도 각양각색이었으며 대부분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1인용 텐트를 펼쳐 놓고 앉아 있는 이들부터 시작하여, 준비해 온 침낭 속에 들어가 있는 이들, 심지어는 낚시터에서나 사용할 법 해 보이는 간이 의자를 펼쳐놓은 채 가스버너로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이들까지 간간이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아직 한 번도 영업을 개시한 적이 없는, 월 플라워 연남동점 앞 인도는 흡사 캠핑장을 방불케 할 지경이었다.
가장 일찍 줄을 섰던 덕에 매장 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던, ‘리셀러-마크’가 냄비에 담겨 있는 라면 면발을 한 젓가락 크게 집어서는 후후 불어대기 시작했다.
후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면발을, 곧장 한 입에 욱여넣기를 잠시.
“크허, 어후 뜨거워라….”
한가득 머금었던 면발을, 도로 냄비에 다시 뱉어내고 말았다. 이내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리셀러-X’, 이경훈이 고개를 한 번 가로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야,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하냐? 천천히 좀 먹어라.”
“아침 먹고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하여튼, 간신배 같은 놈.”
“또, 뭐가?”
“혼자 아침 일찍 나와서 대기를 타?”
이내 ‘리셀러-마크’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냐? 그리고 나 같은 소상공인들이 살아남으려면 별 수 없어. 몸으로 때워야지, 뭐.”
“야, 그나저나 단톡방에 올린 사진은 뭐냐? 이재승 디자이너랑 찍은 사진. 보니까 매장 안에서 찍은 거 같던데, 혹시 월 플라워 내부에 연줄 닿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지랄하네. 내부에 연줄 닿는 사람 있었으면, 내가 머리에 총 맞았다고 여기 앉아서 라면 먹고 있겠냐? 그리고 있었으면, 너한테는 진작 귀띔해 줬겠지.”
이내 한차례 키득거려 보인 이경훈이, 잔뜩 이죽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야, 네가?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하긴, 인정.”
장난스럽게 답해 보인 ‘리셀러-마크’가, 다시금 면발을 집어 들며 짜증 서린 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일찍 나온 것도 말짱 꽝이다. 직원이랑 짧게 대화 나눠봤는데, 1인당 구매 가능 금액도 제한 걸어뒀더만.”
“뭐? 얼마까진데?”
“1인당 무조건 이백만 원까지. 그리고 콜라보레이션 제품은 딱 세 벌까지만 구매 가능하고.”
“하, 씨….”
“아침부터 생고생하고 이득 본 거라고 해봐야, 남들보다 일찍 퇴근하는 거 말고는 없게 생겼다.”
이내 이경훈이 고개를 돌려서는, 뒤로 길게 줄지어선 인파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이 뒤로 오는 사람들은, 콜라보레이션 제품 구경도 못 할 거 같은데? 그걸로 라도 위안 삼아야지, 별수 있겠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줄지어 서 있는 인파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는 매장 앞에서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촬영하고 있는 기자들이 등장했음은 물론, 보도까지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 모름지기 ‘패션 피플’이라면 이 정도 노고는 겪어야지. 라면 맛이 끝내줘요 ] [ ‘월 플라워x류승호’, 노숙대란? 그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 [ 혹시 옷테크를 아시나요? 월 플라워 매장 앞에서, 전문 ‘리셀러’와 대화를 나눠보다 ]그 대열에 합류해 있는 이들 중에는, 유명 연예인의 매니저 역시 섞여 있는 상태였다.
“지훈아. 일단 자리 잡고 앉기는 했는데, 형이 보기에는 직접 구매하기는 영 힘들 것 같아 보이는데….”
– 형, 분명히 되팔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이 태반일 거예요. 얼마든 좋으니까, 옷만 구해다 주세요.
“하, 일단 알겠어. 최선을 다해볼게.”
– 아니,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꼭 구해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직접 줄 서겠다고 했잖아요?
“야! 그게 말이 되냐? 그건 절대 안 되지. 알겠어, 알겠어. 형이 어떻게든 구해 볼 테니까,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통화를 마친 모 연예인의 매니저가 한차례 긴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그는 다름 아닌 유명 아이돌, ‘권지훈’의 매니저였다.
이내 곁에 서 있던 신입 로드 매니저가, “빵이라도 몇 개 사올까요?” 하고 조심스레 물음을 건네왔다.
“그래.”
쟈넬을 비롯한 프리미엄 브랜드의 시즌 쇼에 초대받을 정도로, 패셔니스타로서의 입지가 굳건한 권지훈이 아니던가?
대체 왜 이런 국내 브랜드의 제품에 목을 매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는 듯했다.
단연 권지훈의 집착뿐 아니라, 길게 줄 서 있는 이들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옷 몇 벌이 뭐라고, 노숙까지 감행한다는 것인가?
“것 참….”
이내 그가 체념한 듯, 펴놓은 돗자리 위에 털썩 주저앉던 찰나.
띠링.
띠링.
띠링.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연달아 알림음을 내보였다. 모두, 권지훈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들이었다.
– 형, 진짜 꼭 구해야 해요. 정말 부탁드릴게요. 혹시 또 모르잖아요? 제가 셀럽 마케팅 제대로 한 번 해드리면, 저한테도 콜라보레이션 제의 들어올지….
– 그걸 떠나서, 옷 자체가 정말 갖고 싶단 말이에요. 장담하건대, 출시되고 조금 지나면 돈 주고도 못 사는 옷이 될 거예요.
– 아아, 그리고 가능하면 S/S시즌 제품들도 되는 대로 다 사다 주시겠어요? 부탁 좀 드릴게요.
한차례 한숨을 내쉬어 보인 그가 ‘그래, 걱정 마’ 하고 짧게 답장한 뒤,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설마 살다, 살다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고작 옷 몇 벌 사려는 목적으로 말이다.
알다가도 모를 게 인생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게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라면 한 번 복스럽게도 먹네.’
꿀꺽.
여러모로 고달픈 밤인 듯했다.
말 그대로, 때 아닌 노숙대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