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23)
블랙 라벨-122화(123/299)
블랙 라벨 122화
123. 기회는 한 번에 찾아오는 법
D-day
어느덧, 월 플라워의 첫 번째 오프라인 매장 개점일 및 S/S시즌 제품 판매개시 당일인 11월 1일이 밝았다.
– 국내 의류 브랜드, ‘월 플라워’의 오프라인 매장 앞으로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일 법한 인파가 길게 줄지어 서 있습니다. 모두 내일인 11월 1일 오전 9시부터 판매가 시작될, 브랜드 월 플라워와 영화배우 류승호 씨의 콜라보레이션 의류 구입을 목적으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라는데요.
– 아시다시피 대열에 합류해 있는 이들 중에는, ‘외국인’ 역시 드문드문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과연 노숙까지 감행해 가면서 손에 넣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옷인 걸까요? 오늘 오전 11시 무렵부터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는, 한 대기자와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TV 화면 위로, 아직 개점조차 하지 않은 월 플라워 연남동 매장이 나타나 있다.
그 앞에 서 있는 기자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이번 ‘노숙대란’에 대해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말이다.
멍하니 뉴스를 시청하고 있던 찰나, 송 이사가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어째 예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훨씬 더 커진 것 같다?”
“그러게요.”
어느 정도의 웨이팅 인원이 발생하리란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지만, 적어도 이 정도 규모를 예측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정인 지금까지만 하더라도, 얼추 백삼십 명가량의 인원이 몰린 상태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개점 시간 직전이 된다면 어떨까?
아무리 못해도 족히 수십 명은 더 늘어날 게 분명했다.
손가락으로 협탁을 ‘톡, 톡’ 두드려 가며, 과거의 기억을 한 번 복기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국내에서 이 정도 규모의 노숙대란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프리미엄 브랜드 발뭉과, 스파 브랜드 H&N이 한국 패션계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노숙대란을 일으킬 예정이라지만 그건 지금으로부터 2년 후인 2015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송 이사가 대뜸 팔뚝을 툭 쳐 보이며 퉁명스레 물음을 건네왔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이번 시즌 대박 확정이나 마찬가지인데, 샴페인을 터트려도 부족할 마당에 왜 울상을 짓고 있어?”
“이사님, 혹시 매장 직원들 출근 시간을 조금만 더 앞당길 수 있을까요?”
“매장 직원들? 글쎄?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명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송 이사가 의아하다는 듯, “그런데 왜?” 하고 재차 물음을 건네 왔다.
“예정대로 진행했다가는 안전사고가 발생할 여지가 있을 것 같아서요. 매장 직원들 출근 시간을 조금 앞당겨서라도, 접객 매뉴얼을 새로 갖추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었다. 물론 분위기의 과열은 쌍수를 들고 반길 사항이라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는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만약 저 많은 인원이 먼저 제품을 골라 집겠다고 우르르 뛰어댄다면? 사고를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구역을 나눠 직원들을 배치해 두는 것은 물론, 한 번에 매장 안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에도 제한을 걸어둬야 할 듯싶었다.
“지금 바로 매장 담당자한테 전화 넣어볼게.”
송 이사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던 찰나, 만류하듯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웨이팅 인원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열다섯 명 단위로 그룹을 나눠서 입장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쇼핑 가능 시간도 20분 정도로 제한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좋은 생각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열다섯 명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매장 면적을 고려하고, 또 곳곳에 배치될 직원들까지 감안한다면 열다섯 명이 딱 적당할 것 같아요.”
물론, 꾸역꾸역 더 받아들인다면 그 이상의 인원도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입장한 고객들에 한해서는, 최대한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오케이, 일단 통화해 보고 올게.”
자리를 털고 일어선 송 이사가, 제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콧노래를 흥얼거려가며 디자인실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으로 어림짐작컨대, 아무래도 이미 이번 시즌의 성공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듯 보일 따름이었다.
물론, 이번 시즌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단연 송 이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잉-.
지잉-.
지잉-.
– 이재승 디자이너,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죠? 지난번 디자이너의 밤 때 만났던 권혁태예요. 월 플라워 이번 S/S 시즌 대박, 완전 축하드립니다!
– 보고 싶어요. 이번 시즌 콜라보 제품 혹시 재고 없죠? 있으면 저한테도 한 벌 팔아주세요. 어쨌든, 대박 축하드립니다.
– 정말 축하드려요. 잘되실 줄 알았어요. 앞으로 계속 승승장구하셨으면 좋겠네요. 조만간 시간 나실 때 연락 한 번 주세요.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게요.
손에 쥔 휴대폰이 멈출 줄을 모르고 진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국내 패션업계 종사자들 및 현역 디자이너들이 보내오고 있는, 다소 성급한 축하 메시지들 탓에 말이다.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일일이 다 답장하려다간, 지문이 닳아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 * *
동이 틀 무렵이 되자 훨씬 더 많은 인원이 몰려들었고, 가히 절경이라 칭하기에 일정 부족함이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대기 인원은 삼백 명을 아득히 넘어섰고, 심지어는 대기 줄 앞에서 커피를 비롯한 주전부리를 판매하는 이들까지 등장했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아침 9시.
예정된 개점 시간이 되자, 선두 그룹 대기자들의 입장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십 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걸려 있기 때문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로테이션(Rotation)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포진하고 있던 기자들은 이제 쇼핑을 마치고 나온 대기자들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때문에 적금까지 깼는데, 1인당 구매 가능 금액에 제한이 걸려 있어서 목표로 했던 금액의 10분의 1 정도밖에 못 썼어요. 그래도 콜라보레이션 제품 몇 벌 건졌으니까….”
“아마 해 뜨고 나서 줄 선 사람들은, 콜라보레이션 제품 구경도 못 해볼걸요?”
“오늘 구매한 옷들, 몇 달 묵혀뒀다가 도로 되팔면 직장인들 몇 달치 월급에 맞먹는 차액이 발생할걸요? 하루 노숙하고 그 정도 벌면, 완전 이득인 셈이죠.”
한편, 이강준은 ‘모니터링’이란 명목으로 오늘 하루 연남동 매장에 파견된 상태였다.
“와….”
신기한 광경이었다.
길게 줄 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매장 안에 들어와서는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아무렇지 않게 지출하고 있었다.
이게 고객들이 생각하고 있는 월 플라워의 가치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절로 벅차오르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오후 네다섯 시 무렵이면, 준비된 물량이 모두 동날 듯싶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이강준이 매장 구석 쪽에 정자세로 선 채, 신중하게 옷을 골라 담고 있는 손님들을 살펴보는데 여념이 없던 찰나.
매장 매니저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디자이너 님, 죄송한데 손님 한 분이 찾으셔서요.”
“예? 저를요?”
이내 매장 매니저가 고개를 한 번 가로저어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아뇨, 본인이 유명 연예인 매니저라는데 최고 권한 관리자를 불러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제품 창고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신데, 아무래도 한 번 만나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매장 매니저가, 제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한 장 건네주며 “손님 분께서 직접 주신 명함이에요” 하고 말해 보였다.
건네받은 명함을 살펴보니, 대한민국 3대 연예기획사 중 한 곳으로 손꼽히는 ‘YZ엔터테인먼트’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볼게요.”
한차례 짤막하게 답해 보인 이강준이, 곧장 창고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명 연예인의 매니저가, 최고 권한 관리자를 찾을 만한 이유?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아마 의상 협찬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며, 제품을 몇 벌이나마 더 구해보려는 심산임이 분명했다.
만약 순수한 협찬이 목적이었더라면, 굳이 직접 걸음 할 필요 없이 진즉에 사측으로 연락을 넣었을 테니 말이다.
끼이익-.
이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서던 찰나.
박스 위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두리번거려가며 창고 안을 살피고 있는 30대 남성과 마주칠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월 플라워 디자인 팀 정식 디자이너, 이강준이라고 합니다.”
박스 위에 걸터앉아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곧장 정중히 악수를 청해왔다.
“아, 예. 반갑습니다. 강성현이라고 합니다.”
이강준이 그의 손을 꽉 맞잡으며 되물었다.
“그런데 어떤 용무로…?”
물음을 건네 보인 이강준의 시선이, 자연스레 강성현의 발치로 향했다.
이미 한바탕 쇼핑을 마친 것일까? 그의 발치에 족히 열댓 개는 되어 보이는 쇼핑백이 놓여 있는 상태였다.
이내 강성현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핥아 보인 뒤,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제가 관리하고 있는 ‘친구’가 이재승 디자이너를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 하거든요.”
전혀 예측치 못했던,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일까? 이강준이 저도 모르게 표정을 살짝 구겨 보이며, 엷게 떨리는 목소리로 “예…” 하고 되물었다.
“권지훈이라고 혹시 아시죠?”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친구가, 그 친구예요.”
권지훈.
국내 아이돌을 통틀어서,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 연예계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완판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가 방송에 착용하고 나온 의상이나 아이템들이, 무조건 솔드 아웃되기 일쑤였던 탓이었다.
본래 패셔니스타로 인정받던 그는 지난 2012년, ‘스타일 오브 아이콘 어워즈(Style of Icon Awords)’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며 그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또한 지난해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가, 그를 ‘뮤즈’로 지목하며 큰 화제가 되었었고 말이다.
또 웬만한 유명 패션디자이너들보다, 훨씬 더 화려한 인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랄 수 있었다.
‘탐 포드’, ‘생 로란’, ‘마크 제이콥’ 등의 유명 디자이너들과도 교분이 두터운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이강준이 멍한 얼굴로 서 있던 찰나, 매니저 강성현이 곧장 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서는 권지훈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을 연달아 보여주기 시작했다.
“명함도 받아 보셨겠지만, 대게 사진을 보여 드리기 전까지는 잘 안 믿으시더라고요.”
이강준이 떨리는 눈으로 스마트폰 액정 위로 떠 있는 권지훈의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던 찰나.
“언급된 적이 없을 뿐이지, 지훈이가 사석에서는 월 플라워 제품을 즐겨 입는 편이에요. 이재승 디자이너와 사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고, 재미있는 작업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도 하더라고요.”
이강준이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투로, “재미있는 작업이요?” 하고 되물어 보이던 찰나.
“네. 당사자끼리 협의를 해봐야 하는 사항이겠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
“곧 발표하게 될 신곡의 뮤직비디오를, 월 플라워 제품으로만 채워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말을 마친 강성현이 쇼핑백 한 장을 집어 들어서는, 구매 고객들에게 사은품으로 증정되었던 ‘월 플라워 수건’을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의상뿐 아니라, 자질구레한 소품들까지 전부 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