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26)
블랙 라벨-125화(126/299)
블랙 라벨 125화
126. 선택의 이유
째깍. 째깍.
늘 그랬던 것처럼, 시곗바늘은 마냥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덧 12월에 접어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눈이 내렸다.
새하얀 눈발이 휘날리는 광경이라면, 여태껏 몇 번이고 봐왔다.
이젠 면역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올해에도 어김없이 가슴이 두근댄다.
지금 한바탕 휘날리고 있는 저 눈이 올해의 첫눈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처음’이란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매력은, 가슴을 뒤흔들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장실의 통유리 벽 너머에서, 한바탕 휘날리고 있는 눈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한차례 심호흡을 해 보이고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코트를 챙겨 들었다.
사장실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CS부서의 여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송 이사가 나직이 물음을 건네왔다.
“벌써 출발하려고? 약속 시간이 여섯 시까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맞아요. 조금 미리 가 있으려고요.”
“강남역이라고 했지? 태워다줄까?”
“아녜요. 길 엄청 막힐 텐데, 그냥 지하철 타고 다녀올게요.”
마지못해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 송 이사가, “아!” 하고 침음을 흘려 보인 뒤 재차 덧붙였다.
“애들 사인 받아오는 거 절대 잊지 말고.”
이내 여직원들이 기대감이 잔뜩 서린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약속상대는 다름 아닌, 유명 아이돌 가수 ‘권지훈’이었다.
좀처럼 시간이 맞질 않아,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던 약속이 드디어 성사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여직원들 중 태반이, 사인을 받아다 줄 수 없겠냐는 부탁을 해왔던 것이고 말이다.
“네. 다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여직원들이 그제야 화색을 해 보였다. 한차례 “그럼 다녀올게요” 하고 말해 보인 뒤,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약속이 잡히기 전까지는 영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만남을 코앞에 두고 있으려니 기분이 괜히 뒤숭숭해진다.
과연 권지훈은 어떤 사람일까?
* * *
약속 장소는 강남역 인근에 자리한, ‘일식전문점’이었다. 유명 셰프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곳으로, 간단히 알아보니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했다.
뛰어난 음식 맛도 한몫 거들었겠으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차장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사람이 많은 로비를 거치지 않고 룸 테이블이 자리한 3층으로 곧장 올라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구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지훈이 직접 예약해 두었다는 룸의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순간.
자리에 앉은 채 잡지를 읽고 있던 권지훈이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반겨주었다.
“와, 벌써 오셨어요?”
더욱 놀란 것은 재승이었다. 선입견일지는 모르나 약속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춰 도착하거나,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조금 빨리 움직였거든요.”
이내 권지훈이 제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권지훈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휘황찬란한 시계의 정체는, 놀랍게도 리차드밀(Richardmille)사의 리미티드 에디션 제품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제품의 출시 가격만 하더라도, 한화 1억 원이 훌쩍 넘는 브랜드다.
이미 진즉에 ‘단순한 럭셔리를 넘어선, 하이퍼 워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넋을 놓은 채 시계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 권지훈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전부터 꼭 한 번 뵙고 싶었거든요.”
“아뇨,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와 성공을 거머쥐었으니, 당연히 당돌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의외로 예의가 몸에 배어 있는 듯 보였다.
한차례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착석하려던 찰나. 권지훈이 차려입고 있는, 검정색 코팅 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훈 씨, 혹시 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권지훈이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나긋한 투로 답했다.
“네, 맞아요.”
권지훈이 입고 있는 바지는, 월 플라워의 첫 번째 제품이었던 블랙 코팅 진이었다.
권지훈.
한류 열풍의 주역 중 한 명이자, 국내의 모든 셀럽을 통틀어 가장 많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 정도로 대단한 셀럽이 월 플라워의 제품을 그것도 초창기 제품을 입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단순히 감회가 새로운 수준을 넘어서, 벅차오른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재승 씨, 혹시 가리는 음식 있으세요?”
“아뇨. 뭐든 잘 먹습니다.”
“그럼 오늘은 제가 임의로 주문해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권지훈이 종업원을 호출하여 주문을 하는 사이, 룸 안을 한 번 살펴보았다.
고작 단둘이 앉아 있기엔, 지나치게 넓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또, 곳곳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식품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잔잔한 불빛을 발하고 있는 홍등을 시작으로, *다루마(*達磨: 오뚝이), *마네키네코(*まねきねこ: 손을 흔드는 고양이 인형)에 이르기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사실 월 플라워라는 브랜드를 알게 된 지는 꽤 오래됐어요. 아마 작년 여름쯤이었던 것 같네요. 파리 포그 매거진의 ‘제랄딘 사글리오’가, 국내 신생 스트릿 브랜드의 쇼를 보러 왔다는 기사를 정말 인상 깊게 봤었거든요.”
“아아, 네. 그땐 정말 운이 좋았죠.”
“음, 맞아요. 재승 씨 말씀대로 운이 잘 따라주었던 걸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큰 행운은 절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 움직여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그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쨌든, 제가 재승 씨를 응원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어요.”
한차례 “감사합니다” 하고 답한 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권지훈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쳐가며 답했다.
“저한테 감사하실 일은 아니죠. 어쨌든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고작 20분가량 대화를 나눠본 게 전부라지만, 분명 좋은 ‘뮤즈’(Muse)가 되어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무게감과, 나이에 걸맞지 않는 겸손함, 굳이 과시하려 들지 않아도 어투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이런저런 배경 지식들, 심지어는 자신의 분야에서 이뤄낸 찬란히 빛나는 성과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무엇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어 보일 따름이었던 탓이었다.
이윽고, 식사를 모두 마쳤을 무렵. 단아한 인상의 종업원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차 두 잔을 내왔다.
이내 권지훈이 제몫의 찻잔을 양손으로 살포시 움켜쥔 채,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슬슬 일이야기를 조금 해봐도 될까요?”
‘일’이라는 단어가 거론되기 무섭게, 들떠 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듯했다.
나직이 “그럼요” 하고 답해 보이기 무섭게, 권지훈이 이런저런 설명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에 통화로 한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번 신곡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의상 및 소품을 모두 월 플라워의 제품으로 획일화시켰으면 해요.”
뮤직비디오의 의상 및 소품을 한 브랜드의 제품을 도배하는 것.
국내에서는 아직 선례가 없다지만, 해외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랄 수 있었다.
주로 ‘웨스트 코스트(West Coast)’의 빈민가 출신 래퍼들이 부와 명예를 거머쥔 뒤, 고가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브랜드의 제품으로 뮤직비디오를 꽉꽉 채워내곤 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았을 때 월 플라워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닌 듯했다.
이와 같은 연출은 사실상, “내 인생은 이 브랜드의 제품으로만 채워져 있을 정도로 성공했다”라는 의미를 어필하기 위한 장치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자연스레 역사가 깊은, 초고가 브랜드가 발탁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렇게 한창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찰나, 권지훈이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재승 씨 의사겠죠? 우선 계약서와 함께, 프로덕션 측에서 제작해 준 뮤직비디오 콘티를 함께 첨부해서 보내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만약 일을 맡게 된다면, 보내주신 콘티 내용에 맞춰서 의상과 소품을 제작해 드리면 되는 건가요?”
“네, 맞아요. 의상 및 소품 제작비용은 얼마가 들어가도 상관이 없지만, 제품의 질은 모두 최고 퀄리티였으면 해요.”
정말이지 매혹적인 조건이다.
자세한 계약 조건을 살펴봐야 알겠지만, 이런 조건이라면 무보수로라도 하고 싶었다.
장담컨대, 분명 두고두고 회자될 협업이 될 것이다.
좋은 경험을 쌓는 것은 물론,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 전역에 효과적인 마케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줄 여지도 충분했고 말이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와 의문이 있었다.
“음, 지훈 씨. 우선 이렇게 의미 있는 작업을 제안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색적인 경험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어떻게든 참여하고 싶은 작업인 건 확실한데….”
말끝을 흐려보이자 권지훈이 제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해 보이며, “그런데요?” 하고 되물었다.
“실은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지금 제가 당장 작업에 착수할 수는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럼 혹시 언제쯤부터 작업에 착수해 주실 수 있는 건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일단 12월 말은 되어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달 중순쯤에, 중요한 시상식이 있어서요.”
미국 CFDA 시상식의 오뜨 꾸뛰르 부문 수상 후보로 발탁된 상황이 아니던가?
시상식은 12월 중순쯤 진행될 예정이었고, 일정에 앞서 처리해야 할 문제도 몇 가지 있었다.
적어도 시상식 일정이 아예 끝나기 전까지는, 뮤직비디오 작업에만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자, 권지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한 투로 답했다.
“그 정도 딜레이라면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직 뮤직비디오 촬영 예정일이 잡히지도 않은 상황이거든요. 아마 3월은 되어야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생각해 보니 연말 시상식 일정 탓에, 숨 가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은 권지훈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아니, 오히려 권지훈 쪽이 몇 곱절은 더 정신없이 보내게 될 게 분명했다.
단연 시상식뿐 아니라, 연말 공연 일정까지 수두룩한 와중일 테니 말이다.
어쨌든, 듣던 중 다행인 말이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우선 계약서부터 간략히 훑어본 뒤에,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웹에 게시되어 있는 공식 이메일 주소로 보내 드리면 되는 거죠?”
한차례 “네, 맞아요” 하고 짤막하게 답해 보인 뒤. 잠시간의 고민을 끝으로, 신중히 말문을 열었다.
“저, 지훈 씨. 혹시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왜 하필 월 플라워로 하시려는 거예요?”
권지훈이 의아하다는 듯 “네?” 하고 되묻기 무섭게,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바를 풀어서 말해주었다.
“지훈 씨에게 주어진 선택지에는, 월 플라워보다 훨씬 높은 반열에 있는 다른 프리미엄 브랜드도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하필, 월 플라워를 선택하신 건지 궁금해서요.”
권지훈 정도의 셀럽이라면, 굳이 월 플라워가 아니더라도 이름난 유명 프리미엄 브랜드와도 무리 없이 협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인지도를 떠나서, 그가 속해 있는 매니지먼트 업체가 지니고 있는 힘, 심지어는 그의 개인 역량으로 진행하는 것도 가능한 수준이랄 수 있었고 말이다.
개점 시간이 아니더라도, 권지훈이 방문하는 매장은 황급히 문을 열어준다.
진정한 부의 상징 중 하나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American Express Black Card: 연간 사용이 25만 달러 이상이여야 발급받을 수 있는, 한도가 없는 카드)를 지니고 있으며,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의 오너 디자이너들과의 친분 역시 상당히 두터운 편이다.
그런데 대체 왜, 월 플라워를 선택할 것일까?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권지훈이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답했다.
“지금 당장은, 월 플라워가 제일 좋아서요.”
“네?”
“그게 전부예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간단한 답이 돌아왔기 때문일까?
절로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이내 권지훈이 어깨를 눈썹을 한 번 튕겨 보이고는, 능글맞은 투로 말을 이었다.
“굳이 누군가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월 플라워 열풍이 일 거예요. 저는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은 것뿐이고요. 또, 기왕이면 그 열풍의 선발주자이고 싶은 마음도 있거든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침음을 흘려보였다. 누군가의 말 몇 마디가, 이토록 강렬한 동기가 되어주었던 적이 있던가?
그때 권지훈이 제 백팩 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이제 슬슬 일어나실까요? 사실 오늘, 무리해서 시간을 낸 거라 빨리 돌아가 봐야 해서요. 조만간 한 번 더 봬요.”
문득 여직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사인 몇 장을 부탁하려던 찰나. 권지훈이 제 가방 속 깊숙이 찔러 넣었던 손을 도로 뺐다.
그런 그의 손에는, 스프링노트 한 권과 몽블랑사의 만년필 한 자루가 들려 있었고 말이다.
이내 권지훈이 재차 조심스럽게 그지없는 투로 물음을 건넸다.
“재승 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일어서기 전에 사인 한 장만 받을 수 있을까요?”
멍하니 앉아 있기를 잠시.
“그럼요. 혹시 저도 몇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무실 여직원들이, 지훈 씨 사인만 기다리고 있거든요.”
주어진 시간은 짧다. 고작해야 세 달 남짓한 시간 안에 뮤직비디오 관련 오퍼를 마치고, 프랑스에 자리한 ‘디옴 하우스’로 넘어 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번 뮤직비디오 오퍼는, 크리스찬 디옴의 오뜨 꾸뛰르를 선보이기에 앞서 날릴 묵직한 한 방이 될 것이다.
그것도, 지나치게 묵직한 한 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