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32)
블랙 라벨-131화(132/299)
블랙 라벨 131화
132. 이별 예행연습
브랜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낱낱이 담아낸 칼럼?
설령 타임지가 아닌, 다른 그 어떤 매거진이 같은 제안을 건네왔더라도 쌍수를 들고 반겼을 게 분명했다.
하나의 브랜드가 고정적인 소비층.
즉, 두터운 팬층을 확립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꼽아보자면 단연 ‘스토리텔링’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매니악한 팬층을 더욱 열광케끔 만드는 것은, 브랜드가 걸어온 발자국 속에 담겨 있는 스토리이다.
그들은 유태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랄프 로웬이, 브룩스 브라더스의 판매원을 거쳐 현재의 ‘폴노’를 설립하기 되기까지의 스토리에 열광한다.
또한 1970년대 ‘칼 라거벨트’가 혁신이 시급했던 프리미엄 브랜드, 쟈넬의 지휘권을 잡게 된 뒤 일어났던 모든 변화와 그 속에 담겨 있는 스토리에 열광한다.
비록 제대로 운영되기 시작한 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브랜드라지만, 월 플라워 역시 대중들의 호감을 사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는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또한 타임지는 그러한 스토리를 제대로 피력하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무대이고.
다시 한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막대한 기회와 조우하게 되었다.
어느새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한 번 핥아낸 뒤, 그가 건넨 매력적이기 그지없는 제안에 대한 답을 꺼내 들었다.
“정말 영광이군요.”
이내 한차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레오가, 곧장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해왔다.
월 플라워를 타임지로 이끌어 줄, 친절한 인도의 손길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맨해튼에 위치한 재승의 아파트는 한없이 고요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다름 아니라, 동이 틀 무렵까지 진행되었던 ‘축하 파티’의 여파 탓이었다.
그야말로 겹경사라 일컫기에 일절 부족함이 없는 상황이지 않던가?
오히려 축하 파티가 일찍 막을 내리는 것이, 훨씬 더 이상하게 느껴질 일이리라.
그런 지금.
직원들 중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난 ‘이강준’이, 반쯤 감겨 있는 제 두 눈을 몇 번 슥슥 문질러댔다.
이강준은 우선 부스스한 제 머리칼을 대충 한 번 정돈한 뒤, 곧장 거실로 나섰다.
갈증 탓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우선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신 뒤, 다시 잠을 청해보든 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거실에 첫발을 내딛던 찰나. 이강준이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흘려 보이고 말았다.
소파 위에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드러누운 채,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는 추지훈 덕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담요를 주워 들어 제대로 덮어준 뒤, 곧장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 병을 꺼냈다.
물이 워낙에 냉랭했던 탓인지, 목을 축이고 나니 도리어 졸음이 싹 가시는 듯했다.
“후-.”
이내 이강준이 거실 식탁 의자를 꿰차고 앉아서는, 저 멀리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이국적인 느낌의 건물들을 뚫어지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젯밤.
파티가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분명 즐거웠다. 아니, 어쩌면 정도 이상으로 고무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수상하게 된 마크 제이콥이 파티를 위해 링컨센터 인근의 클럽을 아예 통째로 임대해 버렸고, 그곳에서 마크 제이콥과 재승, 파슨스의 올드 & 영 듀오의 수상을 축하하는 파티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자신의 몇 달치 월급에 달하는 샴페인들이 테이블 위에 잔뜩 깔렸으며, 차츰 시간이 흐르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물론 유명 셀럽들마저 하나둘씩 파티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분위기에 잔뜩 취해 있던 것도 잠시뿐.
애석하게도 파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침울함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별이라….’
다름 아니라 추지훈으로부터 전해 듣게 된, 재승의 ‘수상 소감’ 때문이었다.
시상식 당시에는 재승이 발표한 수상 소감의 뜻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중간중간 명확히 들려오는 단어와 어조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토대로 그 의미를 어렴풋이 유추해 보는 게 고작이었다.
놀랍게도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사장은, 이미 진즉에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보였다.
재차 한숨을 내쉬어 보인 이강준이, 착잡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려 보이기에 이르렀다.
‘이강준, 너 진짜 쓰레기 같은 놈이다.’
언제부터인가 월 플라워와의 이별을, 또 재승과의 이별을 상상하는 일이 부쩍 잦아진 상태였다.
재승의 파격적인 행보를 곁에서 지켜보며, 맨 처음 느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세상이 재승이 지니고 있는 재능을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그다음으로 느꼈던 감정은 동경. 나이에 걸맞지 않는 재능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 흠잡을 데 없는 인품마저 지니고 있는 재승을 닮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따금씩은 ‘곁에서 쭉 함께하다 보면, 조금은 비슷한 면모를 지닐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젖어들기도 할 지경이었고 말이다.
한데 차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동경이 노골적인 부러움과, 욕망으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나도 해보고 싶다.
더욱 넓은 세계를 경험하며 기량을 키우고 싶었다.
재승처럼 해외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직을 도맡아,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여러 평론가들의 평론 및 에디터들의 칼럼 속에서 조연이 아닌, 주연이 되어보고 싶었다.
월 플라워처럼, 오너 디자이너의 가치관이 또렷하게 반영된 멋진 브랜드를 설립해 보고 싶었다.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을 어쩌지 못한 채, 매일같이 갈등해 왔다.
재승이 자신을 비롯한 직원들을 어찌나 각별히 생각해 주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또 그 사실을 아무리 상기시켜 보아도 좀처럼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해 보았으나 이는 통제범위 바깥에 있는 문제인 듯 느껴질 따름이었다.
추지훈에게 재승이 발표한 수상 소감의 정확한 의미를 전해 듣던 순간. 이강준이 침울함에 사로잡혔던 이유는 정말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자신은 감사를 느끼기는커녕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행한 일이었다.
느끼고 있는 감정의 본질을 깨달은 순간, 자기모멸감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추악하고, 못나 보였던 까닭이었다.
“이강준. 정신 차리자, 진짜….”
답답한 마음에 작게 중얼거려 보인 이강준이,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꽉 말아 쥔 제 주먹만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터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살짝 열린 방 문틈 사이로, 재승이 그런 이강준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는 것.
그런 지금, 재승은 속으로 막연히 생각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빠르게, 이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 * *
그날, 점심 무렵.
재승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카페에서, 타임지의 에디터 ‘레오’와 다시금 만남을 가졌다.
예정된 귀국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자, 레오가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레오가 곧장 물음을 건네왔다.
“리(Lee),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째서 이렇게 귀국을 서두르시는 건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재승을 비롯한 월 플라워의 디자인 팀 직원들이 슬슬 다음 시즌 제품을 준비하려는 것인가 싶었다가, 그건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살짝 이른 감이 있다.
초여름까지는 아직 반년에 달하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가?
비록 시즌 준비를 시작하기에 시기상조인 상황까지는 아니라지만, 굳이 귀국을 서둘러가면서까지 준비에 착수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시점은 아니었다.
그때, 재승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덤덤한 투로 답했다.
“실은 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서요.”
권지훈의 뮤직비디오와 관련된 작업을 빗대어 말한 것이었으나, 레오가 받아들인 바는 아예 다른 듯 보였다.
한차례 “아아!” 하고 말해 보인 레오가, 곧장 말을 이었다.
“내년도 디옴 하우스 오뜨 꾸뛰르의 지휘권이, 리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군요.”
말을 마친 레오가, 계속해서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하기야, 오뜨 꾸뛰르에 정식적으로 도전하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시니 긴장되실 수밖에요. 확실히 한 시라도 더 빨리 준비에 임하는 게, 훌륭한 판단인 것 같기도 하군요.”
딱히 해명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계약서에 권지훈의 소속사인 YZ엔터테인먼트가 먼저 협업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수록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때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우선 카페 구석에 비치된 테이블을 꿰차고 앉은 뒤, 이번 인터뷰와 관련된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일단 언제가 가장 편하실 것 같은지 여쭤보고 싶군요.”
“저희는 언제든 좋습니다.”
짤막하게 답해 보이기를 잠시, 곧장 덧붙여 말했다.
“기왕이면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고요.”
“그럼 혹시 내일 저녁은 어떠십니까?”
“저희야 환영이죠.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에디터들 중 가장 친분이 깊다고 할 수 있는, 파리 포그의 시니어 에디터, 제랄딘 사글리오만 놓고 보더라도, 늘상 일과에 치여 살지 않던가?
특히 *데드라인(*Deadline: 원고 마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주간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포그 사옥 인근 호텔을 전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한데, 타임지의 시니어 에디터라면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양의 업무량을 소화해야 할 게 분명했다.
행여나, 자신의 재촉 탓에 무리해서 스케줄에 변동을 주거나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이내 레오가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답했다.
“만약 내일 저녁 스케줄이, 취재였더라면 연기가 불가능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개인 작업이라서요. 침대에서 보낼 시간을 조금만 줄인다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재승이 “감사합니다” 하고 답해 보이던 찰나, 레오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장소를 정해야 할 것 같군요. 혹시 따로 생각하고 계신 곳이 있으십니까? 만약 없으시다면, 제휴관계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진행해도 무방하고요.”
“맨해튼에 제 개인 작업실이 있습니다. 혹시 그곳에서 진행할 수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요” 하고 흔쾌히 답해 보인 레오가, 재차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메시지로 작업실 주소를 보내주신다면, 내일 저녁 7시까지 자료를 준비해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그리고 칼럼과 함께 수록시킬 사진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니, 염두에 두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취재 요청을 받은 지로부터, 불과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인터뷰 일정과 장소가 선정되었다.
이토록 빠르게 일이 처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마냥 얼떨떨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정말 순식간에 모든 게 정해졌군요. 레오,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이건 지극히 당연한 처사일 뿐입니다.”
말을 마친 레오가 제몫의 커피가 담겨 있는 테이크아웃 잔의 뚜껑을 열며, 재차 말을 이었다.
“만약 리의 귀국 예정일까지 남은 기한이 촉박하지 않았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일정을 잡아 드렸을 겁니다. 사실 저와 함께 일하게 된 이들의 시간은, 감히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거든요. 저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는 뜻인 즉, 세계 최고 매거진인 타임지에 실리게 될 예정이란 뜻이기도 하니까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안 그렇습니까?” 하고 물음을 건네 보인 레오가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군요.”
“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차례 악수를 나눈 뒤, 레오를 카페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레오의 승용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까지 지켜본 뒤. 아파트로 돌아가는 대신, 도로 카페 안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곧장 이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기를 잠시.
– 네, 사장님.
수화기 너머에서 이강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일절 다를 바 없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잠시 숨을 걸러 보인 뒤,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강준 씨, 아파트 정문에서 좌측으로 걸어오시다 보면 카페 하나 있거든요. 혹시 잠깐 와주실 수 있으세요?”
– 네? 아, 예. 옷만 챙겨 입고, 바로 뛰어가겠습니다.
“아녜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오세요.”
통화를 마친 뒤, 아까 전 레오와 대화를 나누었던 자리에 다시금 착석했다.
이강준.
그 역시 회귀하기 전의 삶 속에서는, 현재의 자신과 비교했을 때에도 뒤지지 않는 커리어를 쌓아올렸던 바 있었다.
이강준 역시 크리스찬 디옴 소속 디자이너라는 명예로운 커리어를 확보한 뒤, 국내에서 ‘다이아몬드 룩’(Diamond Look)이란 이름의 브랜드를 런칭하여 세계 각국의 패션위크에 자신의 디자인을 선보이곤 했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이강준의 이력서를 받았던 때에, 잠시간 채용을 망설였던 이유 역시 행여나 자신과의 인연이 그의 미래를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탓이었고 말이다.
애초에 스스로의 발전과 더 나은 작품에 대한 열망이 없었더라면, 회귀라는 기현상을 맞이하기 이전의 삶 속에서 보았던 이강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욕심 탓에 족쇄를 채워두고, 곁에 붙잡아 두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다.
우선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되도록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 이별 뒤에는 재회가 있게 마련이다.
다들, 디자이너로서의 삶은 마라톤과 같다고 말한다.
한 시즌의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기에 인생은 너무도 길고, 한 번 창작의 맛을 본 이들은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 달콤함을 잊지 못한다.
만약 이번에 이강준과의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더라도, 그저 순간의 일일 뿐이다.
언젠가 먼 길을 돌고 돌아서라도, 기어코 다시금 동료로서 조우하게 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결심을 굳힌 재승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한 채 이강준이 카페 안에 들어서기만을 기다렸다.
자꾸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씁쓸한 마음을 뒤덮으려 애써가며, 연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는 일련의 연습이었다.
이강준과의 이별이 확정되는 순간, 아쉬운 기색을 내비추지 않으려는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