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35)
블랙 라벨-134화(135/299)
블랙 라벨 134화
135. Music video (2)
권지훈과의 사전 미팅을 마친 다음 날.
막 사장실 안으로 들어선 송 이사가, 손에 쥐고 있던 A4용지 묶음을 협탁 위에 툭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한 번 훑어 봐.”
“이게 뭐예요?”
“제품 디자이너 리스트.”
이내 재승이 무심한 손길로 A4용지 묶음을 집어 들어서는, 기재되어 있는 유명 제품 디자이너들의 이력사항을 천천히 한 번 훑어보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유명 MP3 ‘아이러버’를 디자인했던 제품 디자이너를 시작으로, 최초로 가로화면 회전 기능을 도입했던 휴대폰이랄 수 있는 ‘가로 폰’을 디자인한 제품 디자이너.
심지어는 대기업 ‘*인하우스(*In House: 기업 내부 디자인연구소)’ 출신의 프리랜서 제품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나름 눈에 띄는 이력을 지니고 있는 제품 디자이너들의 이력사항 및 신상정보가 한가득 기재되어 있는 상태였다.
“제품 디자인 기업·에이전시 쪽으로 공문 몇 장 돌리자마자 입질 엄청 오던데? 어줍지 않은 가수도 아니고, ‘권지훈’이잖아? 다들 한 발 걸쳐보려고, 난리도 아닌 거지.”
으스대는 투로 말해 보인 송 이사가,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며 재차 물음을 건네왔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있고?”
“이렇게 많은데, 한 명쯤은 있겠죠.”
이내 송 이사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남의 돈이라지만, 그래도 기왕 쓰는 거 제대로 써야지. 내 생각에는 최근에 왕성한 활동을 보인 3·4세대 디자이너들 위주로 골라보는 게 좋을 것 같네.”
“일단 천천히 몇 번 훑어보고, 오후 중으로 정해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나저나 권지훈이 뮤직비디오 말인데, 촬영 예정일은 아직 안 잡힌 거지? 언제까지 마쳐야 한다는 기한이 없으니까, 뭔가 느슨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이내 재승이 살펴보고 있던 서류를, 제 업무용 협탁 위에 슬며시 내려두며 입을 뗐다.
“되도록 2월 말까지는 어떻게든 끝낸다는 생각으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괜히 느긋하게 여유 부리다가, 만약 저희 때문에 뮤비 촬영이 연기되거나 했다가는….”
한차례 말끝을 흐려 보인 재승이 마치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어 보임과 동시에 고개를 몇 번 내저어댔다.
이번 권지훈의 뮤비 관련 오퍼에는 그의 소속사인 ‘YZ엔터테인먼트’뿐 아니라, 미디어 쪽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편에 속하는 여러 기업들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상황이다.
비슷한 급의 대형 음원·영상 배급사를 시작으로, 유통사, 또 제작을 담당한 프로덕션 등.
이번 기회에 관계를 잘 다져두기만 한다면, 언제 어떻게든 득을 보게 될 여지가 충분한 이들과의 협업이랄 수 있는 것이다.
한차례 “하긴….” 하고 말해 보인 송 이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한 번 물꼬 잘 터놓고 나면, 앞으로 꾸준히 이런저런 일감 물어다 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아무래도 최대한 좋은 첫인상을 심어두는 게 좋긴 하겠네. 뭐, 가급적 빠르게 마치는 게 사장한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일일 테고.”
고개를 끄덕여 가며 “맞는 말이에요” 하고 답해 보인 재승이, 시선을 옮겨서는 통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송 이사의 말대로, 가급적 빠르게 마치는 게 서로를 위하는 길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크리스찬 디옴’이란 이름의 무게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으니 말이다.
이번 오퍼를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 짓고, 2014년에 선보이게 될 디옴 오뜨 꾸뛰르의 기틀을 다지는 데 전념할 필요가 있었다.
여태껏 해온 수박 겉핥기식의 공부와 노력만으로는, 호평을 이끌어내는 데 큰 무리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통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일산 시내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
송 이사가 협탁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캘린더를 괜히 만지작거려가며 다시금 입을 뗐다.
“어영부영하다 보니까, 올 한 해도 다갔네.”
“그러게요.”
어느덧 2013년의 마지막 날이, 불과 며칠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한데,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었다.
올 한 해만큼은, 일말의 미련조차 남지 않는 듯했다.
두 번의 생을 통틀어, 가장 치열하게 보낸 한 해였던 탓일까?
아니면,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내고 이룩한 해이기 때문일까? 한창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그때.
송 이사가 다시금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일하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빙고.”
* * *
평소보다 훨씬 속도감 있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2014년 새해를 맞이하게 됐다.
우선 재승은 자문을 맡게 된 제품 디자이너 몇 명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뮤비 트리트먼트 분석에 매진했다.
정말 어찌나 읽어댄 것인지, 이젠 그 내용이 아예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17번 씬 보면, 스포츠카를 골프채로 부시는 장면 있잖아요? 원안은 그대로 살리되, 조금 더 충격에 취약한 재질의 컨셉카 모형으로 대체하는 게 어떨까요? 타격감도 조금 더 살 것 같고, 여러모로 시원시원한 느낌도 들 것 같고요.”
“B사에서 지난 해 모터쇼에 선보였던 컨셉카가 있거든요? 비슷한 느낌으로 디자인해 보면, 괜찮을 것 같네요. 실제로 권지훈 씨가 보유하고 있는 차량 중, B사 차량이 있기도 하니까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저마다 자신의 분야에서의 입지가 상당히 굳건한, 엘리트 디자이너들이 모인 상황.
배가 산으로 가기는커녕, 오히려 ‘브레인스토밍(Brain Storming)’의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분석·디자인을 마친 소품들은, 곧장 순차적으로 생산업체 측에 제작발주를 넣었다.
뮤비 촬영에 쓰일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까지 직접 만들어야 하는 터라, 그 가짓수가 상당했으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갈 뿐이었다.
심지어 뮤비 촬영에 투입될 스페셜 오더 의상들은, 이미 디자인은 물론이고 샘플 제작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렇게 자신들 몫으로 주어진 숙제를 모두 끝마친 디자인 팀 직원들은, 이미 다음 S/S 시즌 제품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1월 한 달이, 그렇게 빠르고 무심하게 지나갔다.
눈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올해 달력의 첫 장을 넘기게 된 것이다.
* * *
그리고, 2월에 접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어느 날.
근래 쉴 틈 없이 이어진 과로 탓이었을까?
초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재승이, 식탁에 앉은 채 멍하니 저녁밥상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띠리릭-.
“오빠아아아아-!”
“응?”
동생 승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섬과 동시에, 득달같이 달려들어서는 재승을 꽉 끌어안았다.
이내 재승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승희를 떼어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갑자기 뭐야? 용돈 때문이면, 식탁 위에 지갑 올려뒀으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나 붙었어!”
“뭐가 붙었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나한테서는 좀 떨어지는 게….”
퉁명스레 말을 이어나가던 재승이 돌연 말을 멈춘 채, 두 눈을 화등잔 만 하게 떠보이고는 되물었다.
“…잠깐만, 뭐? 붙어?”
이내 승희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 보이고는, 잔뜩 격양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대학 붙었다고-!”
이내 부엌에서 한창 저녁식사를 준비 중이시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서는 되물었다.
“저, 정말? 붙었어?”
“응! 오늘 결과 나왔어!”
“어머나, 어쩌면 좋아….”
비록 일류 명문대까지는 아니라지만, 수도권에 위치한 상위권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축하한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가며 건넨 말에, 승희가 배시시 웃음을 흘려 보이고는 답했다.
“오빠, 나 대학 합격하면 노트북 사주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
“당연하지. 노트북부터 보고, 저녁 먹으러 가자.”
“아싸! 그럼 나 지금 준비한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곤, 곧장 시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권지훈 뮤비와 관련된 오퍼가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었던지라, 몇 시간 정도 짬을 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지이이이잉-.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송 이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한차례 심호흡을 해 보이고는, 차분히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죄송한데 제가 지금 가족들이랑 있어서 조금만 이따가 다시 전화….”
– 야! 잠깐! 잠깐만!
“네, 말씀하세요.”
– 지금 잠깐 인터넷 좀… 아니, 아니지. 지금 바로 사무실로 좀 와줄 수 있어?
답을 꺼내기 전에, 가족들의 눈치를 살폈다.
가족들 역시 급한 전화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준비를 멈추고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일단 지금 당장은 안 될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 지난번 맨해튼에서 했던 인터뷰 말이야. 오늘 발행된 이번 달 발행호에 수록됐나 봐.
그제야 “아!” 하고 소리 내어 말해 보인 재승이, 곧장 달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타임지. 근래 이어졌던 강행군 탓에 아예 잊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송 이사가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며, 열을 올려댄 이유도 이해가 갔다.
한데, 이미 몇 번 겪어본 일이기 때문일까? 심지어는 지켜보지 못한 일의 ‘수순’마저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아마 해외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불씨가, 국내 커뮤니티로 옮겨붙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국내 커뮤니티로 옮겨붙게 된 불씨가, 인터넷 뉴스까지 번져가는 데는 훨씬 더 적은 시간이 소요됐을 것이고 말이다.
“일단 알겠어요. 두 시간 안에 사무실로 갈게요.”
– 뭐? 두 시간? 지금은 안 되는 거야?
“네. 어차피 당장 가더라도 모니터 화면 들여다보고 있는 것 말고.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요?”
– 하긴, 그야 그렇지만….
잠시 말끝을 흐려 보인 송 이사가, 마지못해 “알겠어. 있다가 보자고” 하고 말해보이는 것으로 통화가 끝맺어졌다.
휴대폰을 대충 바지주머니 안에 쑤셔 넣고 나자, 그사이 준비를 마친 가족들이 근심 어린 투로 한마디씩 물음을 건네오기 시작했다.
“재승아, 급한 일 있는 거면 저녁은 다음에 같이 먹자.”
“오빠,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한차례 손사래를 쳐 보이고는, 신발장에 놓여 있던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먹고 천천히 가봐도 돼요.”
그렇게 가족들과 현관문을 나서, 골목 모퉁이를 돌기 직전.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승희가 한차례 “어…?” 하고 소리 내어 말해 보인 뒤, 다급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을 건네왔다.
“오, 오빠!”
“응?”
“이거 뭐야…?”
이내 승희가 제 손에 꼭 쥐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재승에게 들이대 보이던 순간.
[ ‘핑크 윙크’ 여성 속옷 특가, 9,900원부터! ] [ 24시간 한정세일! 대박 특가! ]재승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사달라고?”
“응?”
이내 승희가 제 스마트폰 액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얼굴을 붉혀가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잠깐만….”
이윽고, 다급한 손길로 제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던 승희가 다시금 제 스마트폰 화면을 재승에게 보여주었다.
이내 재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직이 중얼댔다.
“이건 또 뭐야…?”
그러고는 마치 제 눈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신 눈을 비비적거린 뒤, 끝내 승희의 핸드폰을 아예 빼앗아 들어서는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나타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터넷 뉴스 기사였다.
[ 권지훈 및 YZ엔터테인먼트 공식입장, “싱글앨범 뮤직비디오, 화제의 디자이너 이재승 및 월 플라워와 함께 제작 중. 본래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이며, 신곡 뮤비 내 우정 출연 예정.”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