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4)
블랙 라벨-13화(14/299)
블랙 라벨 13화
14. 비일상의 전조
3일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고, 재승의 일상은 예상했던 대로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그사이 재승은 우선 ‘사업자 등록’과, ‘통신판매업’ 신고를 마쳤다.
드디어, 월 플라워라는 상호가 정식적으로 세상에 발돋움을 하게 된 것이다.
재승은 맨 처음 발급받은 사업자 등록증을 액자에 잘 끼워 애지중지 보관했다.
– 상호: 월 플라워(Wall Flower)
사업자 등록증의 상호란에 인쇄되어 있는 ‘월 플라워’라는 글귀를 보고 있노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오는 것만 같았다.
사업자 등록증이 끼워져 있는 액자의 유리 부분을 안경닦이로 정성스레 닦아내던 재승이, 이내 한차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흠. 그래도 절차가 이렇게까지 간단할 줄은 몰랐는데….’
사업자 등록 절차는 재승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간단했다.
만약 재승이 미성년자 신분만 아니었더라면, 몇 배는 더 수월했을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심지어 돈도 얼마 들지 않았다.
고작 해봐야 만 원도 되지 않는 금액을 지출한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마저도 사업자 등록과 관련된 비용이 아니라, 사업자 계좌용 공인인증서와 OTP를 발급받는 데 사용한 금액이었다.
결국 따지고 보자면, 돈 만 원과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투자한 게 전부인 셈이었다.
그렇게 사업자 등록 신청을 마친 날로부터 딱 3일 뒤.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 귀하의 사업자 등록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과정을 놓고 보자면 정말 별거 없다지만, 적어도 그로 인한 효과는 실로 거대하다고 볼 수 있었다.
우선, 재승의 마음가짐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사업자 등록증.
이미 불이 지펴져 있던 재승의 가슴 위로 끼얹어진, 기름이랄 수 있었다.
근 며칠간 촘촘하게 짜인 일과 탓에, 제대로 된 잠을 자본 기억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업자 등록을 마친 뒤에는, 월 플라워의 로고가 인쇄된 포장용 자재를 주문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소량 발주를 받아주는 업체를 찾는 일이,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것과 매한가지였던 탓이다.
그다음에는 노브랜드 의류와 부자재들을 매입하기 위해, 동대문을 한참이나 배회했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에는, 항상 토플 책을 손에 쥔 채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짤막한 조각 잠이 도리어 감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던 것이다.
힘들었다.
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조만간 월 플라워의 로고가 새겨진 ‘택(Tag)’과, ‘라벨(Label)’이 부착된 의류들이 세상에 출시될 것이다.
비록 블로그 마켓을 통해 판매하는 셈이라지만, 자신이 직접 만든 옷들을 판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해야 해.’
재승은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 상상을 원동력으로 삼아가며,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주력했다.
* * *
며칠 뒤, 밤 열 시를 한참 넘긴 야심한 시각.
패션 잡지 ‘에프 트렌드 뷰(F Trend view)’의 편집 팀 사무실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이번 월간지 발행일이 며칠 남지 않은 터라, 외근을 나간 몇몇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한창 야근 중이었던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책상들 중, 상석에 위치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 보였다.
“하아아아암-.”
에프 트렌드 뷰 내에서, 편집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권현목 팀장’이었다. 이내 그가 눈가에 살짝 고인 눈물을 훔쳐낸 뒤, 나직이 입을 뗐다.
“야. 민 대리, 너 또 농땡이 피우고 있지?”
“허, 팀장님! 제가 맨날 딴짓만 하는 줄 아십니까? 칼럼 한 편 읽고 있었어요. 어디까지나 업무의 연장선이라고요.”
“칼럼? 우리 쪽 직원이 쓴 거야?”
“아뇨. 실은 제가 오늘, 꽤 재미있는 블로그를 하나 찾았거든요.”
말을 마친 민 대리가 그제야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리폼 의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블로그 마켓(Blog Market)인데, 꽤나 재미있는 칼럼이 연재되더라고요.”
“그래?”
“네. 팀장님도 한 번 읽어보실래요?”
잠시 망설이던 권현목 팀장이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민 대리가 곧장 제 자리를 내주며 말을 이었다.
“칼럼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두 개밖에 없어요. 연재 주기가 정해진 게 아니라, 올리고 싶은 날에 들쑥날쑥하게 올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그럼 일단 칼럼리스트를 따로 고용한 건 아닌가 보네? 블로그 주인이 직접 쓰는 건가?”
이내 권현목 팀장이, 천천히 블로그에 게시된 칼럼의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지난 2010 F/W(Fall가을, Winter겨울)시즌에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공개한, 신상 의류들에 대한 다소 주관적인 의견이 담겨 있는 칼럼이었다.
‘오?’
얼마 지나지 않아, 권현목 팀장의 입가 위로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딱히 필력이 좋은 것은 아닌데, 글이 술술 읽혔다.
일단 전문 용어를 읽기 쉽게 풀어 쓴 것도 마음에 들었고, 특정 브랜드를 신랄하게 비평하는 대목에서는 구체적인 정황 증거들을 함께 제시하기도 했다.
일단 정확한 배경 지식이 근간이 되지 않고서는 절대 작성할 수 없는, 질 좋은 칼럼임이 확실했다.
이윽고.
“어라? 뭐야?”
권현목 팀장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이내 곁에 선 채, 권현목 팀장의 반응을 시시각각 살펴대던 민 대리가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왜 그러세요?”
“민 대리. 이 칼럼, 대학생이 쓴 것 같은데?”
“예? 대학생이요? 왜요?”
“여기 이 부분 한번 읽어봐.”
권현목 팀장이 마우스 포인트를 이용해, 칼럼이 마무리되는 부분을 드래그해 보였다.
– 칼럼 연재 주기는 불규칙합니다. 리폼 작업이나,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을 때마다 간간이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곳 블로그 마켓이 1인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운영자가 학생이란 사실이 동시에 드러나는 구절이었다.
이내 민 대리가 의외라는 듯, 한차례 침음을 흘려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어라? 왜 저 부분을 놓쳤지?”
“어쨌든, 재미있게 잘 쓰긴 하네. 학생이 쓴 것 같은 느낌도 안 들고.”
우선 필체 자체가 겸손하고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칼럼 곳곳에 자신의 생각이 절대 정설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대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단점’이나 ‘결점’을 부각시켜 무리하게 비평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자 하는 부분도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권현목 팀장이 팔짱을 낀 채, 모니터 화면을 째려보고 있던 찰나. 민 대리가, 재차 의견을 첨언했다.
“그런데 판매하고 있는 리폼 의류들도 퀄리티가 상당히 좋은 편이에요.”
“그래? 리폼 의류가 해봤자 거기서 거기 아냐? 뭐, 청바지 찢고, 자르고, 지지고, 볶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팀장님도 한 번 살펴보세요.”
민 대리가 사뭇 단호한 어투로 답해 보이자, 권현목 팀장이 찬찬히 블로그에 게시된 의류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입고된 모든 제품들이 모두 완판되어, 새로운 제품들을 제작 중이란 공지사항이 눈에 들어왔다.
‘올리는 족족 팔리나 보네.’
이내 입맛을 한 번 다셔 보인 권현목 팀장이, ‘Sold out’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게시판을 클릭했다.
딸깍-!
총 8장의 의류들이 입고되었다가 모두 팔려 나간 듯 보였다.
권현목 팀장은 게시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
여타 리폼 샵들과 달리, 꽤나 다양한 방식들을 동원하여 리폼을 진행하는 듯 보였다.
티셔츠에 ‘와펜’을 부착하는 방식부터 시작하여, 밋밋한 청바지에 지퍼를 박아 넣어 포인트를 주는 방식, 의류 위에 올려놓고 다림질을 하면 프린트한 것처럼 깔끔하게 부착되는 ‘열 스티커’를 사용하여 리폼하는 방식, 옷의 디자인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핏감을 새롭게 조정하는 리사이징(Resizing) 방식에 이르기까지….
이내 권현목 팀장이, 고객 후기 게시판을 한 번 훑어보기 시작했다.
“포장용 자재도 깔끔하게 제작해서 쓰네. 구매 고객들 반응도 나쁘지 않고.”
“오, 그렇네요. 꽤나 꼼꼼한 친구인가 본데요?”
“야, 민 대리. 그런데 너 이 블로그 어떻게 찾은 거냐?”
“그게 실은….”
잠시간 망설이던 민 대리가, 멋쩍다는 듯 제 뒤통수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중고 거래 관련 웹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홍보글 보고 처음 발견했어요.”
“오늘 찾았다며?”
“네….”
“너 이 자식, 내가 회사에서 쓸데없는 웹서핑 하지 말라고 했지?”
권현목 팀장이 미간을 팍 좁히며 되묻자, 민 대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잠시간 상념에 젖어들었던 권현목 팀장이, 두 눈을 또렷하게 떠 보이며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민 대리. 개인 블로그니까, 이 친구 메일 주소 알아낼 수 있잖아? 맞지?”
“네, 그렇죠. 연락 한 번 넣어볼까요?”
“그래.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해봐.”
“네, 알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내가 연락해 볼게.”
짤막하게 말해 보인 권현목 팀장이, 곧장 제자리로 돌아왔다.
인터뷰를 따내서 다음 달 발행호에 짤막하게 실어도 될 것 같았고, 말이 잘 통하기만 한다면 ‘프리랜서 에디터’로 고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이래저래 도움이 될 녀석임이 분명했다. 이내 제자리로 돌아온 권현목 팀장이, 민 대리에게 물음을 건넸다.
“민 대리. 그 블로그 이름 뭐였지?”
“아, 잠시만요.”
이윽고, 민 대리가 무던한 투로 답했다.
“팀장님, 월 플라워요.”
“월 플라워?”
“네. 월 플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