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49)
블랙 라벨-148화(149/299)
블랙 라벨 148화
149. 결과나 지켜보라고
이번 디옴 2014 오뜨 꾸뛰르 컬렉션의 쇼 장소로 발탁된 스테이지는, 디옴의 생가가 자리해 있는 해안도시 그랑빌의 어느 대저택 ‘정원’이었다.
아르도 회장이 매년 여름마다 짧은 휴가를 즐기는 별장 개념의 대저택으로, 정원의 평수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100평을 아득히 넘어서는 널찍한 곳이었다.
어느덧 한여름에 접어들었으나, 그랑빌의 오전은 계절을 망각하게 될 정도로 서늘한 편에 속했다.
저 멀리 해안 일대에서 차디찬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이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마냥 고요하기만 한 지금, 저 멀리 길 끝에서 묵직한 자동차배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롤스로이스사의 대형 세단이었다.
세단 차량은 대저택의 철문 앞에서 부드럽게 멈춰 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하기 그지없는 차림의 아르도 회장이 뒷좌석에서 내려섰다.
그는 몸의 실루엣이 꽤나 면밀히 드러나는, 슬림한 핏의 회색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상태였다.
푸르스름한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코발트블루 색상의 화려한 넥타이와, 비슷한 색감의 행커치프가 그런 그를 조금 더 감각적인 사람으로 보이게끔 만들어주었고 말이다.
“흠….”
제자리에 멈춰 선 채 이번 컬렉션의 쇼장이 자리해 있을 방향을 응시하던 아르도 회장이, 제 넥타이를 조금 더 꽉 조여 보이고는 나직이 말했다.
“가세.”
그러고는 곧장 이번 컬렉션이 진행될 쇼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쇼가 진행될 대저택 정원의 산책로는, 마냥 한산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쇼가 시작되기까지 여덟 시간이나 남아 있던 탓이었다.
하나, 불과 열두 시간 후면 이곳 정원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이게 될 게 분명했다.
“예정된 컬렉션 관람 인원이 몇 명이라고 했지?”
아르도 회장의 물음에, 그의 뒤를 졸졸 따르던 수행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답을 꺼냈다.
“대략 이천 명가량으로 예상됩니다.”
낮은 목소리로 “그렇군” 하고 답해 보인 아르도 회장이, 한차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쇼장에 방문하게 될 이천 명 중, 최소 절반 이상이 루키 디자이너 리(Lee)의 몰락을 기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디옴 하우스 내부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할 때마다, 이를 근거로 한 비평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비평의 수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초반의 조심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만, 교만, 시건방짐 등의 온갖 거북한 단어들이 리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처음에는 발을 뺀 채 눈치를 살피던 평론가들 역시, 돌팔매질에 합류했다.
디옴의 이름의 먹칠을 하게 될 거라는 둥, 이번 컬렉션은 디옴 역사상 최악의 오뜨 꾸뛰르를 관람할 수 있는 놓쳐선 안 될 기회라는 둥….
오죽했으면 리에게, 되도록 웹 서핑을 삼가 달라는 지령까지 하달했겠는가?
반면 리의 반응은 천하태평이었다. 헤실헤실 웃음을 흘려가며,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는 내용의 자국 속담에 대해 알려주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불사의 길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농담까지 덧붙였고 말이다.
리와의 대화를 회상해 보던 아르도 회장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이던 찰나.
그의 뒤를 따르던 수행비서가 돌연 “와아….” 하고 순수한 감탄을 흘려보였다.
이내 그런 수행비서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아르도 회장이,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허….”
그곳에 이번 2014 디옴 오뜨 꾸뛰르 컬렉션의 쇼가 진행될 쇼장이 자리해 있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몽환적인 느낌까지 주고 있는 쇼장이.
* * *
이곳 패션계는 승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패자에게는 한없이 잔혹한 곳이다.
시즌을 성공시킨다면 신처럼 떠받들다가도, 한 번의 실패를 맞이하면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패배자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한 번의 실패를 맛본 뒤, 종적을 감춰 버리곤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성공과 실패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말이다.
“쯧, 아주 지랄들을 하는군.”
신경질적인 투로 말해 보인 마크 제이콥이,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어 보였다.
이내 곁을 따라 걷던 알렉산더 킹이 고개를 한 번 내저어 보이고는 나직이 말했다.
“마크, 보는 눈이 많잖아요?”
“알고 있어.”
“언행에 더 신경 쓰셔야죠.”
마크 제이콥이 잔뜩 이죽거리는 투로 답했다.
“내가 여태껏 쌓아올린 모든 걸 걸고서 장담하건대, 분명 저놈들 중 절반 이상이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리를 숭배하는 내용의 기사를 줄줄 써 내렸던 놈들일걸?”
이내 알렉산더 킹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크 제이콥이 이토록 분개한 이유는, 포토 존에서 받았던 돌발 질문들 탓이었다.
플래시 세례가 빗발치는 와중에, 몇몇 기자들이 상당히 공격적인 질문을 건네왔던 것이다.
이번 2014 디옴 오뜨 꾸뛰르 컬렉션은, 근 몇 달간 단연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평론가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댄 채, 누가 더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지를 경쟁하는 듯 보일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이 진행될 쇼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북적이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알렉산더 킹이, 쇼가 진행될 정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나저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네요.”
마크 제이콥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뭐가?” 하고 되묻자 알렉산더 킹이 길게 자란 제 옆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 보이고는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내부 고발자에 의해 공개된 디옴 하우스 내부의 잡음들부터 시작해서,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지던 악평들과 칼럼들. 심지어 언론사들마저 중립을 유지하는 척, 디옴의 이번 오뜨 꾸뛰르를 물어뜯어 대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부분이 영 의아해서요. 다른 브랜드라면 모를까, 크리스찬 디옴에게는 ‘LVMH 그룹’이라는 강력한 모체가 있잖아요? 아르도 회장이라면 매거진 및 언론사의 데스크쯤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텐데….”
알렉산더 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맞아.”
마크 제이콥이 짤막하게 답해 보이는 것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아르도 회장이라면 이따위 구설수쯤, 손가락 한 번 까딱하는 정도로 잠재워 버릴 수 있겠지.”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여론이 너무 극단적으로 형성되었어요. 웹 커뮤니티만 살펴보더라도 그렇잖아요?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취급할 정도인데, 어째서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것인지….”
한차례 제 콧잔등을 문질러 가며, “그야 뭐….” 하고 중얼거려 보인 마크 제이콥이 곧장 덧붙여 말했다.
“의도적으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거겠지.”
“그러니까, 대체 왜요? 크리스찬 디옴이 해마다 벌어다주는 금액 역시, 절대 적지 않을 텐데 어째서 이토록 무신경한 태도를 고수한 걸까요?”
“비록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아르도 회장은 소름 끼치도록 계산적인 사람이야. 더 놀라운 건 그의 계산이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말이야.”
말을 마친 마크 제이콥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핥아 보이고는, 나직이 덧붙였다.
“그의 모든 선택과 결정 속에는 항상 큰돈이 걸려 있지.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그가 걸려 있는 판돈을 놓치는 경우를,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고.”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다.
알렉산더가 청바지 주머니에 제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정말 모르겠네요” 하고 중얼대 보이던 찰나.
마크 제이콥이 그런 알렉산더를 바라보며, 덤덤한 투로 말했다.
“일부 평론가들이 뒤에서 떠들어대는 말을 들었어. 그들은 리가 지속적으로 무리한 요구와 결정을 반복했기 때문에, 아르도 회장의 눈 밖에 났을 거라고 떠들어대더군. 그래서 그룹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요?”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을 거라고. 아르도 회장은 단 1달러, 아니, 1센트를 위해서라도 감정을 억누를 사람이야. 이번 디옴 오뜨 꾸뛰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지만… 정말 말이 안 되는 건 따로 있잖아?”
“따로 있다고요?”
“리의 부진.”
짤막하게 답해 보인 마크 제이콥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리가 부진을 겪는다고?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애초에 시작부터 틀려먹은, 절대 성립될 수 없는 계산식이었던 거야. 공식이 틀려먹었는데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있나….”
말을 마친 그가, 이번 2014 디옴 오뜨 꾸뛰르의 컬렉션이 진행될 쇼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모든 의문에 대한 정답이 해소될 장소다.
“이번 컬렉션의 디스플레이도 정말 환상적이군.”
“그러게요.”
쉽게 말하자면, 정원 전체를 ‘미로원(迷路園)’의 형태로 디스플레이해둔 상태였다.
녹색 수풀을 네모반듯하게 깎아 벽을 세워두었으나, 그 높이가 낮아 워킹에 참여할 모델들의 상반신이 적나라하게 보이게끔 설계되어 있던 것이다.
마크 제이콥이 인파를 뚫고, 배정받은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알렉산더가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마크, 이런 와중에도 리의 성공을 점치고 있으신 거예요?”
“당연하지.”
짧게 답해 보인 알렉산더가 덤덤한 투로 덧붙였다.
“반응은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지. 어쩌면 지금의 분위기 자체를 두 사람이 형성했을지도 모를 노릇이고.”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리가 해낸 모든 일들을 돌이켜 보라고. 말이 되는 게 한 가지라도 있었는지 말이야.”
* * *
쇼가 진행될 대저택 3층에 자리한 테라스. 인근 해안의 수평선과, 쇼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재승과 아르도 회장이 마주 앉아 있는 상태였다.
두 사람은 테이블 한 개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은 채, 굵은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로군.”
“그렇네요.”
“소감이 어때?”
“기대되네요.”
나직이 답해 보인 재승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시가 커터로 시가의 끄트머리를 잘라내고는 난간 아래쪽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번 2014 디옴 오뜨 꾸뛰르 컬렉션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들 중 태반이 자네와 디옴의 몰락을 바라고 있겠지.”
“앞으로 두 시간 뒤면, 태도가 바뀔 겁니다.”
나직이 답해 보인 재승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제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아르도 회장이 입고 있는 테일러와 비슷한 재질의 소재로 만들어진, 말끔한 정장 외투였다.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이만 내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건투를 빌겠네.”
“감사합니다.”
짤막하게 답해 보인 재승이 곧장 저택 내부와 연결되는 층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CNN STYLE의 리포터 토미가 나직이 말을 건네왔다.
“드디어 그간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 도래했군요.”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던, 뜻깊은 여정이었던 것 같네요.”
“예를 들어주신다면요?”
“우선 절대 미끄러져선 안 되리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난 8주의 준비 기간은 확실히 힘든 시간이었다.
지난 8주의 준비 기간 동안, 살면서 받게 될 모든 비평을 다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지….
온갖 매거진, 웹진, 패션 커뮤니티가 이번 디옴 오뜨 꾸뛰르의 실패를 확신하는 비평으로 가득했었으니 말이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부진이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들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힐난하지 못해 혈안이 됐던 거다.
“머저리들, 결과나 지켜보라고 해요.”
말을 마친 재승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쇼의 시작까지 불과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임박한 시점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