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5)
블랙 라벨-14화(15/299)
블랙 라벨 14화
15. 에프 트렌드 뷰(F Trend View)
재승의 통장을 집어삼킨 ATM기계가, 한차례 굉음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이잉-!
이내 재승이 제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뽑아냄과 동시에, 묵은 숨을 길게 토해냈다.
“하아-.”
재승의 손에 들린 이어폰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은, 음악 파일이 아닌 영어 리스닝 파일이었다.
재승은 이어폰 줄을 제 목덜미에 대충 걸쳐둔 뒤, 곧장 ATM 뒤편에 거치된 거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실핏줄이 잔뜩 튀어나와 있는 충혈된 눈과, 피골이 상접한 듯 보이는 얼굴. 눈 밑에서 시작된 음영이, 입가 바로 옆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재승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유심히 살펴가며, 괜히 양 뺨을 살살 어루만져대고 있던 찰나.
타악-!
통장 정리가 끝난 것인지, ATM기계가 통장을 도로 뱉어냈다.
지난 며칠간의 입·출금내역을 확인하고, 잠시 재점검의 시간을 갖고자 은행에 들른 참이었다.
‘어디 보자….’
차분한 시선으로, 통장에 인쇄된 거래내역을 꼼꼼히 훑기 시작했다.
행여나 필요하지 않은 지출을 했던 건 아닌지. 혹은 제품의 생산원가대비, 단가가 적절했던 것인지 등.
꽤나 많은 부분들을 두루 살폈으나,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문제는 없는 듯했다.
이내 재승의 시선이, 통장 맨 마지막 줄에 자리한 ‘잔액’란에 닿았다.
– 잔액: 663,400원
사업자 통장의 잔액을 바라보고 있자니, 들숨이 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불과 보름 전, 어머니께서 용돈으로 주셨던 15만 원이 벌써 이렇게 불어난 것이다.
물론, 전생에서 이미테이션 의류 제작을 통해 벌어들였던 돈과는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승이 흡족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숫자의 높낮음’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더욱 중요시 여긴 탓이었다.
‘진짜 내 힘만으로 번 돈이야.’
그리고….
‘진짜 내 옷을 만들게 해줄 돈이기도 하고.’
한차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잠시 빼두었던 이어폰을 도로 귀에 꼽았다.
뜻 모를 영어 문장이 흘러나오고 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와중인데도 불구하고,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 * *
야심한 시각. 재승이 볼펜 끄트머리를 입에 문 채, 빈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흠. 어떤 옷들이 좋으려나…?’
본래 통장 잔고가 60만 원을 넘긴 뒤부터는, 자체 제작 의류 생산에 돌입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재승이었다.
현재 잔고는 66만 원.
이제 자체 제작 의류 생산에 돌입할 때가 온 것이다. 이내 재승이 볼펜을 움직여, 키워드가 될 단어를 A4용지에 적어 넣었다.
– 원가 절감.
제작에 사용할 원단과 부자재들의 품질을 낮추지 않고, 원가를 최대한 절감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본금은, 사실상 옷 한 벌을 제작하기에도 빠듯한 금액이다.
한데, 재승은 지금 이 66만 원을 이용하여 최소 세 종류 이상의 옷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중간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출들을 줄인다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일반적인 디자이너들의 업무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명확한 ‘컨셉’을 잡고 ‘도식’을 그려내는 것까지다. 말 그대로 디자인을 하는 것까지가, 디자이너의 업무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여러 사람들의 협업에 의해 일이 진행된다.
디자이너가 직접 작성한 ‘작업지시서’를 미싱공장에 전달해 주면, 미싱공장에서 옷의 샘플(Sample)본과 *패턴(*Petten: 옷본)을 제작해 준다. 보통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지출이 발생한다.
‘일단 급한 대로, 샘플하고 패턴은 직접 만들어야겠다.’
샘플하고 패턴을 직접 만드는 것만으로도, 한 벌당 평균 십수 만 원 정도의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이야 샘플과 패턴을 직접 제작할 수 있을 만한 기술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지만, 재승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말하자면, 프리미엄 브랜드(Premium Brand)들의 고난이도 곡선 재봉을 눈을 감은 채로도 행할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이래저래 직접 하는 게 훨씬 낫겠어.’
샘플 제작을 마친 뒤, 곧장 월 플라워 블로그 마켓에서 ‘선(先)주문, 후(後)제작’ 방식으로 판매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미리 물량을 구비해두는 것이 비해, 손이 많이 가는 방식이라지만 자금이 모자란 상황에 괜히 재고를 쌓아두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좋아.”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디자인’이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 옷의 컨셉을 명확히 해야 했으며, 어떤 재질의 *‘패브릭(*Fabric: 원단)’을 사용할 것인지, 어떤 색감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등의 세세한 부분들을 하나씩 조율해야 했다.
디자인.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또,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다.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던 재승이, 잊고 있던 중요한 사안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 맞다!” 하고 한차례 탄성을 내뱉고는 곧장 키보드를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모 패션잡지사로부터 메일이 한 통 도착했었다.
곧장 답장을 올린다는 게, 워낙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저도 모르는 새에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 안녕하세요?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 잡지, ‘에프 트렌드 뷰(F Trend View)’ 편집 팀의 권형목 편집장이라고 합니다.
우연히 ‘월 플라워’ 블로그를 접하게 되어, 살펴보던 도중 선생님께서 작성하신 칼럼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이렇게 메일을 작성하게 되었습….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칼럼을 재미있게 읽었고, 식사라도 함께하며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혹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물론, 진짜 그 얘기만 할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설령 만나서 정말 밥만 먹고 오게 된다더라도, 하등 상관이 없었다.
일단 인연을 맺어두어서, 나쁠 게 하나도 없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에프 트렌드 뷰.
재승 역시 꽤나 오랫동안 구독했던 패션 잡지 브랜드였다.
아직 창립한 지 한두 해밖에 지나지 않았을, 2010년 현 시점에서는 그리 각광받고 있는 잡지사가 아닐지 모른다. 하나, 후에는 꽤나 큰 이목을 받게 될 곳이었다.
일단 직원 채용 방식에서부터 호감이 가는 잡지사였다. 기억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학벌’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기업이었으니 말이다.
학벌이 좋지 않은 디자이너는, 갤러리(Gallery)조차 쉽게 임대할 수 없는 국내 패션업계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곳이었다.
‘진짜 재미있게 봤었지. 패션계의 악습이나 부조리를 꼬집어 주는 게 참 통쾌했었는데….’
한차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여 키보드를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답신을 작성하기 위함이었다.
기왕이면 ‘취재’나 ‘칼럼 연재’ 등의 협업 제의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어쨌든, 재승은 신중의 신중을 기해 답신을 작성했다.
* * *
며칠 뒤, 패션잡지사 ‘에프 트렌드 뷰(F Trend View)’ 편집 팀 사무실 안.
권형목 팀장이, 미간을 팍 찡그린 채 애꿎은 모니터 화면을 째려보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명확히 말하자면 모니터에 떠있는 ‘블로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답장이 없는 거야?’
우연히 월 플라워 블로그를 발견하고, 블로그의 주인에게 메일을 보낸 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이다. 사실 아무리 답신이 늦어져 봐야, 24시간 내로 돌아올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크나 큰 오산이었다.
“아니, 대체 뭐 하느라 답장도 안 하는 거야? 곤란하면 곤란하다고 말이라도 해주는 게 예의 아니냐고….”
권형목 팀장이 짜증이 가득 서린 투로 중얼대 보이자, 곁에 앉아 있던 민 대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네? 이번엔 또 누가 답장을 안 했길래, 그렇게 뿔이 나셨어요?”
“아니, 그때 메일 보냈던 그 블로그 말이야.”
“허… 설마 아직도 연락 안 왔어요?”
“야, 지금 나 약 올려? 보면 몰라? 왔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고.”
권형목 팀장이 한껏 이죽거리는 투로 공격적인 물음들을 쏟아내 보이자, 민 대리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이고는 답했다.
“설마요. 팀장님, 그럼 블로그에 댓글 한 번 달아볼까요? 메일을 아예 확인 안 하는 수도 있잖아요.”
“그건 아니야. 메일을 읽긴 읽었더라고.”
이내 민 대리가 한차례 상념에 젖어들었다. 설마 진짜 까인 건가 싶었다.
‘에프 트랜드 뷰’가 아무리 신생 티를 벗어내지 못한 패션 잡지사라지만, 적어도 개인 블로그 마켓에게 까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대체 뭐지? 보통 개인 블로그들은 잡지사 측 연락받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데….’
그때, 권형목 팀장이 제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야, 민 대리. 됐어. 평안감사도 지가 싫다면 그만이지.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
“그래요. 대학생이라는 거 제외하면, 별다른 메리트도 없잖아요.”
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던 찰나. 권형목 팀장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입을 뗐다.
“어라? 야, 잠깐만. 지금 메일 들어왔는데?”
“예? 지금요?”
‘이재승’이란 이름으로부터 도착한 메일이었다. 앞서 뱉었던 말과 달리, 꽤나 미련이 남았다. 이내 권형목 팀장이, 무던한 투로 입을 뗐다.
“일단 한번 읽어보기나 하자. 민 대리도 보려면 와서 봐.”
“아,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