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50)
블랙 라벨-149화(150/299)
블랙 라벨 149화
150. 편견이 깨지는 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나네요.”
파리 포그의 에디터, 제랄딘 사글리오의 말에 주변에 앉아 있던 에디터들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이번 디옴 2014 오뜨 꾸뛰르 컬렉션의 쇼가 진행될 쇼장은, ‘미로’의 형태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널찍한 정원 한복판에 우거진 수풀을 네모반듯하게 깎아, 벽처럼 세워두었다.
모델들이 구불구불한 모퉁이를 돌아, 미로가 끝나는 런웨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머리 끄트머리밖에 보이지 않는 애매한 높이로 말이다.
더불어 저 멀리로는 그랑빌 해안가의 수평선이 그대로 보인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이고, 괜스레 우수에 젖어들게끔 만드는 장소임이 분명했다.
이내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디렉터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써 보이고는 답했다.
“디스플레이 자체는 매력적인데, 글쎄요? 이번 오뜨 꾸뛰르는 유독 잡음이 심했던 편인지라…….”
그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디렉터들이 한마디씩 제 의견을 보태기 시작했다.
“디스플레이와 퍼포먼스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인의 퀄리티죠.”
“동감하는 바입니다. 쇼장을 아무리 휘황찬란하게 꾸며놓는다 한들, 선보이게 된 옷이 별로라면 혹평을 면치 못할 수 없을 테니까요. 사전에 보도된 기사들과 칼럼들로 미루어본다면, 디옴의 이번 시즌은 아무래도…….”
“유서 깊은 디옴의 오뜨 꾸뛰르를 담당하기에는, 디렉터의 역량이 부족했던 겁니다. 아르도 회장이 성급했다고밖에 볼 수 없겠군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들 살면서 한 번쯤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고, 아르도 회장에겐 그 실수가 이번 디옴의 디렉터 선정인 셈이겠죠.”
디렉터들의 열띤 토론을 묵묵히 엿 듣고 있던 제랄딘이, 이내 저도 모르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알게 모르게, 리가 지휘권을 잡았던 이번 디옴 오뜨 꾸뒤르의 실패를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내비추고 있던 탓이었다.
‘리…….’
과연 리는 이번 오뜨 꾸뛰르에서 첫 번째 참패를 맞이하게 될까?
리에게는 미안한 일이라지만, 그녀 역시 이번 시즌의 실패를 점치고 있는 중이었다.
시즌 준비 기간에 나타났던 징후들을 토대로 짐작해 보더라도, 또 오뜨 꾸뛰르라는 분야의 특성을 고려해 보더라도 실패를 예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뜨 꾸뛰르는 타 분야와 달리 고도의 ‘협동력’을 요구하는 분야이다.
마냥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더라도 난항일 수밖에 없는 고난이도의 작업인데, 준비 기간 내내 부품들이 끊임없이 삐그덕대는 소리를 냈다면 어떨까?
결국 그녀가, 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디옴하우스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잡음을 다룬 기사와 칼럼들이 연일 보도되던 때에도, 이를 주제로 한 칼럼을 보도하지 않고 철저히 중립을 유지하는 것.
여론의 흐름이 너무도 확고했던 터라, 비록 리를 옹호하는 내용의 칼럼을 보도해 주지는 못했다.
뭇매를 나눠 맞을 필요까지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혹평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게 그녀가 베풀 수 있는 호의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내 제랄딘 사글리오가 고개를 돌려서는,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바닷물이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히 일렁이고 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 * *
모델들의 대기실이 위치한 대저택의 3층 복도 앞으로, 재승과 애슐린이 마주 서 있는 상태였다.
모델 오디션 당시, 재승은 애슐린에게 최하점인 ‘0점’을 주었다.
심사 위원들이 매긴 점수들 중, 최하점과 최고점을 제한 뒤 평균을 내 채점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오디션이었기에 채점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슐린은 당당히 이번 오뜨 꾸뛰르의 모델로 발탁되었다.
그것도 심지어 메인 디자인이랄 수 있는, ‘17번 의상’의 모델로 말이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려 보이고는, 애슐린에게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애슐린, 무슨 일이야?”
쇼의 시작까지 불과 30분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런웨이 워킹에 참여하게 된 모델이라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진즉 스탠바이(Stand-By) 상태에 돌입해 있어야 할 시점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불러냈으니,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받아.”
짤막하게 말해 보인 애슐린이 제 손에 꽉 쥐고 있던, 귀여운 헝겊인형을 건네주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려 보이고는, 곧장 되물었다.
“이게 뭐야?”
“걱정인형.”
“응……?”
이내 애슐린이 한차례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간단해. 앞으로 리가 해야 할 모든 걱정을, 이 헝겊인형이 대신 해줄 거야.”
“직접 만든 거야?”
한차례 “그냥, 뭐…….” 하고 얼버무려 보인 애슐린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려 보이고는 말했다.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이내 재승이 그녀를 가볍게 꼭 끌어안아 주며 답했다.
“시간을 내서 만든 거겠지.”
재승은 런웨이 워킹을 준비하고 있는 모델에게, 여유 시간이 생길 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애슐린이 더욱 사랑스럽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이제 가볼게.”
“잘하고 와.”
“응.”
짤막하게 답해 보인 애슐린이 한차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간 그런 애슐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던 재승이, 헝겊인형, 아니, 걱정인형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욱 꽉 주었다.
* * *
저택 정원 곳곳에 설치된 야마하사의 스피커에서,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빈 여러분께, 안내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2014 디옴 오뜨 꾸뛰르의 쇼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귀빈 여러분께서는 정해진 좌석에 착석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제 곧…….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좌중들이, 자세를 한 번 고쳐 앉았다.
쇼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장내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술렁임이 조금 더 거세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클래식 음악의 볼륨이 점점 더 높아졌다.
그와 동시에, 착석해 있던 귀빈들 역시 하나둘씩 자세를 고쳐 앉기 시작했다.
다들 쇼가 시작되고 있음을 눈치챘던 탓이었다.
이내 런웨이 무대 아래로 깔린 레드카펫 위에 서 있던 진행자가, 큐카드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곧장 말문을 열었다.
-우선 쇼장을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바입니다. 시작에 앞서 말씀드릴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여타 컬렉션과 달리, 이번 2014 디옴 오뜨 꾸뛰르는 과정을 간소화시켰습니다. 인트로 영상 시청 및 브랜드의 연혁을 소개를 생략하고, 곧장 모델워킹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곳곳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라는 둥, “현명한 결정이로군. 볼 것도 없는 쇼가 길어져 봐야, 혹평의 강도만 높아질 테니까”라는 둥……
심지어 몇몇 평론가 및 에디터들은 신랄한 악평을 쓸 생각에 잔뜩 신이 난 것인지, 벌써부터 손가락을 풀어대고 있기도 했다.
그때, 진행자가 만류하듯 손바닥을 한 번 들어 올려 보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모델 워킹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시즌 디옴 오뜨 꾸뛰르의 지휘를 맡았던 ‘리’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그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장내에 다시금 한차례 혼란이 일었다.
본래대로라면 디자이너 인사는, 모델워킹이 끝나고 피날레 무대까지 막을 내린 뒤에 이어지는 게 정상이기 때문이었다.
팔짱을 낀 채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몇몇 평론가들이, 더욱 신이 나서는 이런저런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당히 새로운 형태의 진행 과정이로군요. 여태껏 족히 수백 개의 컬렉션을 관람했지만, 이런 식으로 진행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하하, 글쎄요? 피날레 인사 때 야유를 받을까 두려웠나 봅니다. 나름 꾀를 쓴 거죠.”
얼마 지나지 않아 런웨이 무대 끝자락에서 말끔한 테일러 차림의 리와, 서브 디자이너인 강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왜일까? 여태껏 ‘리’라는 이름을 내건 채 진행했던 여타 쇼와는 달리, 마냥 힘없는 박수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짝짝짝짝…….
반면, 재승의 표정은 마냥 여유롭기만 했다.
재승은 한차례 피식 웃음을 흘려 보이고는, 진행자에게 막 건네받은 핸드 마이크를 제 입가에 가져다 댔다.
-반갑습니다. 이번 디옴 오뜨 꾸뛰르를 지휘했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리’입니다. 우선 귀한 시간을 내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한차례 묵례를 해 보인 재승이, 좌중들을 천천히 한 번 둘러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 오뜨 꾸뛰르를 준비하는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 디옴하우스 내부에서는 지속적인 의견 대립이 있었고, 온갖 매거진과 패션 커뮤니티에는 제 자질을 의심하는 내용의 글이 쏟아졌습니다. 이가 바득바득 갈리더군요.
이내 몇몇 좌중들이 미간을 팍 찡그려 보였다. 지나치게 저돌적인 발언이, 영 탐탁지 않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반면 재승은 여전히 여유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차례 제 콧잔등을 문질러 보인 재승이, 덤덤한 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 자국인 한국의 속담들 중, 이런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혹시 무슨 뜻인지 아시는 분 계신가요?
장내의 분위기가 진즉 싸늘해졌던 탓일까?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대고는 재차 뒷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어떤 풍파를 겪은 뒤에, 일이 더욱 든든해진다”라는 뜻을 지닌 속담입니다. 저와 디옴의 브랜드 이사회, 또 디옴하우스의 식구들은 지속적인 대립 끝에 진정한 파트너십을 일궈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처럼요. 감히 단언컨대 앞으로 1분 뒤에 공개될, 이번 오뜨 꾸뛰르 디자인들은 여태껏 제가 디자인한 옷들 중 가장 견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재승의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태도 탓일까?
몇몇 평론가 및 에디터들이 적나라한 비평의 말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놓고 악담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조롱하듯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재승이, 양 손바닥을 맞댄 채 살살 문질러 가며 뒷말을 이었다.
-이곳에 계신 평론가분 및 에디터분들 중 절반 이상이, 오늘 저녁 본인들의 가벼운 손가락을 원망하게 되실 것 같군요.
한차례 “그럼, 즐거운 관람 되시길” 하고 말해 보인 재승이 곧장 다시금 모습을 감췄다.
이내 객석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재승의 시건방진 태도 탓에 치솟은 분기를 어쩌지 못하고, 무릎 위에 노트북을 펼쳐둔 채 비평 칼럼을 작성하기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오던 클래식 음악의 볼륨이 점점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4 디옴 오뜨 꾸뛰르 컬렉션의 막이 오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