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51)
블랙 라벨-150화(151/299)
블랙 라벨 150화
151. 편견이 깨지는 시간 (2)
재승이 연단 아래로 내려섬과 동시에, 한 치의 지체조차 없이 곧장 쇼가 시작되었다.
하이라이트 롱 핀 조명을 제외한 모든 조명들이 암전되었고, 런웨이 무대를 따라서 깔아둔 레드카펫 위로 자연스레 좌중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잔잔한 선율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냥 생소하면서도, 맑고 아름다운 느낌의 음률이 장내에 울리고 있던 그때.
“허어…….”
첫 번째 모델이 런웨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와 동시에 몇몇 객석 앞 열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저도 모르는 새 탄성을 뱉어내고 말았다.
첫 번째 모델은 한복 치마 특유의 과장스럽고 펑퍼짐한 느낌을 아예 삭제한, 타이트한 핏의 ‘숏-스커트(Short-Skirt)’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매끈한 다리가 무릎을 기점으로 훤히 드러났고, 꽉 조이는 저고리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가슴을 더욱 부각시켜 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름답군.”
쇼가 시작하기에 앞서 온갖 혹평을 늘어놓았던, 배불뚝이 에디터가 건넨 말이었다.
못마땅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괜히 콧김을 한 번 뿜어 보인 뒤, 제 상체를 더욱 뒤로 젖혀서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뉘였다.
색채는 놀랍도록 조화로운 느낌이었고, 오뜨 꾸뛰르 디자인의 실루엣은 한없이 현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단연 ‘재질’이었다.
“신비로운 원단이로군요. 전혀 값이 나가 보이지 않는 투박한 원단인 데다가, 멋대로 잔뜩 구겨진 상태인데도 이토록 아름다워 보이다니…….”
중년 에디터가 낮은 목소리로 건네온 말에, 제랄딘 사글리오가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마(麻) 재질이에요. 외형대로 거슬거슬한 촉감을 지니고 있죠. 통기성과, 흡습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고요. 면과 혼방하게 되면 리넨 천이 되는 소재죠.”
“생소한 소재인 것 같은데…….”
“맞아요. 거친 느낌의 촉감 때문에 의복 소재로는 잘 쓰이지 않았었거든요.”
말을 마친 제랄딘 사글리오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서양에서는 말이죠” 하고 덧붙였다.
“서양에서는 촉감이 거슬거슬한 반면, 내구성이 뛰어난 덕에 주로 포장 자재나 배의 돛을 만들던 때에나 쓰이던 소재였죠. 이집트에서 미라를 감았던 천 역시 열 중 여덟은 마 재질의 천을 이용했었고 말이에요. 미생물이나 곰팡이 등의 잡균의 서식을 막아준다는 특성이 있거든요.”
제랄딘의 유려한 설명에 곁에 앉아 있던 중년 에디터가 사뭇 놀란 듯, “오…….” 하고 한차례 감탄을 해 보였다.
이내 제랄딘이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아니, 리의 모국(母國)인 한국에서는 사뭇 다른 용도로 쓰였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전통의상인 한복을 만들 때에, 그것도 여름용 고급 한복 제품을 만들던 때에 ‘마’ 재질을 주소재로 채택하여 제작했다더군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첫 번째 모델은 어느덧 런웨이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상태였다.
모델은 고혹적인 눈빛으로 좌중들을 한 번 둘러본 뒤, 자연스러운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고는 다시금 백 스테이지(Back Stage)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두 번째 모델이 런웨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장내의 분위기는 한층 더 엄숙해졌다.
한데, 뭐랄까?
두 번째 디자인 역시, 기본적인 틀 자체는 엇비슷한 듯 보였다고 해야 할까?
첫 번째 디자인과 비슷한 실루엣을 표방하고 있었고, 드레스의 색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는 단순한 ‘아쉬움’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혁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파격적인 소재 채택부터 시작하여, 모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켜 주고 있는 실루엣에 이르기까지…….
그 밖의 모든 게 완벽했고, 그렇기 때문에 일은 아쉬움이었다.
만약 이 부분만 완벽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올해 최고의 오뜨 꾸뛰르는 무조건 디옴이라는 평을 받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한차례 입맛을 다셔 보인 중년 에디터가, 제 손가락을 한 번 힐끔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쇼의 시작에 앞서 리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자신의 경망스러운 열 손가락이 마냥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만 할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장내 곳곳에서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다.
속으로나마 재승을 응원하던 이들은 뜻밖의 결과 덕에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고, 단 한 번이라도 재승을 깎아내리는 칼럼을 써 내렸던 이력이 있는 이들은 마냥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리(Lee), 준비하시죠. 피날레 인사가 끝나고 나면, 출품된 디자인의 유통을 희망하는 바이어들이 몰려올 겁니다.”
평소보다 더욱 복장에 신경을 쓴 듯 보이는 디옴의 최고경영인 알버트가, 한껏 정중한 투로 건네온 말이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재승이 형광등 불빛을 잔뜩 머금은, 그의 에나멜 구두를 한 번 바라본 뒤에 입을 뗐다.
“알버트, 어떤 것 같으세요?”
“예?”
“이번 컬렉션의 반응 말이에요.”
알버트가 한차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객석에 주인 없는 자리가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더군요. 대부분이 바이어들에게 배정된 자리였죠. 확신컨대, 자리를 비운 바이어들 모두가 정원 변두리에서 이번 오뜨 꾸뛰르 디자인의 유통권을 매입하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관람을 포기한 채 정원 변두리에서 통화를 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는 바이어들은, ‘맹수들의 잔치에 늦는다면 덩그러니 남겨진 뼈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는 영리한 이들이었다.
쇼가 끝난 뒤에야 설렁설렁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필연적으로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한편, 큰 이익이 눈앞에 있기 때문일까?
평소 마냥 차분하기만 하던 알버트였으나, 오늘만큼은 평시와 대조되는 잔뜩 격양된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탑 배우들이 올해 있을 온갖 시상식에, 디옴의 이번 오뜨 꾸뛰르 드레스를 입은 채 나타날 겁니다. 컬렉션이 끝나고 나면 디옴의 명성과 매출이 동시에 오를 겁니다. 리는 디옴의 역사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필수적으로 거론되는 디렉터 중 한 명으로 남을 테고요.”
이내 재승이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투로 반문했다.
“글쎄요? 아직 성공을 확신하기에는 시기상조이지 않을까요? 빈 좌석은, 그저 쇼가 너무 형편없어서 이탈한 이들의 자리일 수도 있잖아요?”
“역시 신은 공평합니다. 무시무시한 재능이 다행스럽게도, ‘농담’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군요. 어쨌든, 저녁이 되면 분주하게 움직이셔야 할 겁니다. 리와의 만남을 희망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요.”
“잠시만요, 알버트. 오늘 저녁까지는 한가했으면 좋겠는데요.”
“예……?”
“모든 일정을 내일로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이내 알버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팍 찡그린 채, “예? 다른 중요한 일정이라도……?” 하고 넌지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컬렉션의 꽃은 쇼가 끝난 뒤에 이어지는 새로운 만남이랄 수 있다. 바이어, 투자자, 유명 디자이너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이 큼지막한 비즈니스를 동반한 채, 리를 찾아올 게 분명했다.
아무리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다고 한들, ‘빅딜’(Big Deal)을 동반한 새로운 만남보다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알버트가 제 아랫입술을 핥아가며, 재승의 답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찰나.
“오늘은 디옴하우스의 식구들과의 만찬을 즐길 겁니다. 컬렉션의 성공을 자축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가 되겠죠. 이번 오뜨 꾸뛰르를 끝으로 아뜰리에를 떠나게 된, 마이스터 끌로에의 송별회도 함께 진행할 거고요.”
알버트가 다급한 투로 “리, 하지만……!” 하고 답해 보이자, 재승이 잽싸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고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투로 답했다.
“아뇨, 동료들과 영광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두 사람 사이로 냉랭한 기류가 흐르기를 잠시.
아무런 답 없이 재승을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던 알버트가,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어 보이고는 실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본부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알버트가 대기실을 빠져나간 뒤, 곁에 묵묵히 서 있던 이강준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사장님, 이제 슬슬 시작되려는 것 같네요.”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재승이, 이강준이 바라보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푸른색 바닷물이 석양이 짐에 따라, 점차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해수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재승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답했다.
“네, 이제 ‘진짜 쇼’가 시작될 시간이네요.”
* * *
한편, 쇼가 중후반으로 치달은 지금. 제랄딘 사글리오는 짙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준비 과정이 워낙 다사다난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던 탓일까?
디자인은 완벽하지만, 뭐랄까? 리의 이번 쇼는 지난 쇼들과 비교했을 때, 미흡한 부분들이 더러 엿보이는 듯했다.
‘쇼 자체의 퍼포먼스도 그렇고, 디자인들이 전체적으로 획일화된 느낌이 드네…….’
평론가 및 에디터들이 리의 쇼를 유독 사랑하는 이유는, 또렷한 ‘*메타포(*Metaphor : 은유 내지는 암유)’가 담겨 있는 퍼포먼스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퍼포먼스가 일절 동반되지 않은 이번 쇼는, 밋밋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야외무대를 쇼장으로 채택한 만큼, 조명 장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으니 퍼포먼스는 기대하기 힘드리란 생각이 들었다.
뿐 아니라, 오뜨 꾸뛰르 제품들의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
훌륭한 실루엣을 하나 잡은 뒤, 그 위로 사소한 변형을 준 디자인들이 태반이었다.
레스토랑에 비유하자면,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의 모든 요리를 훌륭한 식재료 하나만으로 조리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쇼가 시작되던 무렵 느꼈던 충격과 혁신적인 느낌이, 점차 지루함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기대감이 유독 높았던 탓인지 놀람을 금치 못한 채 쇼를 관람하고 있는 타 평론가 및 에디터들과 달리, 제랄딘은 지루함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 손을 턱에 괜 채, 무심한 표정으로 런웨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그때.
“어……?”
흑인 여성 모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고, 장내에 한차례 큰 술렁임이 일었다.
흑인 여성 모델은 ‘씨스루(See-Through)’ 형태의 저고리를 걸쳐 입고 있는 상태였는데, 안에 속옷을 받쳐 입지 않은 터라 잘록한 허리는 물론이고 풍만한 젖가슴마저 훤히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좌중들 중 그 누구도, 성욕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숨죽인 채, 지금 런웨이 위에 등장한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깊게 만끽하고자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을 뿐.
쇼가 시작된 이후, 가장 파격적인 디자인이 등장한 지금 이 순간.
곳곳에서 길고 짧은 탄식들이 속속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하지만, 진정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서서히 저물기 시작한 태양이, 수평선 끄트머리와 맞닿기 시작하자 정원이 삽시간에 붉은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단 한순간에 펼쳐진 일이었다. 석양이 조명을 대체하여 새로운 느낌을 연출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또 그와 동시에 모델들이 격식을 무시한 채, 두셋씩 마구잡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깔끔한 느낌의 원색 색료를 이용하여 만든 한복 오뜨 꾸뛰르가 아닌, *그라데이션(*Gradation: 진한 색에서 점점 옅은 색으로 채색해 나가는 기법) 기법을 사용하여 제작해
낸 파스텔 톤의 드레스를 입은 채 말이다.
“역시 리의 쇼에 퍼포먼스가 빠질 리가 없지…….”
제랄딘 사글리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대던 그때, 마지막 모델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재승의 연인이자 제랄딘 사글리오와 친분이 깊은 모델, ‘애슐린’이 런웨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흰색 저고리에,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채색된 연분홍빛 치마를 입은 채였다.
석양빛이 후광처럼 그녀를 비춰주었고, 저 멀리로 보이는 불그스름한 수평선은 배경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런웨이를 가로질러 걸었다.
이내 몇몇 평론가들이, 솟구치는 분기를 어쩌지 못한 채 격식을 망각하고 저들끼리 격양된 투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제기랄, 완전히 농락당했군……!”
저 멀리 객석에 앉아 있던 어느 평론가의 외침이, 제랄딘의 귓가에 꽂혔다.
지극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모두가, 디옴과 리에게 완전히 농락당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쇼는 지나치게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