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56)
블랙 라벨-155화(156/299)
블랙 라벨 155화
156. Nuclear Launched Detected
재승이 가판대 앞에 멍하니 서 있자, 연신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하고 연달아 물어대던 영국이 재승의 손에 들린 매거진을 뺏어 들었다.
미간을 팍 좁힌 채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매거진의 메인커버만 들여다보고 있던 영국이, 한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것 참, 대체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리(Lee)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또 재승의 반응을 보면, 제 친구와 관련된 내용임은 분명한데 영어 실력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아 그 뜻을 오롯이 알 수가 없던 것이다.
이내 재승이 영국의 어깨 위로 팔을 둘러보이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글쎄? 아무래도 나랑 한번 붙어보고 싶다는 뜻인 것 같은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삼십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패션계를 종횡무진하며, 든든한 파벌 세력을 구축해 둔 칼 라거벨트와의 대립이 두려워서?
아니다.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 디자이너의 기고만장한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공격을 한 것이겠지만, 글쎄? 애석하지만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런 진흙탕 싸움이 으레 그렇듯, 승자보다는 약자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게 마련이다.
뭐랄까? 일종의 기회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설령 패배를 맞이한다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만 보여준다면 칼의 인기를 훔쳐올 수 있을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럴싸한 패배를 목표로 싸울 생각은 없다. 저쪽에서 먼저 선전포고를 해온 이상, 압도적인 승리를 목표로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 싶더니, 이렇게 또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다. 아마 대규모 교전으로 번져나갈 게 분명했다.
제대로 된 아군을 갖추고, 든든한 조력자를 마련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게 분명했다.
“영국아.”
“응?”
“미안한데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이내 영국이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보이고는, 걱정스러운 듯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건네 왔다.
“혹시 심각한 상황이야?”
어깨를 한 번 들썩거려 보이고는, 녀석의 걱정을 덜어내 주기 위해 마냥 무덤덤한 투로 답했다.
“아니, 전혀.”
* * *
“얼핏 보아하니,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 같던데?”
아르도 회장이 짙은 미소를 머금은 채 건넨 질문에, 재승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고는 답했다.
“네, 말씀하신 대로인 것 같네요. 소문의 중심점에 서 있는 저도 재미있다고 느낄 정도이니까요.”
“대립은 최고의 구경거리지. 그나저나 상대가 너무 막강한 것 아닌가? 칼은 패션계에 30년 이상 몸담고 있던 원로 디자이너야. 자칫 잘못하다간, 칼의 크루에 소속된 이들 전부와 아예 척을 지게 될 수도 있을 텐데?”
“제게 있어 상대가 누구인가는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에요. 쉽게 승리를 쟁취하느냐, 조금 어렵게 쟁취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당당함을 넘어선,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댄 아르도 회장이, 회장실의 중앙에 비치된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켜 보이고는 “일단 앉게” 하고 말해 보였다.
재승이 한자리를 꿰차고 앉기 무섭게, 아르도 회장이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로 물음을 건넸다.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온 거겠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한차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아르도 회장이,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 보이며 답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의 비즈니스는 순조롭게 마무리됐네. 자네가 지휘한 크리스찬 디옴은 성공했고, 자네는 아직 받지 못한 금액에 대해 정산 받는 일만 남았지.”
“네.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저를 도와주셔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저희가 비즈니스로 묶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재승이 덤덤한 투로, “적어도 제가 새로운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말이죠” 하고 덧붙였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제 손목에 채워져 있는 바쉐론 콘스탄틴사의 명품 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나직이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딱 3분 주겠네. 자네가 생각해 온 조건을 말해보게. 이번 싸움에 있어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줄지, 안 줄지에 대해서는 우선 조건부터 들어본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
한차례 “후…….” 하고 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대뜸 손을 들어 올려서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향후 2년. 제 브랜드 월 플라워에서 나온 프리미엄 라벨 제품들은 발매시점으로부터 세 달간, 오직 LVMH 그룹과 연계된 루트를 거쳐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른바 ‘이월상품’이란 딱지가 붙은 제품들을 괜히 헐값에 판매하겠는가?
아무리 팬 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브랜드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시간이 흘러 시류에 맞지 않는 옷을, 제값에 구입할 소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 패션계는 지독하리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재승의 제안은 상당히 파격적이랄 수 있었다.
평균적인 수치를 토대로 살펴봤을 때 제품 발매일로부터 삼 개월 간의 매출액이, 그 제품이 벌어들이게 될 총 매출액의 70%라고 봐도 무방할 테니 말이다.
한참 동안 상념에 젖어들어 있던 아르도 회장이, 제 턱 끝을 살살 어루만져 가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자네가 제시한 조건 말이야. 얼핏 보기에는 자극적인 제안처럼 느껴지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자면…… 글쎄? 뭔가 많이 아쉬운 느낌이군그래.”
이내 재승이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마냥 손해만 볼 수는 없으니까요. 만약 상대가 LVMH 그룹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이기적인 조건을 제시했을 겁니다.”
삼 개월간의 유통·판매권을 LVMH 그룹 측에 전부 맡겨 버리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이유는 간단했다.
LVMH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유통망 자체가 워낙 견고하고, 체계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도 회장이 꽉 부여쥐고 있는 세계 각국의 백화점 루트와, 대규모 편집샵의 숫자, 또 럭셔리 웹 사이트의 영향력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이대로 진행하는 게 속이 편할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양측 다 뭔가 아쉽기는 하지만,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손해를 보거나 양보를 해야 하는 조건은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서로 ‘윈 & 윈(Win & Win)’ 할 수 있을 만한 합리적인 제안인 셈.
이내 재승이 제 양손을 깍지 껴 보이며, 재차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본래 최고의 협상은 양측이 모두 아쉬운 협상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찰나의 순간,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한차례 “좋아” 하고 답해 보인 아르도 회장이, 나긋한 투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몇 개 없네. 이건 우리 기업인들 간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룰이거든.”
“예. 알고 있습니다.”
“아마 쟈넬 그룹의 실소유자인 베르타이머 일가 녀석들도 마찬가지일거야. 하지만 놈들이 먼저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응수해 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우선 사람을 몇 명 붙여주도록 하지. 그룹 내에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몇 명 있거든.”
“이 방면이라 하심은……?”
“지면매 체를 이용한 싸움의 베테랑들 말이야.”
말을 마친 아르도 회장이, 한차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리. 한 번 생각해 보게. 내가 ‘패션제국의 황제’라는 거추장스러운 칭호를 거두게 될 때까지, 몇 개의 브랜드를 짓밟고 집어삼켰을 것 같나?”
평소의 어투와 일절 다를 바 없는, 온화한 투로 건네 보인 말이었으나 한없이 섬뜩하게만 들릴 따름이었다.
여태껏 아르도 회장이 마냥 우호적인 조력자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기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는 ‘패션계’라는 이름의 정글 속에서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최상단 부를 꿰차고 앉아 있는, 최상위 포식자들 중 한 명이다.
여태껏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내 아르도 회장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재차 한마디를 덧붙였다.
“간만의 대립이라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그러고 보니 자네와 뭔가 함께하는 건, 뭐든 참 재미있는 것 같네. 시시 때때로 젊었을 적으로 회춘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거든.”
* * *
지면 매체를 이용한, 종이전쟁 이틀 차.
단연 에프 웹 매거진뿐 아니라, 타 매체들 역시 부지런히 칼 라거벨트의 발언을 옮겨 나르기 시작했다.
충분히 이슈가 될 내용이었던지라 무수히 많은 매체가 동참한 상황이었으나, 적과 아군을 구별해 내는 데에는 딱히 큰 어려움이 없는 듯했다.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에디터 개인의 사견이 다분히 많이 담겨 있으면 적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음, ‘적’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흉흉한가요? 그냥 칼 라거벨트 쪽 라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겠네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아르도 회장이 말한 지면매체를 활용한 종이 전쟁의 대가들 중, 수장이랄 수 있는 ‘타일러’였다.
비록 짧은 시간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게 전부라지만, 냉철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듯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절 불안하거나 근심 가득한 기색 없이 ‘작전’을 짜내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타일러의 설명에 의하면 디자이너 열 명 중 아홉 명이, 이미 신인시절부터 교분을 쌓아 온 매거진을 몇 군데 끼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친분에 의거한 관계는 아니고 ‘전략적 제휴’랄 수 있는데, 디자이너들 간의 대립이 있을 때마다 매거진들은 중립을 고수하는 척 자신들이 지지하는 디자이너가 유리해 질 수 있도록 편파적인 칼럼을 실어주곤 한다는 것이다.
이내 타일러가 제 무테안경을 손끝으로 살짝 치켜 올려 보이고는, 재차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리의 손을 들어줄 만한 매거진 몇 군데를 분석해 봤어요. 포그의 차기 편집장으로 지목되고 있는 제랄딘 사글리오가 있는, 파리 포그가 가장 막강한 아군인 것 같군요. 다른 매거진들도 몇 군데 있고요.”
“그렇군요. 제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될까요?”
“아뇨. 모든 접촉과 협상은 저희 쪽에서 할 겁니다. 리의 이름이 아닌, LVMH 그룹의 이름을 빌려서요. 그리고 몇 가지 대응책을 생각해 뒀습니다. 칼 라거벨트에게 직접적으로 독설을 날리는 건, 오히려 이미지에 해가 될 수 있어요. 조금 더 우회적인 방법으로…….”
타일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던 찰나.
재승이 사뭇 진중한 투로, “타일러” 하고 부르는 것으로 그의 말을 한차례 끊어 보였다.
“그 전에 제가 생각해 둔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어떤지 들어봐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하지만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여지가 있는 결정이라면, 수렴은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짚어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 위법은 절대 안 됩니다.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후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다름 아니라 지면을 통해 제 입장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조금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재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타일러의 표정이 점차 밝아져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재승의 설명이 모두 끝맺어졌을 무렵.
타일러가 저도 모르게 “와…….” 하고 감탄을 흘려 보이고는 나직이 말했다.
“맙소사, 정말 기발한 방법입니다! 엄청난 화제가 될 겁니다! 당신은, 뭐랄까…… 단순히 패션 디자인에 대한 재능과 소질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스타성을 얻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까지 꿰고 있는 것 같군요.”
“과찬이십니다.”
“당장 진행하시면 될 것 같군요. 기한, 기한은 얼마나 걸릴 것 같으십니까?”
“보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내 타일러가 자본주의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확신에 가득 찬 투로 답했다.
“보름 뒤면, 전세가 역전되겠군요.”
타일러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아낸 뒤, 곧장 송 이사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번에 새로이 월 플라워의 아뜰리에에 영입된 동대문 마이스터들에게, 첫 번째 일거리를 맡겨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에게 하달된 첫 번째 일거리는 꽤나 막중한 편에 속하는 듯했다. 반격에 필요한 ‘무기’를 제조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송 이사를 통해 동대문 출신 마이스터들에게 하달한 첫 번째 일거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이번 시즌 쟈넬의 택(Tag)을 달고 출시된 상품들을 완벽히 카피할 것.
단, 완벽히 카피하되 가까이서 보면 쟈넬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도록 상표를 비롯한 시그니처 로고에는 변형을 줄 것.
쉽게 말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면 영락없는 쟈넬 가방이지만, 가까운 곳에서 보면 ‘어라? 쟈넬 가방이 아니었잖아?’라는 의문이 들 것만 같은 제품을 만들어낼 것.
타일러도, 또 안건을 낸 재승 본인도,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테이션 제품들이 단번에 전세를 역전해 줄 막강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