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Label RAW novel - Chapter (16)
블랙 라벨-15화(16/299)
블랙 라벨 15화
16. 아직 발행되지 않은 잡지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메일을 확인하던 권형목 팀장이 나직이 입을 뗐다.
“민 대리. 내가 메일 복사해서 다시 보내줄 테니까, 이번 주 주말 중으로 미팅 날짜 잡아서 보고해 줘.”
“아, 네. 다음 달 발행부에 실릴, ‘리포머(Reformer)’ 특집 건 말씀드리면 되는 거 맞죠?”
리포머 특집.
단연 ‘월 플라워’뿐 아니라, 리폼 의류를 주력으로 삼고 있는 오너 디자이너들 몇 명으로 구성한 특집 취재였다.
사실상 이번 특집은, 재승 때문에 계획하게 된 특집이기도 했다.
권 팀장을 비롯한 편집부 직원들이 품고 있던, ‘리폼 의류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결정적 계기가 월 플라워 블로그였으니 말이다.
“응. 일단은 리포머 특집 건으로 연락해 봐.”
“네? 그럼 다른 용건도 있으세요?”
이내 민 대리가 고개를 살짝 갸웃대며 되물었다. 앞에 붙은, ‘일단은’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사뭇 궁금해졌던 탓이었다.
“응. 얘기 좀 나눠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비정규 칼럼 연재도 제안해보면 어떨까 해서.”
“어라? 잠시만요. 그럼 팀장님도 미팅 같이 가시려고요?”
민 대리가 화들짝 놀라 되묻자,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 권형목 팀장이 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캘린더를 살피며 답했다.
“응. 미팅 날짜는 되도록 다음 주 초로 잡아. 앞·뒤로 일정 빽빽하거든.”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 날짜 잡히면 꼭 말하고.”
“넵!”
이내 권형목 팀장이 민 대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라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사내의 유일한 흡연공간인 건물 옥상으로 향하는 내내, 권형목 팀장은 한껏 진중한 표정으로 상념에 젖어들어 있었다.
* * *
재승이 답신 메일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FTV(F Trend View) 측의 담당자. ‘민성철 대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는 채 3분도 소요되지 않아, 간략하게 끝이 났다.
민성철 대리는 용건을 요약하여 말해준 뒤, 다음 주 중 언제쯤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재승은 저녁 시간대라면 언제든 상관없다고 답했고, 민 대리가 “그럼 다음 주 화요일에 뵐까요? 딱 일주일 뒤에요. 어떠세요?”라고 되묻는 것으로 끝이었다.
결국 지정된 미팅 일자는 지금으로부터 딱 일주일 뒤인, 다음 주 화요일.
자세한 이야기는 우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기에 엉겁결에 날짜를 잡긴 했으나, 영 떨떠름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 만나도 되는 건가? 거절을 하더라도 만나서 하는 게 옳은 거겠지?’
담당자 민성철 대리의 말에 따르면, 다음 발행호에 ‘리포머 특집’이 수록될 예정이라고 했다.
자신이 운영 중인 월 플라워를 포함하여, 리폼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업체들의 오너 디자이너(Owner disgner) 몇 명을 섭외했다는 것이다.
만약 재승 자신이 계속해서 리폼 의류를 취급할 예정이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자체 제작 의류 판매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리폼 의류를 취급하지 않을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특집의 계획 의도와 취지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니, 인터뷰는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쉽긴 하지만… 나중에는 숱하게 하게 될 인터뷰 때문에, 계획을 수정할 순 없지. 일단은 인연을 다져둔다는 데 의의를 두자.’
“하아-.”
아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어 보인 재승이, 이내 제 책상 수납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한 번 살펴볼까?’
근래 바쁜 일정 탓에, 택배 박스에 남아 있는 내용물들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당장 토플 책을 펼쳐봐야 눈에 들어올 리도 없었고, 제대로 된 디자인을 떠올려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잡념을 떨쳐 낼 겸, 또 혹시 박스 안에 넣어둔 ‘잡지’와 ‘시계’에 일련의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나 확인해 볼 겸.
재승이 곧장 손을 뻗어 택배 박스를 꺼내 들었다.
이윽고.
“어…?”
재승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택배 박스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 정확히 말하자면 ‘잡지’ 때문이었다.
백지 상태이던 잡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사라진 백지 잡지 대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 에프 트렌드 뷰 2011년 1월호. ]지금이 2010년 11월이니, 다음 발행 호는 2011년 1월호인 셈이다. 발행은커녕, 제작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에프 트렌드 뷰’의 다음 발행 호가 담겨 있던 것이다.
‘뭘까?’ 하는 의문이 피어오르기 무섭게, 심장이 덩달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폐 속에 뜨거운 모래가 가득 찬 것처럼,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이미 상식 밖의 일들을 잔뜩 경험한 뒤라지만, 이런 류의 충격은 여전히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듯했다.
‘어떻게 아직 발행도 되지 않은 잡지가….’
이내 재승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는, 잡지의 표지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표지는 평범한 국내 패션 잡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잡지 커버로 사용하고자 촬영했을, 유명 배우의 화보 사진이 큼직하게 담겨 있었다.
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위치에, 주요 토픽들에 대한 설명이 짤막하게 적혀 있기도 했다.
‘에프 트렌드 뷰’의 제작 방식과 완벽히 일치하는 형태였다.
이내 재승이 두 눈을 한껏 또렷하게 뜬 채, 표지 곳곳에 적혀 있는 설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2011 S/S 시즌에 대한, 세 남자의 사담.
– 멋대로 선정한 유망주 10명을 발표합니다!
– 2011년을 맞이하며, 한국 패션계의 향후 동향 예측.
연신 표지를 살피던 재승이, 이내 잡지를 펼쳐서는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촬영한 일명 패션 피플(Fashion People)들의 스냅 사진부터 시작하여, 쇼에서 소개된 제품들, 유명 모델과의 개인 인터뷰.
다루고 있는 내용들만 보자면, 꽤나 평범한 축에 속하는 패션 잡지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락. 사락.
책장을 넘기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완전 백지 상태였던 잡지다. 그런 잡지가, 이런저런 내용들로 꽉 차 있다.
이윽고.
분주히 책장을 넘기던 재승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잡지 표지에서 보았던 주요 토픽, ‘멋대로 선정한 유망주 10명을 발표합니다!’가 수록된 부분에서였다.
“허….”
책장을 손에 쥔 재승이 양손이, 엄동설한 칼바람 앞에 선 사시나무를 방불케 할 정도로 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에프 트렌드 뷰’ 매거진의 에디터가 멋대로 선정했다는 유망주 10인에, 자신의 이름도 수록되어 있었던 탓이었다.
– 리폼 의류 판매에서, 자체 제작 의류 판매까지! 월 플라워 블로그 마켓의 오너 디자이너(?) 이재승 군
심지어 그 밑으로는 진행한 적도 없는, 아니, 예정조차 없는 짤막한 인터뷰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내 재승이 고개를 몇 번 내저어 보이는 것으로 정신을 다잡은 뒤, 천천히 인터뷰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